[전원하의 오목돋보기] 전문가의「입」

전문가 칼럼입력 :2004/01/14 00:00

전원하

얼마 전 서울대 교수들이 발표한 관악산 핵 폐기장 유치 제안을 두고 논란이 분분하다. 핵 폐기장 문제를 둘러싸고 빚어진 심각한 국론분열 사태가 해소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싹트는 것이다.이 제안의 주역인 강창순 교수는 핵 물리학 분야의 국제적 권위자로 꼽힌다. 그는 이 제안이 '핵 폐기장이 안전하다는 확신'을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의도를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원전센터 유치가 주민 안전에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과학적 확신을 바탕으로 서울대가 이 시설을 유치하는 방안을 검토해 달라고 총장께 건의한다"고 밝히고 있다.부안 사태는 다른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근본적으로는 핵 폐기장이 위험하고, 따라서 주민 생존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라는 불신 때문에 촉발됐다. 강창순 교수를 비롯한 서울대 교수들은 '학자적 양심에 비춰 안전하다는 확신'이 있다는 주장이다. 그에 대해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주기 위해 서울대 관악 캠퍼스에 그 시설을 유치하겠다는 것이다.속이 빤히 보이는 서울대 교수들의 의견그러나 세간의 평가는 싸늘한 편이다. 일부 칭찬의 목소리도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이 선언의 의도를 의심하는 기류가 강하다.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제안을 내놓아 핵 폐기장 반대파들을 궁지에 몰아 넣으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사실 서울대 다른 교수들과 학생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고 주변 주민들이나 환경단체들의 반대운동도 격화돼, 현실성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다.문제는 그 실현 가능성과 관계없이 국내에선 이 분야 최고 권위자일 전문가들의 견해가 전혀 수용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학자적 양심을 걸면서까지 핵 폐기장이 '안전'하다고 강변하지만 국민들은 이 말을 믿지 않는다. 신용하기는 커녕 불순한 동기가 있는 것은 아닌지 불신만 사고 있다. 이에 비해 원자력 분야에서 전문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환경운동단체들의 '위험' 경고는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과학기술적 판단이 요구되는 사회문제가 빈발하는 요즘, 해당 분야 전문가들의 의견과 판단은 문제 해결의 주된 근거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번 사태는 최고 권위 전문가의 의견과 판단이 묵살되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의 의견과 비전문가의 의견이 동등한 한 표를 갖는다면 그 투표결과가 합리적이지 못할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왜 이런 사태가 촉발되었는가? 물론 최근 우리 사회에 만연한 님비현상으로 집단 이익을 우선시하다 보니 전문가의 권위도 무시되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전문가에 대한 불신이 하루 이틀에 생긴 현상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누적된 결과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지난 역사를 통해 전문가들 스스로 불신의 벽을 만드는 원인들 제공해 왔다는 것이다.이번에 나온 제안만 해도 불신을 가질 수밖에 없는 점이 한둘이 아니다. 핵 폐기장이 '안전'하다는 주장을 강조할 의도였는지 모르지만, 관악산 일대는 원자력 시설 건립에 필요한 인구밀도 기준에도 부합하지 않는 지역이다. 더욱이 인구밀집 지역을 통과해야 그곳까지 폐기물을 운반할 수 있어, 관악산 핵 폐기장 안은 비전문가의 눈으로도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쉽게 말해 '속이 빤히 들여다 보이는 제안'이라는 것이다.이런 일들이 반복되면 전문가들의 권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난 수십 년 동안 실제로 그런 일이 반복되었다. 주로 권력집단의 뜻과 이해를 위해 '속이 빤히 들여다 보이는' 설명을 계속해 온 것이다. 꼭 그것이 학문과 기술 개발에 온 정열을 바친 그 분들만의 잘못은 아니겠지만, 사람들이 지금 왜 전문가의 말을 믿지 못하냐며 힐난하기에는 그동안 쌓인 불신의 골이 너무 깊은 것은 아닐까?ISDN, Y2K, 인터넷, IMT2000···4대 사기극?전문가들의 말 한마디는 의사결정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진실돼야 하고, 비전문가들이 진실되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는 전문가로서 합당한 대접을 받을 수 없다. 전문가와 비전문가가 똑같이 한 표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이다.IT 분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최고정보책임자(CIO)나 정보시스템(IS) 매니저라면 그 회사에서 IT 문제에 대해 전문적 식견을 갖고 최고경영자(CEO)와 현업을 위해 조언함으로써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그의 한마디가 신뢰를 받고 의사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IT 전략을 더 합리적으로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그렇지 못한 경우를 목격하게 된다.경영자들이 IT 투자에 대해 부담을 갖는 가장 큰 이유는 스스로 잘 알지 못하는 문제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는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때 CIO나 IS 매니저는 CEO의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신뢰가 있는 답변을 제공해야 한다.그러나 대개의 경우 그 답변은 기업 내 IT 부문의 이해를 반영한 경우가 많다. 기업 전체의 이익보다는 IS 부서에서 선호하거나 그들에게 유리한 계획을 세우거나 기술과 제품 선정에 편향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IT 부문의 신뢰도가 떨어져 합당한 의견도 쉽사리 묵살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이런 문제는 비단 개별 기업 차원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IT 산업을 이끌어 왔던 글로벌 IT 벤더들은 마케팅 전략 차원에서 신기술과 신제품, 새로운 IT 전략에 대해 업무 혁신 가능성을 부풀리거나 순기능만을 부각시켜 기업들의 과도한 지출을 유발시킨 측면이 있었다. 마케팅의 속성상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지만, 그런 방법에만 의존할 경우 반짝 세일즈에는 유용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일반 사용자들의 불신을 누적시켜 역효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과거 한 전직 정보통신부 장관은 ISDN, Y2K, 인터넷, IMT 2000이 IT 경기 불황을 몰고 온 4대 사기극이라고까지 지적한 바 있다. 물론 그의 지적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지만 지난 2000년 하반기부터 3년여 동안 지속된 IT 불황은 경기 후퇴라는 직접적인 원인 이외에도 99~2000년 사이에 진행된 과잉공급을 주된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일시적인 이익 때문에 IT 산업 전체가 오랜 고통의 세월을 감내해야 했던 것이다.전문가의 의견이 ‘비전문가와 동등한 한 표’가 아니라 '결정적인 한 표'로서 역할을 하는 데에는 신뢰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서 전문가로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들의 '입'은 진중할 수밖에 없다. 어느 개인이나 집단이든 특정한 이해와 요구에 편향되지 않을 수 없겠지만, 전문적 판단의 문제에 대해서는 공정하고 정확한 한 마디를 내놓는 용기와 자제가 필요한 것이다. 서울대 교수들의 제안도 이런 과정과 배려가 선행되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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