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재민의 한눈팔기]사용자를 위한 사용자설명서를 만들어주세요

전문가 칼럼입력 :2002/05/08 00:00

한재민

홈 네트워크를 무선으로 구현해 볼 작정으로 무선 랜카드 2장과 액세스포인트 등을 준비했다. 케이블을 동원한 일반 랜 작업에 비해 경제적인 부담이 가중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공간적 제약에 대한 한계도 극복할 수 있고, 케이블 등이 눈에 거슬리지 않는 외형적인 장점이 매력적이라는 생각에 무선랜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이 분야에서 문외한에 가깝기 때문에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일단 부딪혀보기로 했다. 우선 거실과 방 사이에 떨어진 두 대의 PC에 무선랜 카드와 소프트웨어 등을 설치하여 어렵지 않게 피어투피어 연결이 가능했다. 그 다음은 ADSL 외장형 모뎀을 액세스포인트를 이용해서 인터넷 공유를 시킬 차례.그러나 액세스포인트 사용자설명서를 수십 번 반복해서 읽어보고, 설치를 되풀이해 보았지만 도대체 신호가 PC에 전달되지를 않는 것이다. 사용자설명서는 CD 케이스 크기의 종이 4장 분량으로 요약 기술되어 있었다. 대충 읽어보아도 특별히 설치에 신경을 써야 할 일도 없었고, 그저 인터넷 공유가 가능하다는 제품 특징과 함께, 설치를 하려면 WAN 포트에 케이블모뎀, ADSL 라우터, 허브, 무선브리지 등의 장비를 연결하면 된다는 것이 전부였다.며칠을 헤매고도 설치는 불가능했다. 이 제품 회사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뒤져봐도 사용설명서에서 언급한 내용 이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회사 고객지원실로 이메일을 보냈고, 며칠 후 친절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ADSL 외장형 모뎀을 WAN 포트에 직접 연결하면 안되고, 그 사이에 인터넷 공유기 또는 허브 등을 연결해야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제품은 인터넷 공유 기능이 탑재된 액세스포인트가 아니라, (인터넷 공유기를 사용하면) 인터넷 공유가 가능한 액세스포인트라는 것이다. 필자의 무지에서 비롯된 점도 없지 않지만, 사용자설명서에 단 몇 자 정도만 언급했더라도 며칠 동안 머리 싸매면서 시간을 허비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구색 맞추기 위한 사용자설명서사실 사용자설명서가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 과거에도 종종 비슷한 경험을 해본 기억이 있다. 아울러 하드웨어 제품보다는 소프트웨어 제품에 대한 사용자설명서의 불만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제품을 구입하고 포장을 뜯어보면 고급 용지에 두꺼운 볼륨, 세련된 디자인으로 꾸며진 사용자설명서를 접하게 된다. 정작 알맹이는 CD 한 장 뿐이지만. 그런데 사용자설명서는 거의 읽어보지도 않은 채 책꽂이에 꼽히는 게 대부분이다. 알고 지내는 주위 사람들을 보더라도 필자와 별반 차이는 없는 것 같다. 사용자설명서의 내용이 부실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사용자 입장이기보다는 개발자의 눈에 비쳐진 모습으로 프로그램 설치, 메뉴 설명 등이 제시된다.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사용하는 데 있어 뭔가 궁금하고, 막히는 것을 시원하게 뚫어줄 수 있는 사용자설명서가 필요한데,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정작 제대로 된 사용자설명서가 필요한 사람들은 서점을 찾아서 별반 차이가 없는 컴퓨터 활용 단행본을 구입하기도 한다. 이런 의구심을 가질 때도 있다. CD 한 장만 딸랑 끼워서 팔자니 뭔가 허전해 보일 테고, 그럼 판매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수 있겠지. 그러니 두꺼운 사용자설명서를 만들어서 끼워넣고 멋지게 포장해버리면 묵직한 게 괜찮아 보일 꺼야. 게시판에는 훌륭한 사용후기가 있다신제품에 집착하고 반드시 써봐야 직성이 풀리는 얼리 어댑터(Early Adopter)족이 인터넷 물결을 타고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일단 맘에 드는 제품은 가격을 따지지 않으며, 구매에 열을 올리기도 한다. 특히 사용자설명서를 읽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제품의 모든 것을 몸으로 직접 부딪히며 체득하고, 특히 인터넷의 분야별 동호회 게시판 등을 통해 올리는 사용후기를 바탕으로 사용자 입장에서 합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에서부터 제품의 결함이나 문제점 등의 유용한 정보를 공유한다. 식상한 사용자설명서는 이들에게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제품을 개발하고 완성하여 소비자에게 출시하기 위해서는 패키지의 디자인이나 사용자설명서 등도 매우 중요한 분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외국의 경우 제품 개발과정에서부터 사용자설명서에 이르기까지 유저빌리티를 전공한 산업공학자들이 참여하여 사용자 입장에서 철저하게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국내의 현실은 어떠한가? 거의 대다수가 따로 돈 주고 단행본 구입할 필요가 없는, 제품을 보다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신선한 사용자설명서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스며있지 않다는 게 문제다.사용자들은 제품을 구입하면서 이미 사용자설명서를 만드는 데 지출되는 원가보다 훨씬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제조회사에서는 제대로 된 사용자설명서를 만들어서 끼워넣을 의무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것도 안 된다면. 다시 말해 사용자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사용자설명서를 만들 재간이 부족하거나, 아예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과감하게 사용자설명서 빼버리고, 제품의 소비자가격을 왕창 낮추는 것은 어떨까? 어차피 인터넷에는 훨씬 쓸만한 사용후기가 널려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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