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재 칼럼] 디지털 월세의 시대, 일할 권리에 임대료가 붙었다

전문가 칼럼입력 :2026/08/20 08:40    수정: 2026/08/20 08:41

이광재 국회 예결위원장

매달 같은 날, 스마트폰에 결제 알림이 줄지어 온다. 인공지능(AI) 비서 구독료, 클라우드 저장 공간, 문서 도구, 협업 프로그램, 디자인 소프트웨어, 화상회의, 그리고 통신비와 몇 개의 콘텐츠 구독까지. 하나하나는 몇만 원이지만 합쳐 놓으면 웬만한 방 한 칸 월세다. 그런데 이 월세에는 보통의 월세보다 무서운 데가 있다. 결제가 끊기는 순간, 사는 곳이 아니라 '일하는 능력'에서 퇴거당한다는 점이다.

번역가는 AI 구독이 끊기면 남들의 절반 속도로 일해야 한다. 디자이너는 소프트웨어 구독이 만료되면 어제까지 만들던 파일을 해당 도구에서 열고 편집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개발자는 클라우드 결제 문제가 장기화하면 서비스 운영이 제한되거나 중단될 수 있고, 학생은 AI 학습 도구가 있는 친구와 없는 자신의 격차를 매일 확인한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소프트웨어는 한 번 구입하면 장기간 사용할 수 있는 영구 라이선스가 일반적이었다. 설치 CD는 낡아도 프로그램은 돌아갔다. 지금은 구독 모델이 빠르게 표준이 되고 있다. 우리는 많은 도구를 소유하기보다 매달 비용을 내고 이용한다. 매달 지대를 갱신해야만 유지되는 노동 능력, 나는 이것을 '디지털 월세'라 부르고자 한다.

이광재 국회 예결위원장

저널리스트 길 두란의 '너드 라이히'는 실리콘밸리에 집중된 기술 권력이 민주주의와 시장에 미치는 위험을 경고한다. 플랫폼이라는 영지 위에서 기업이 수수료라는 지대를 무는 구조 역시 그 권력 집중의 한 단면이다. 이것이 거시의 풍경이라면, 디지털 월세는 그 풍경이 개인의 가계부로 내려온 미시의 현실이다. 봉건제의 농노는 땅에서 쫓겨나면 생계를 잃었다. 디지털 월세의 시대에는 결제에서 밀려나면 생산성을 잃는다. 그리고 AI가 업무의 표준 도구가 되어갈수록 이 월세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 지출이 된다. 최신 도구를 구독하는 사람과 못 하는 사람의 격차는 이제 성실함의 격차가 아니라 임대료 지불 능력의 격차다. 우리는 주거의 월세 격차가 자산 격차로, 다시 계층 격차로 굳어지는 것을 지난 수십 년간 지켜봤다. 같은 일이 일하는 능력의 영역에서 다시 시작되려 한다.

(사진=길 두란 thenerdreich.com)

개인만의 문제도 아니다. 골목의 가게를 보라. 포스기와 결제 시스템, 배달 앱 수수료, 예약 관리, 회계 프로그램, 온라인 광고, 매장 와이파이와 CCTV 클라우드까지, 소상공인의 장부에는 이미 '디지털 고정비'라는 새 항목이 자리 잡았다. 매출이 줄어도 이 월세는 줄지 않는다. 오히려 손님이 플랫폼으로만 들어오는 구조가 굳어질수록 끊을 수 없는 지출이 늘어난다.

중소기업은 한술 더 뜬다. 설계 소프트웨어, 개발 도구, 보안 서비스, 그리고 이제는 직원 수만큼의 AI 좌석(시트) 요금까지. 어느 날 해외 본사가 요금제를 바꾸면 국내 기업 수천 곳의 원가가 하루아침에 달라지는데, 우리는 그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지도 못한다.

