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마이크로소프트·메타(구 페이스북)에서만 20년 가까이 일한 한국인 여성 '일잘러'(일 잘하는 사람)가 있다. 그렇다고 요즘 몸값 높기로 유명한 개발자는 아니다. 제품 마케팅/홍보 직무로 시작해 수요공급 관리, 그리고 오퍼레이션·전략·기업 간 거래까지 다방면에서 두루 경험을 쌓았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빅테크 기업을 누비던 그녀는 직장인 생활 20년을 코앞에 두고 덜컥 회사를 나와 창업했다. 회사 이름은 '피플+컬쳐'. 대표 포함 전체 직원이 3명뿐인 아직은 실험적인 회사지만,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사무실을 두고 창업가와 투자가 등 모든 직장인들의 '마음챙김'과 조직문화 개선에 힘쓰고 있다.
지난 7일 디캠프와 아마존웹서비스(AWD)가 개최한 스타트업 행사에서 마인드풀니스 강연을 위해 잠시 한국에 들어온 김미루 피플+컬쳐 대표를 만나 미국 실리콘밸리에서의 지난 경험과 창업 배경에 대해 들어봤다.
애플코리아를 시작으로 미국 본토 MS에 가다 ..."타이밍이 중요"
김미루 피플+컬쳐 대표는 2000년대 초 애플코리아에 입사해 마케팅과 홍보 업무 등으로 테크 기업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이 때가 '아이팟'이 나온 직후여서 MP3 플레이어와 같은 휴대형 음악 재생기기가 음악 시장을 어떻게 바꿔 나가는지, 특히 아이팟이 이 중심에서 어떤 변화의 역할을 하는지 생생히 목격했다.
"기술이 매력 있는 게 개인 생활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거잖아요. 애플코리아에 근무하면서 이런 변화와 영향을 직접 보게 됐죠."
그러다 그는 사업 경영 분야의 전문성을 키우고자 미국으로 건너가 MBA(Master of Business Administration) 과정을 밟았다. 그러다 애플과 같은 하드웨어 중심이 아닌 소프트웨어 중심의 기업에 관심이 생겨 마이크로소프트(MS)에서 인턴십을 거쳐 정규직으로 일하게 됐다. 당시(2009년)는 스티브 발머가 MS 대표로 있던 시절로, 모바일 기기로 모든 기술과 서비스들이 넘어가면서 MS가 윈도폰을 만들던 때였다.
"그 때 제가 제품 마케팅으로 일했는데, MS가 윈도폰 광고에만 무려 5억 달러(약 6천600억원)를 썼어요. 그런데도 결과적으로 망했어요. 아무리 많은 돈을 쓰고, 똑똑한 사람들이 있어도 '타이밍'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죠."
김미루 대표는 성격상 MS의 기업문화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이미 세계적인 대기업이었고 모든 조직 체계가 굳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개개인의 업무와 성과가 반영되거나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김 대표는 거대한 기계를 이루고 있는 하나의 작은 부품에 지나지 않았다.
“권위적이고 회사가 너무 크다보니 정부 기관에서 일하는 것 같아서요. 반면 애플은 매우 민첩하게 일하고, 직급이 낮은 직원도 겉으로 잘 드러날 수 있었거든요. 1년 남짓 일하고 애플 본사로 이직을 했죠. 그게 2010년 아이폰4가 출시됐을 때였어요.”
권위적인 MS 떠나 애플 본사로 전진...팀쿡의 꼼꼼함에 놀라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 대표로 있을 당시 김미루 대표는 애플 본사에서 수요공급 관리팀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아이폰4와 아이폰4s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시기였고, 그에 맞는 공급량을 맞추기 위해 사전에 수요를 예측하고 어느 정도의 기기를 폭스콘 공장 등에서 생산해야 되는지를 예측하는 역할이었다. 하드웨어 사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 때 배우게 됐다.
“팀쿡 애플 대표가 당시 최고운영책임자로 있을 때였어요. 매주 커다란 엑셀 시트를 출력해서 수요 공급량을 어떻게 잘 관리했는지를 팀쿡이 직접 점검했죠. 놀라웠던 건 그가 특정 셀에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 숫자를 보고, 지난주에는 얼마로 적혀 있었는까지 기억하는 거였어요. 어떤 변수를 놓쳤나 매우 꼼꼼하게 가려내는 작업을 그렇게 했어요.”
또 한 번의 도전...페북의 '모바일 퍼스트' 그리고 슬며시 찾아온 번아웃
사회 경력 10년차 무렵 김미루 대표는 또 한 번의 도전을 강행(?)했다. 당시 빠른 성장 곡선을 그리던 페이스북(현 메타)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페이스북이 상장하고 나서 1년 뒤인 2013년 김 대표는 페이스북의 ‘모바일 퍼스트’ 전략에 따른 앱 개발 과정을 지켜봤다. 그리고 페이스북이 웹을 넘어 모바일 시대에 맞춰 성장할 수 있는 마케팅 전략에 기여하면서, 변화되는 세상의 소통 방식을 지켜봤다. 인스타그램과 왓츠앱 인수를 통해 페이스북-인스타-왓츠앱이 상호 연결되고 시너지를 내는 과정도 경험했다.
