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신사업자들의 네트워크 투자가 급증함에 따라 장비 구매를 위한 자금 조달 수단으로 벤더 파이낸싱(Vendor Financing)이 최근 각광받고 있다. 지난해부터 일기 시작한 벤더 파이낸싱 움직임은 올해 들어 네트워크 수요의 증가와 비례해 붐을 이루고 있다. 어차피 장비를 들여와야 하는 사업자 입장에서는 구매 비용을 장비 업체에 의해서든, 금융기관을 통해 조달하든 조건만 충족된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세계 시장에서 네트워크 장비 업체가 파이낸싱을 제공하는 것은 전체 매출 대비 약 10∼20% 선. 미국, 유럽 등 리스 금융이 고도로 발전된 선진국에서도 장비 업체들이 운용 여신, 금융 여신 형태로 직접 파이낸싱을 제공하고 있다. 국내에선 25개 정도의 리스 업체들이 환차손으로 문을 닫기 시작한 97년부터 벤더 파이낸싱이 도입됐다. 리스 금융이 활성화됐던 97년 이전에는 장비 수요의 30%까지 차지했으나 리스 업체들이 대부분 도산해 사업자들로부터 '목돈' 부담을 안을 금융기관이 없어졌기 때문. 벤더 파이낸싱은 국내 리스 금융이 사라짐에 따라 기업들의 신규 시설 투자와 장비 구매가 급감하자 장비 업체가 추진한 적극적인 시장 조성 노력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지난해 말부터 신생 통신 사업자들의 경쟁적인 네트워크 확장 과정에서 일시적인 자금 부족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부각되면서 급속하게 확산됐다. 내년 국내 네트워크 장비 시장에서 벤더 파이낸싱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10% 정도일 것으로 전망된다. 예년에 비해 사업자들의 장비 구입 비중이 부쩍 높아진 반면 최근 국내 자금 시장이 꽁꽁 얼어붙어 재무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도 이런 현상을 잘 반영해 준다. 대부분의 사업자들이 경쟁적으로 시설 투자에 나선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자금 수요가 집중됐으나 금융 구조 조정, 주가 폭락 등으로 인해 신규 투자 자금 조달이 쉽지 않은 형편. 벤더 파이낸싱이 사업자들에겐 오히려 '가뭄에 단비'격으로, 장비 구매 조건의 옵션으로 파이낸싱 제공까지 요구하고 있다. 장비 구매 옵션으로 파이낸싱 요구 급증현재 국내에서 벤더 파이낸싱을 제공하고 있거나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네트워크 업체는 시스코 시스템, 루슨트 테크놀로지, 알카텔 인터네트워킹 등 3개 정도. 시스코는 자체 파이낸싱 자회사인 시스코 시스템 캐피탈이 지난 8월 국내 법인을 설립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위해 준비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루슨트, 알카텔 등 벤더 파이낸싱을 진행하고 있는 업체들은 지사의 재무팀 또는 계약팀 등에서 파이낸싱 업무를 부수적으로 취급하고 있다.이와 함께 최근 노텔 네트워크, 3Com, 인텔 등이 기업 고객의 요구가 있을 경우 파이낸싱 지원을 할 수 있도록 준비중이다. 한편 국내 삼성전자도 최근 1∼2개 유선 통신 사업자와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망 장비 공급 과정에서 파이낸싱 제공을 요청받고, 내부 검토를 거쳐 구매자와 협상 단계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루슨트 테크놀로지의 계약부 김병찬 이사는 "현재 국내 시장 자체가 장비 업체 아닌 구매자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만약 몇 개 업체에 의한 독과점 시장이라면 굳이 돈을 빌려주면서 장비를 사달라고 매달릴 필요가 없다. 