디지털 월세는 이렇게 가계와 기업, 국가 경제 전체의 비용 구조 속으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그런데도 가계와 기업의 디지털 구독 지출을 한데 보여주는 종합 통계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극복의 첫걸음은 언제나 측정이다. 가계와 기업의 디지털 구독 지출을 국가 통계로 더 정교하게 잡아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물론 공정하게 말해야 한다. 구독 모델에는 미덕도 있다. 수백만 원짜리 소프트웨어를 목돈 없이 몇만 원에 시작할 수 있게 했고, 늘 최신 버전을 쓰게 했다. 문제는 구독 자체가 아니라 세 가지 조건이다. 첫째, 대체재가 없어 사실상 강제되는 구독. 둘째, 해지하는 순간 내 작업물과 데이터까지 볼모로 잡히는 구독. 셋째, 감당할 수 없는 이들을 노동시장의 출발선에서부터 밀어내는 구독. 이 세 조건이 겹칠 때 구독은 서비스가 아니라 지대가 되고, 시장은 상점이 아니라 영지가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나는 주거 정책의 백 년 경험에서 배우자고 제안한다. 월세 문제의 해법이 '월세 금지'가 아니었듯, 디지털 월세의 해법도 구독 금지가 아니다. 주거에서 우리가 결국 도달한 답은 공공임대라는 바닥, 임차인 보호라는 권리, 공급 확대라는 근본 대책, 그리고 취약층 주거 안전망의 조합이었다. 디지털 월세에도 같은 네 갈래의 설계가 필요하다.

첫째, 공공 디지털 임대를 만들자. 책을 살 수 없는 사람도 도서관에서는 세계의 지식을 읽는다. 공공도서관이 지식의 월세를 없앤 인류의 발명품이었다면, AI 시대에는 그 디지털판이 필요하다. 국민 누구나 기본 성능의 AI와 클라우드, 문서 도구를 무료 또는 실비로 쓸 수 있는 공공 접근 계층, 이를테면 '국민 디지털 도서관'이다. 학생과 구직 청년, 소상공인에게는 상용 도구 바우처를 결합하면 된다. 기초 도구는 공공이 보장하고 고급 도구는 시장이 경쟁하는 이층 구조는, 공공임대주택과 민간 주택시장이 공존하는 원리와 같다. 두보는 비바람에 무너진 초가에서 "어찌하면 천만 칸 너른 집을 얻어 천하의 가난한 선비들을 다 품을까(安得廣廈千萬間 大庇天下寒士俱歡顏)"라고 노래했다. 디지털 시대의 광하천만간은 데이터센터와 공공 모델 위에 지어진다.

둘째, 세입자의 권리에 해당하는 '디지털 임차인 보호'를 법제화하자. 주택 세입자는 퇴거해도 세간살이를 가져간다. 디지털 세입자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구독을 해지해도 내가 만든 파일과 데이터를 온전한 형태로 가져갈 권리, 표준 형식으로 다른 서비스에 옮겨 탈 수 있는 이동권과 상호운용성, 그리고 급격한 요금 인상과 일방적 기능 축소에 대한 사전 고지·경과 규정. 계약갱신과 인상률에 대한 최소한의 예측 가능성이 주거 임대차의 상식이 됐듯, 디지털 임대차에도 상식의 목록이 필요하다. 방향은 이미 세계가 확인해 주고 있다. 유럽은 데이터법을 통해 클라우드 등 데이터 처리 서비스의 전환 장벽을 낮추는 규정을 마련해 '갈아탈 자유'를 계약이 아닌 법의 문제로 끌어올렸고, 개인정보의 데이터 이동권은 GDPR 등 개인정보 규범의 중요한 권리로 자리 잡았다. 우리는 이를 베끼는 데 그치지 말고, AI 구독과 작업물의 소유권이라는 다음 단계의 질문, 내가 AI와 함께 만든 결과물은 누구의 것인가, 해지 후에도 나의 창작 이력은 내 것인가에 먼저 답하는 나라가 될 수 있다. 규범을 수입하는 나라가 아니라 수출하는 나라가 되는 길이 여기에 있다.

셋째, 월세를 근본적으로 낮추는 것은 결국 공급이다. 주거 월세가 공급 없는 보조금만으로 잡히지 않듯, 디지털 월세도 보조금만으로는 지대를 올려줄 뿐이다. 독자 파운데이션 모델과 오픈소스 생태계에 대한 투자, 공공 컴퓨팅 자원의 확충이 바로 디지털 공급 대책이다. 국산·개방 대체재가 존재하는 시장에서는 어떤 영주도 지대를 함부로 올리지 못한다. 여기에 하나를 더하면, 교육이다. 도구 사용료를 대주는 것을 넘어 도구를 다루는 역량 자체를 전 생애에 걸쳐 공급하는 것, 평생학습 계좌에 디지털 도구 접근과 훈련을 결합하는 방식은 개인의 생애 설계와 국가의 인적 투자에 함께 답한다.