그리고 지난해 9월 퇴사하기 전까지 그는 페이스북에서 마케팅, 오퍼레이션, 애널리틱스, 전략, 딜 매니지먼트 등의 업무를 했고 우수한 업무 평가도 받았다. 화려한 이력과 수식어가 그녀를 빛내고 있을 무렵, 그런데 그는 새로운 고민에 빠지게 됐다.
“회사 이름만 보면 화려하고, 기술이 세상을 바꾸는 멋진 일을 해온 것 같지만 페이스북 입사 때부터 저도 모르게 번아웃이 시작된 것 같아요. 의미있는 일에 일조한 것 같지만, 내 스스로에게는 의미없는 변화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마음이 피폐해진 것 같았고 건강도 안 좋아졌어요. 저는 문제가 닥치면 뭔가를 자꾸 배우는 것으로 이겨내려고 해요. 이 때 배우게 된 게 바로 구글의 자기 내면 찾기 프로그램, 스탠포드 의대의 조직에서 감정적으로 혹사 당하는 사람을 위한 프로그램이었어요.”
화려한 간판 뒤에 그늘진 나...'나'를 찾는 새로운 도전의 시작
김미루 대표는 구글과 스탠포드 의대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강사 자격증까지 따게 됐고, 그 후 직원들을 대상으로 마음치유를 위한 명상법 등의 커뮤니티를 운영했다. 지난해는 무려 3천명이 그의 수강생이었다. 코로나19 대유행 때에는 줌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본업만으로도 바빴지만, 이런 명상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오히려 그는 스트레스를 덜 수 있었다고.
“회사 다니면서도 괴롭지 않을 수 있구나를 깨달았어요. 본업도 하고 가르치는 일도 했는데 오히려 스트레스를 덜 받았죠. 페이스북을 나오기 전부터 5년 간 업무 성과 평가가 제일 좋았고요. 이런 것들을 알리고 싶었어요. 일하는 건 당연히 힘든 게 아니다, 회사 다니면서도 괴롭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요.”
김미루 대표는 회사는 나오기 전 달인 지난해 8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법인(피플+컬쳐)를 세우고 스타트업들이 창업하고 조직을 키우는 과정에서 건강한 문화를 이식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총 3명의 직원과 또 여러 협력사와 함께 조직의 문화는 어때야 하는지, 또 개개인의 내면 관리는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익히고 그들만의 힘으로 자생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기업 문화의 결정은 일찍 이뤄지고, 한 번 정해지면 잘 변하지 않아요. 애플이나 페이스북도 마찬가지였죠. 모든 조직 내 문화의 시작점은 창업 초기에 이뤄지기 때문에 스타트업이나 벤처캐피탈이 이 부분을 고려해 팀 조직을 꾸렸으면 합니다. 이론적으로만 배우는 수업이 아닌, 기업 문화에 들어가서 자생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어 공유하고, 변화의 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시스템을 실험적으로 운영하고 있어요.”
여전히 실패에 낯선 한국..."직장인들에게 그들만의 '공간'을 줘라"
적지 않은 시간 국내외 테크기업에서 다방면에서 경험을 쌓은 만큼 선배로서 김미루 대표에서 우리 기업과 스타트업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말을 해달라고 했다.
“(창업은) 실패가 기본이에요. 한국에도 스타트업 자생 문화가 많이 생겼지만 여전히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좋지 않은 인식들이 있는 것 같아요. 미국에서는 실패가 부끄럽지 않아요. 실패를 통해 배우는 거라는 인식이 크죠. 조직은 직원들에게 돈을 버는 그 이상의 의미를 주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개개인이 하고 싶은 걸 해볼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을 주는 거 말이에요.내가 하는 일에 내 목소리가 들어갈 수 있다면 그 직원은 자기 일에 애정이 생기고 스트레스를 덜 받을 수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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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루 대표는 정기적인 커뮤니티 참여도 추천했다. 여러 사람과 함께 모여 하나의 주제를 놓고 서로의 생각과 의견을 수평적으로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심리적 안정 효과가 크다는 것. 김 대표도 매달 이런 커뮤니티 두 곳에 참여하며 스스로의 마음을 치유하고 있다.
“저는 그 때 그 때 관심있는 거를 따라갔던 것 같아요. 식상한 얘기같지만 내가 해보고 싶은 일을 찾아갔던 거죠. 사회 초년생분들은 많은 실험을 하는 시기이기도 하니까 내가 좋아하는 걸 찾는 게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많이 배울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좋죠. 뒤돌아보니 저는 배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배우고 싶으니까 새로운 직장을 찾아간거죠. 운이 좋기도 했고요. 내가 나를 잘 아는 것, 그리고 못할 일은 없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선을 긋지 않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