벤더 파이낸싱을 통해 장비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싶어하는 벤더의 필요와 기왕 구입할 장비라면 파이낸싱 지원까지 받으면서 구매하겠다는 사업자의 요구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벤더 파이낸싱의 형태는 크게 금융 리스(할부 구매), 운용 리스, 프로젝트 파이낸싱의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금융 리스는 일반적으로 외상 거래와 같은 개념으로, 한꺼번에 장비 가격을 모두 지불하지 않고 분할 상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운용 리스는 장비 업체가 장비의 소유권을 갖고 사업자들은 일정 기간동안 장비를 임대해 사용하는 대신 이용료를 내는 것으로, 가장 선호되고 있는 방식이다. 프로젝트 파이낸싱은 말 그대로 장비 구매 또는 공동 사업(프로젝트) 추진을 목적으로 일정 금액 한도에서 장비 업체가 대여해 주는 것. 시스코 시스템 캐피탈 코리아의 백승달 이사는 "초기엔 대형 통신 사업자를 중심으로 프로젝트 파이낸싱이 활발하겠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운용 리스 형태가 주류를 이룰 것으로 전망된다. 외국에서도 운용 리스 형태가 일반적인 유형으로 자리잡고 있다. 운용 리스의 경우 장비의 소유권은 파이낸스 회사에 있고, 구매자는 월 사용료만 지불하기 때문에 장비 소유(자산 증가)로 인한 부채 부담이 없다. 즉 재무 장부를 가볍게 유지함으로써 외형상 사업을 효율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금리 8%, 회사채보다 부담 적다하나로통신, 데이콤, 두루넷 등 지금까지 벤더 파이낸싱을 제공받은 사업자들의 금리 수준은 대체로 8%대, 상환 기간은 2∼5년 정도. 금리의 경우 국제 금융 거래 기준인 리보(런던 은행간 금리, 6.7% 내외)에 가산 금리가 부과된 것으로, 기업의 신용도와 가치 등 여건에 따라 2∼3% 정도의 차등 가산 금리가 적용된다. 이는 국내 회사채 금리가 9%대, 일반 은행 대출 금리가 10%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시중 금리 기준에 비해 1∼2% 정도 낮고 만기는 2∼3년 더 길다. 장비 업체 입장에서도 장비를 공급하기 위한 수단이지만 파이낸싱에 대한 부담을 최소화해야 하고, 위험을 피해가야 한다. 시스코 캐피탈의 백승달 이사는 "벤더의 파이낸스 자회사도 금융 기관은 아니다. 외부 차입을 통해 구매자에게 자금을 제공하는데 '조달 금리(리보+α)'에 자체 운용 비용, 부실 여신 충당금 등 '가산 금리'를 추가한 금리를 적용한다. 파격적인 금리와 상환 조건을 제시하기는 어렵다"며 "벤더 파이낸싱이라고 해서 지나친 기대를 갖는 것은 금물"이라고 지적한다.정해진 기간 동안 일정 금액 한도 내에서 미리 사용하고 나중에 돈을 갚는다는 의미에서 벤더 파이낸싱은 벤더로부터 '신용카드'를 받은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물론 다른 장비 업체의 더 좋은 제품을 구입하기 위해 기한 내에 모두 사용하지 않아도 무방하고, 사용한 만큼만 상환 조건에 따라 몇년 후 영업 활동을 통해 일시 또는 분할 상환하면 된다. 또 시중 금융기관보다 금리 조건이 더 유리하기 때문에 오히려 적정 수준에서 벤더 파이낸싱을 유치해 합리적인 재무 구조를 유지할 수도 있다. 두루넷의 IR팀 성동찬 과장은 "벤더 파이낸싱은 받는 쪽에서 이미지 상승 효과도 없지 않다. 시스코의 경우 파이낸싱을 제공하면서 몇 번씩이나 재무제표, 사업 계획서 등을 요구했고 회사의 성장성과 미래 변제 능력을 검증하는 절차를 거쳤다. 시스코 같은 세계 굴지의 업체에게 두루넷의 비즈니스 모델(BM)이 인정받았다는 증거다. 나스닥에 상장하고 있는 입장에서 특히 외국인들에 대해 간접적인 기업 이미지 상승 효과도 기대된다"고 말했다. 시스코 캐피탈의 백승달 이사는 "예를 들어 100개 업체에 파이낸싱을 제공했는데 이중 한 업체라도 부도나거나 변제받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면 벤더가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리스크를 거의 제로(0%)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정밀 실사를 할 수밖에 없다. 특히 구매자가 미래에 변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기업의 장래성이나 수익성을 심사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심사 절차는 같겠지만 방법은 일반 금융기관과 다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심사·협상 과정서 상환 조건 결정벤더 파이낸싱이 꼭 필요한가에 대해선 논란이 없지 않다. 