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원의 망치와 모루] 작은 리모콘 한 개가 가져다 준 불행(?)

전문가 칼럼입력 :2002/12/30 00:00

김종원

미국 실리콘 밸리에서 잠시 들어온 친구가 재미있는 장난감이라며 명함 크기만한 리모콘과 시리얼 포트에 연결하는 적외선 수신기를 선물로 주었다. 아무런 설명도 없고 제품 번호조차 붙어있지 않지만 드라이버 CD까지 들어있는 제법 그럴듯한 제품이었다. 대체 어디에 쓰라는 것이냐는 질문에 알아서 갖고 놀라는 웃음만 보내왔다. 대체 키보드와 마우스만으로도 충분한 컴퓨터에 리모콘이 왜 필요할까? 드라이버와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리모콘을 이리저리 눌러보니 소프트웨어 DVD 플레이어나 MP3 플레이어가 실행되고 리모콘으로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마우스 이동도 리모콘으로 할 수 있게 돼있었다. 그래서? 뭘 어쩌라고?테스트해보던 리모콘을 집으로 들고와서 소파에 던져놓고 TV 채널을 마구 돌리고 있다보니 친구가 지었던 미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알아서 갖고 놀라고? 음... 넌 죽었다.이미 다들 짐작했겠지만 이 리모콘은 데스크톱 사용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PC를 HTPC(Home theater PC)로 사용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액세서리였던 것이다. TV 옆이나 아래에 PC를 두고 DVD나 MP3 음악을 들을 때 키보드를 쓰지 말고 리모콘으로 플레이어를 조정해서 소파에 편안히 앉아서 즐기라는 것이다.필자를 홈씨어터 매니아의 길로 빠뜨리려는 친구의 간교한 술책임을 깨달았음에도 결국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얼마지나지 않아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PC가 어느새 AV 제품의 영역에서 그럴듯하게 자리잡았다는 것이다.요즘엔 홈씨어터 장비를 장만하는 것이 돈있는 사람들의 자랑거리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 고가의 PDP나 프로젝션 TV에 5.1 또는 7.1 채널의 스피커를 갖추고 고급 DVD 플레이어를 장만해서 넓은 집에서 DVD로 영화를 즐기는 것을 자랑스레 말을 하곤 한다. 어떤 사람들은 친구들을 초대해서 멋진 거실을 자랑하기도 한다.하지만 이미 국내에서는 HDTV 방송을 시작했고, 수신기와 디지털 방송을 볼 수 있는 TV에서는 DVD를 넘어선 화질을 즐기고 있다. 하지만 방송만 볼 수 있을 뿐 녹화를 하거나 편집할 수 있는 장비를 구하기란 쉽지 않아서 더 높은 음질과 화질을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쉬움만 남곤 한다.하지만 PC에 40만원대의 HDTV 수신 카드를 설치하면 HDTV를 볼 수 있고, 또 저장해서 보관하는 것은 물론 편집을 하거나 DivX 포맷이나 MPEG2 포맷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 고해상도 출력을 낼 수 있는 프로젝터가 있다면, HDTV를 훨씬 더 큰 화면으로 방송시간이 아닌 때에도 볼 수 있다.책상 옆의 한 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PC가 이제 거실의 TV나 오디오 시스템 옆으로 옮겨져서 고급 AV 제품으로 대접받게 된 것이다. 친구가 선물한 리모콘은 '너도 AV 시스템 장만에 돈을 써보라'는 충고 아닌 유혹을 한 것이다.인터넷에서 찾아본 알루미늄 케이스로 만들어져 튜닝된 멋진 PC 케이스는 30만원에 육박한다. 오디오 앰프와 같은 외양에 두꺼운 알루미늄 외관은 마치 전용 AV 장비같은 느낌을 준다. 여기에 무선 키보드와 마우스까지 있다면 소파에 앉아서 작업하기엔 안성맞춤이다.물론 HDTV 파일을 끊김없이 재생하기 위해서는 고성능 CPU가 필요하다. HDTV 수신 카드도 필요하고 돈을 더 쓰겠다면 HDTV 하드웨어 방식으로 재생할 수 있는 그래픽 카드를 설치해야 한다. 화면을 녹화하기 위해서는 대용량 하드디스크도 필요하고, 수십 기가바이트씩 생기는 데이터를 보관하기 위해서는 D-VHS같은 별도의 디지털 저장 매체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수백 만원을 들여도 쉽게 얻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여기저기서 얻은 중고 스피커로 만들어진 멀쩡한 오디오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고 노트북 가격보다 비싼 DLP 프로젝터를 사서 멋진 홈씨어터 시스템을 장만하는 상상을 하니 갑자기 뿌듯해진다. TV 볼 시간도 없는데 무슨 HDTV하던 생각에서 DVD보다 더 선명한 영상을 즐길 생각을 하니 자꾸 인터넷에 들어가서 정보를 뒤지게 된다.상상만 해도 이렇게 즐거운 상황이지만 아직 HDTV 컨텐츠 시장은 태동도 하지 않은 상태다. HDTV용 컨텐츠를 담을 미디어도 제대로 없는 상황이지만, 인터넷 강국인 우리나라에서는 벌써 수 기가바이트 용량의 HDTV 컨텐츠가 인터넷을 통해 돌아다니고 있다. 특정 매체가 필요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최근 새 아파트로 이사간 후배로부터 데이터 전송속도가 70Mbps나 된다는 말을 듣고 단위를 잘못 말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 적이 있다. 그 아파트의 경우는 지하실까지 광케이블이 들어온다고 한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HDTV 컨텐츠는 아무런 부담없이 전송되고 교환될 것이다. 이제는 어떻게 교환할 것인가가 아닌 어디에 보관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더 빨리 해결돼야 할 상황이다. 혹자들은 PC 수요가 포화 상태에 다다라서 곧 포스트 PC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고 있지만, PC는 내부적인 큰 변화없이 현재와 같은 형태를 가지고 당당히 AV 제품으로 대접받으면서 우리 집의 거실에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이제 구매자들은 멋진 케이스나 소음없는 컴퓨터를 찾아다니게 될 것이다. 필자는 싸구려 리모콘 하나로 행복에 겨운 불행에 빠져버렸다. 여러분은 피해갈 자신이 있는가? @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