넷째, 마지막 안전망이다. 실직이나 폐업으로 소득이 끊긴 사람에게 지금 가장 먼저 끊기는 것이 역설적으로 디지털 도구다. 그런데 그 도구야말로 재취업과 재기의 사다리다. 이력서를 다듬고, 새 기술을 배우고, 작은 온라인 가게를 다시 여는 모든 과정이 구독 위에서 이뤄진다. 고용 안전망이 실업급여로 소득의 단절을 메우듯, 전직 지원과 재기 지원 프로그램에 핵심 디지털 도구의 접근 유지를 결합해 '능력의 단절'을 메워야 한다. 월세가 밀렸다고 연장을 압류당한 목수가 다시 일어설 수 없듯, 결제가 끊겼다고 도구를 잃은 노동자는 다시 시작할 수 없다.

혹자는 물을 것이다. 민간기업의 가격 정책에 국가가 왜 개입하느냐고. 나는 거꾸로 묻고 싶다. 전기와 수도가 일과 삶의 전제가 됐을 때 우리는 그것을 보편 서비스로 설계했다. 초고속 인터넷이 그 반열에 올랐을 때도 그랬다. AI와 클라우드가 노동의 전제가 된 시대에, 그 접근을 온전히 각자의 지갑에 맡겨두는 것이야말로 태만이 아닌가. 시장을 대체하자는 것이 아니다. 시장이 영지가 되지 않도록 바닥과 출구와 대체재를 설계하자는 것이다. 육성이냐, 규제냐가 아니라, 언제나 그렇듯 순서의 설계다.

식당 사장님의 예약 관리도, 서당의 아이들 학습도, 경로당 어르신의 병원 예약도 이미 구독의 세계 위에 있다. 디지털 월세는 몇몇 전문직의 문제가 아니라 민생 그 자체다. 2045년의 대한민국이 매달 결제일마다 일할 권리를 갱신받는 임차인의 나라가 될지, 누구나 기본 도구를 손에 쥐고 출발하는 나라가 될지, 그 갈림길은 멀리 있지 않다. 설계하고, 완성해야 한다. 천만 칸의 디지털 광하를 짓는 일, 지금 시작해야 한다.

영화 '인타임'의 한 장면.

글을 맺으며 영화 한 편을 떠올린다. 2011년 작  '인 타임'이 그린 세계에서 화폐는 시간이다. 팔뚝의 시계에 남은 시간이 곧 목숨이라, 부자는 몇백 년을 쌓아두고 사실상 불멸을 살고 빈민은 하루 몇 시간을 벌어 그날을 산다. 영화에서 가장 서늘한 장면은 총격도 추격도 아니다. 버스비가 예고 없이 오른 날, 아들에게 달려오던 어머니의 시계가 품에 닿기 몇 걸음 앞에서 멈추는 장면이다. 요금 인상 한 번이 한 사람의 생사를 갈랐다. 개봉 당시에는 디스토피아 우화였던 이 장면이, 매달 결제일마다 일할 능력을 갱신받는 오늘 우리에게는 점점 예언처럼 읽힌다. 접속료를 감당하는 자와 못 하는 자로 삶의 등급이 갈리는 세계, 영화는 그 끝을 미리 보여주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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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영화와 현실의 결정적 차이가 하나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은 이미 완성된 체제 안에서 태어났지만, 우리는 아직 그 체제가 지어지는 공사장 앞에 서 있다는 것이다. 설계도를 고칠 수 있는 마지막 시간, 국회가 분발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누군가의 시계가 멈추기 전에, 모두의 팔목에 기본의 시간을 채워 넣는 일, 그것이 지금 정치가 해야 할 일이다.

국민에게 투자하는 나라, 국민이 부자가 되는 나라, 그래서 나라가 부강해지는 나라로 가야 하지 않을까.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광재 국회 예결위원장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4선 국회의원이다. 연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으며, 노무현 정부 대통령비서실 국정상황실장, 제35대 강원도지사와 제17•18•21•22대 국회의원, 제36대 국회사무총장을 역임했다. 정치인과 행정가로 재직하면서 과학기술과 IT 쪽에 많은 기여를 했다. 노무현 정부 국정상황실장으로 재직하면서 판교 IT 밸리 조성의 기틀을 닦았으며, 문재인 정부 시절에는 K-뉴딜본부장으로서 인공지능 시대를 대비한 '데이터댐' 사업을 추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