사업자들이 장비 업체로부터 파이낸싱 지원을 받지 않고도 대량의 장비를 구매할 수 있는 자금 여력이 충분하다면 벤더 파이낸싱은 별 의미가 없다. 그러나 당장 장비를 구입할 자금이 없다면 벤더에 의해서든 금융기관에 의해서든 외부 자금의 유입은 불가피하다. 특히 새롭게 사업을 확장하는 시기엔 엄청난 규모의 설비 투자가 진행되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외부 자금이 유입돼야 한다. 하나로통신의 경우 올해 설비 투자만도 2조원에 달할 정도며, 두루넷은 올 상반기 전체 3000억원 규모에 네트워크 장비 부문 투자만 1500억원에 이른다. 하나로통신의 재무전략팀 김윤호 팀장은 "일각에선 사업자들의 벤더 파이낸싱에 대해 외국 장비 업체에 일방적으로 종속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벤더 파이낸싱은 자금 조달을 위한 일종의 수단일 뿐이며, 여유 자금이 없거나 자금 위기에 몰렸을 때 유치하는 방법이 아니다. 시중 금융기관에 비해 이자율이나 상환 조건이 더 좋을 경우 굳이 꺼릴 이유가 없다"고 잘라 말한다. 루슨트의 김병찬 이사도 "사업자들이 여러 장비에 대한 BMT(벤치마크 테스트)를 모두 거친 다음 계약 전 단계에서 파이낸싱을 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파이낸싱 지원으로 구매 계약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는 있겠지만 장비 선정 자체의 변수는 될 수가 없을 것"이라며 "파이낸싱을 조건으로 구매 가격에서 불이익을 주거나 다른 업체의 장비를 선택하지 못하게 한다면 해당 업체가 오히려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못박았다.오히려 문제는 국내에서 벤더 파이낸싱을 받을 수 있는 사업자들이 많지 않다는데 있다. 자칫 말만 무성하고 대기업이나 기간통신 사업자에게만 자금이 집중되는 현상을 배제할 수 없다. 국내 진출한 네트워크 장비 업체들도 장비 공급 규모나 기업의 외형적인 안정성만 쫓을 것이 아니라 성장성 있는 중소기업이나 벤처기업에도 이 자금이 유입될 수 있도록 적극성을 보여야 한다. 국내 기업들도 건실한 재무 구조와 성장성 있는 사업 모델을 통해 신뢰도를 높여 벤더 파이낸싱을 유치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중소·벤처기업에도 혜택 필요시스코 캐피탈 백승달 이사는 "벤처기업들이 모든 네트워크 설계와 구축 계획을 스스로 끝내고 장비 도입 직전에 파이낸싱을 요구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장비 발주를 끝냈다면 우리 입장에선 파이낸스 지원이 없어도 판매 가능한 상황이다. 벤더 파이낸싱의 목적은 실제 신규 계약을 창출하기 위한 장비 업체의 적극적인 시장 창출 노력의 일환이다. 사업 구상 단계에서 사업성 검토와 자금 운용 방법으로 벤더 파이낸싱을 모색해 봐야 할 것"으로 충고한다.한편 벤더 파이낸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해득실을 따져 구매자 입장에 있는 국내 업체들이 좀더 정밀한 분석을 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파이낸싱 자체에 대해 왈가왈부할 것이 아니라 벤더 파이낸싱을 자사에 유리한 쪽으로 이끌기 위한 협상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사실상 벤더 파이낸싱 자체가 국내에선 생소한데다 외국에서도 명확한 사례와 기준이 없기 때문에 협상 당사자들이 결정하는 조건에 따라 해당 기업의 이해득실이 달라질 수 있다.두루넷 IR팀의 최규범 공인회계사는 "정보력과 양자간 협상력이 중요한 변수다. 금리, 상환 기간, 지원 자금 규모 등 파이낸싱 조건에 대해 엄정히 따져보고 이자율을 최대한 낮추거나 상환 기간을 유연하게 결정하는 등 유리한 방향으로 협상을 유도해야 한다. 국내외 사례를 통해 많은 정보를 축적하고, 실제 협상에서 좀 더 좋은 조건을 끌어낼 수 있다면 벤더 파이낸싱은 금상첨화"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