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자국 중심의 안정적인 반도체 공급망을 확보하기 위한 각 국가별 경쟁이 격화된 가운데 미국에 이어 유럽, 인도, 일본 등이 속속 전열을 갖춰 뛰어들고 있다. 이들 국가는 정부가 반도체 제조시설에 파격적인 보조금과 세제혜택을 제공해 자국 내 반도체 생산량을 늘린다는 목표다. 유럽은 현재 9%로 떨어진 점유율을 2030년까지 20%로 끌어올려 시스템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다. 일본은 80년대까지 메모리 강국이었다가 1위를 한국에게 내어줬지만, 이번 투자를 계기로 종합반도체 국가로 거듭나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세웠다. 미국의 제재로 중국이 위축된 가운데, 인도는 중국의 대체 국가로서 공백을 채운다는 전략이다. 이에 지디넷코리아는 반도체 공급망 확보를 위한 각 국가별 현황과 전략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일본이 반도체 산업에서 부활을 꿈꾸며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일본 정부는 과거 2000년대 초 실패했던 반도체 정책의 수순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해 자국 기업과 글로벌 반도체 기업 간의 합작 회사 설립을 통해 파운드리 시장에 진출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특히 미국 IBM, 대만 TSMC와 협력이 눈에 띈다.
이는 일본이 설계 및 파운드리 분야에서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빠르게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일본은 2002년 반도체 산업 중흥을 목표로 정부와 반도체 업체가 돈을 모아 80억엔 규모의 '차세대반도체개발(HALCA) 프로젝트', 315억엔 규모의 첨단 SoC 기술개발 '아스프라(ASPLA) 프로젝트'를 추진했지만 실패한 바 있다.
"또 다시 실패는 없다"…IBM·TSMC 글로벌 반도체 기업과 공동투자
김형준 차세대지능형반도체사업단장은 "일본은 80년대까지만 해도 3대 메모리 기업을 보유한 반도체 강국이었으나 한국과 대만에 밀리면서 후퇴하고 쇠약해졌다"며 "반도체가 이전과 달리 글로벌 아웃소싱이 힘들어지고 국가안보에 큰 영향을 주게 되면서, 일본도 반도체 제조업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일본은 첨단 공정 반도체 제조 사업을 위해 지난해 8월 토요타, 소니, 키오시아, NTT, 소프트뱅크, NEC, 덴소, 미쓰비시UFJ은행 등 8개사가 공동으로 '라피더스' 연합을 설립했다. 이들 기업은 각각 10억엔(약 91억원)을 출자했으며, 일본 정부도 700억엔(약 6천336억원)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같은해 11월 라피더스는 미국 IBM과 손을 잡았다. 양사는 2027년까지 AI, 데이터센터용 2나노미터(nm) 공정 반도체를 공동 개발한다는 방침이다. 현재 라피더스 연구원은 미국 뉴욕주에 위치한 'IBM 나노테크 컴플렉스' 연구센터에서 2나노 설계를 공동 연구하고 있다.
또 라피더스는 올해 4월 훗카이도 치소세시에 2나노 공정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라피더스 공장 건설에 보조금 3천억 엔(약 2조7천억 원)을 추가로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리오 길 IBM 수석부사장은 "라피더스와 협력해 차세대 반도체를 개발함으로써 미국, 일본, 유럽 등 지리적으로 균형잡인 글로벌 공급망을 구축하겠다"고 목표를 밝혔다.
대만 파운드리 업체 TSMC는 지난해 말 일본 소니, 덴소와 합작법인 JASM을 설립하고, 일본 구마모토현에 파운드리 1공장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고객사로 소니와 덴소를 확보한 셈이다. 1공장은 12, 16, 22, 28나노미터(nm) 공정 기반 팹이며, 내년 12월에 양산을 목표로 한다. 총 1조2천억엔(약 10조8천억 원)이 투자되며, 일본 정부는 총비용의 40%에 해당하는 4760억엔(약 4조3천억 원) 을 지원한다.
또 지난 7월 TSMC는 구마모토현에 2공장 추가 건설을 결정했다. 두 번째 파운드리 공장은 내년 4월에 착수해 2026년 12나노 공정 칩을 생산할 계획이다. 일본 정부는 TSMC 2공장 보조금 규모를 검토 중이다.
대만 3위 파운드리 업체 PSMC(파워칩 세미컨덕터)는 지난 7월 일본 SBI홀딩스와 공동으로 회사를 설립해 일본에 12인치 웨이퍼 파운드리 팹을 건설한다고 밝혔다. PSMC는 산업용 및 차량용 시장을 겨냥한 40나노, 55나노 공정 칩을 생산하고, 향후 28나노 칩 생산을 목표로 한다. 또 PSMC는 일본에 첨단반도체의 연구소 설립도 검토 중이다.
그 밖에 지난 5월 미국 메모리 업체인 마이크론테크놀로지는 5천억엔(4조8천억 원)을 투자해 일본 히로시마현에 차세대 D램(10나노 6세대) 공장을 증설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에서 최초로 극자외선(EUV)를 활용해 반도체를 생산하는 사례다. 일본 정부는 마이크론에 2천억 엔(1906억 원) 보조금을 약속했다.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러브콜로 한국 삼성전자도 보조금을 지원받아 일본 요코하마시에 반도체 후공정 시제품 생산라인을 구축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텔 역시 일본 내 연구개발(R&D) 거점 센터 개설을 고려 중이다.
■ 日, 설계기술·인력 부족 약점…韓 초격차 기술로 대응해야
일본이 주요 반도체 공급 국가로 성공할 가능성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나온다.
김형준 단장은 "일본 라피더스가 2027년까지 2나노 공정으로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현재 일본 기업이 제조할 수 있는 시스템반도체는 15년 전에 양산이 시작된 40나노 제품이다. 일본은 독자 첨단 반도체 설계 기술이 없다는 약점 때문에 IBM과 협력을 결정했다. 하지만 그동안 IBM은 삼성전자와 공동으로 첨단 반도체를 연구해왔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그 기술을 일본에 공유할 수 없을 가능성이 있다. 삼성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연구원들은 IBM 뉴욕 연구센터에서 공동연구를 해왔다. 일례로 2021년 IBM이 기존 보다 전력 사용량을 최대 85%까지 절감할 수 있는 신규 반도체 공정 VTFET 기술을 발표한 것도 삼성전자와 공동 연구한 결과물이다.
또 일본의 부족한 반도체 전문 인력도 난제다. 김 단장은 "전세계적으로 반도체 인력이 부족하지만 일본은 반도체 인력이 더 부족한 상황"이라며 "그동안 반도체를 주력으로 해오지 않았기 때문에 대학 교수와 연구원 수가 적을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반면, 일본이 반도체 소부장이 강하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파운드리도 잘 할 수 있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은 기술 초격차 전략을 지속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김용석 반도체공학회 부회장(성균관대학교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라피더스는 사실상 IBM 기술이라고 봐야 한다. IBM은 과거의 명성에 비해서는 약화된 감이 있지만 여전히 IBM 기술력은 뛰어나다고 평가받기에 지켜볼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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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 "결국 한국이 반도체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레거시부터 첨단공정까지 시스템반도체 및 파운드리를 골고루 투자해야 하고, 계속 1등을 지켜야하는 메모리 분야에서도 투자를 지속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형준 단장도 "일본이 기술 개발하는 동안 우리는 더 빨리 달아나야 한다”라며 “새로운 기술, 새로운 공정을 한국이 빠르게 선점해서 치고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