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소셜 플랫폼도 전화처럼 규제?…뜨거운 공방

[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콘텐츠 삭제 금지" 텍사스법 논란

데스크 칼럼입력 :2022/05/19 16:12    수정: 2022/05/19 18:32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최근 미국에선 임신 24주 이내 낙태수술을 허용한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둘러싼 공방이 치열합니다. 판례를 파기한 미국 연방대법원의 98쪽짜리 다수 의견 판결문 초안이 유출된 때문입니다. 

‘낙태권 공방'의 시발점 역할을 한 것은 낙태금지 시한을 임신 6주로 당긴 텍사스 주 법률입니다. 이 법률 위헌소송이 연방대법원까지 올라가면서 ‘로 대 웨이드’ 판례 파기 위험에 처했습니다. 

이처럼 텍사스 주는 미국 내에서도 대표적인 보수의 성지입니다. 낙태를 비롯해 총기 소지, 인종 문제 등에서 보수적인 가치가 가장 강하게 통하는 곳입니다. 

'보수의 성지' 텍사스 주가 이번엔 소셜 플랫폼의 법적 권한을 대폭 제한하면서 미국 IT업계를 뒤집어놨습니다.

(사진=씨넷)

■ 1심서 위헌 판결받은 텍사스 'HB20'법, 항소심서 기사회생  

텍사스 주 의회는 지난 해 9월 ‘HB 20’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소셜 미디어 기업들이 폭력 선동·증오 발언 등을 이유로 콘텐츠를 삭제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이 법의 골자입니다. ‘HB 20’은 2021년 12월부터 시행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자 넷초이스, 컴퓨터 및 통신산업연맹 등 두 기관이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1심 법원은 이들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법 시행 직전인 지난 해 12월 1일 ‘HB 20’ 집행을 금지했습니다. ‘HB 20’가 수정헌법 1조를 위반했다는 것이 판결 이유였습니다. 소셜 미디어 기업들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항소법원에서 판결이 뒤집힙니다. 제5연방순회항소법원은 지난 14일 별다른 설명 없이 1심 판결을 기각했습니다.

결국 이 공방은 연방대법원까지 갈 것으로 보입니다.

(사진=미국 전자프론티어재단)

‘보수의 성지’ 텍사스 주에서 시작된 소셜 플랫폼의 콘텐츠 모더레이션 권한 문제는 여러 가지 쟁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잘 아는대로 미국은 1996년부터 통신품위법 230조를 통해 인터넷 플랫폼 기업들을 보호해 왔습니다. 이용자들이 올린 콘텐츠에 대해 플랫폼 기업들이 법적인 책임을 지지 않도록 보호해준 겁니다.

이 조항 덕분에 야후를 비롯한 초기 인터넷 기업들은 소송 당할 걱정없이 맘껏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대신 플랫폼 기업들은 유해하거나 부적절한 콘텐츠에 대해선 자율적으로 규제해 왔습니다. 콘텐츠를 삭제하기도 하고, 심할 경우 계정 퇴출 조치를 취하기도 합니다. 지난 해 폭력 선동 문제로 트위터 등에서 퇴출당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런데 텍사스 주 법은 플랫폼 기업들의 콘텐츠 관리 자체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월간 이용자가 5천만명 이상인 소셜미디어는 텍사스 주민들의 의견 표현을 차단, 금지, 삭제, 차별해선 안된다고 규정한 것입니다.

넷초이스를 비롯한 단체들은 텍사스 ‘HB 20’ 법이 플랫폼 기업에게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텍사스 주는 “소셜 미디어 플랫폼은 전보나 전화 회사의 21세기 후손”이라는 입장입니다. 그런 만큼 소셜 미디어 플랫폼도 ‘커먼 캐리어’로 취급해야 한다는 겁니다.

클래런스 토머스 판사

연방대법원에도 텍사스 주 의견에 동조하는 판사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클래런스 토머스 판사입니다.

토머스 판사는 지난 해 일부 디지털 플랫폼은 전화회사 같은 커맨캐리어와 유사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토마스 판사는 “전통 전화회사들은 사람들을 연결하기 위해 물리적인 전기선을 설치했다"면서 “디지털 플랫폼들은 같은 방식으로 통제될 수 있는 정보 인프라스트럭처를 구축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철도를 비롯해 증기선, 전신, 전화 같은 커먼 캐리어들은 차별금지, 차단금지 등의 공적 의무를 지게 됩니다. 

■ 통신품위법 230조 공방과 맞물려 논란 계속될 듯 

미국 연방대법원은 ‘상고 허가제’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상고한다고 해서 곧바로 심리 대상이 되는 건 아닙니다. 9명의 대법관 중 4명이 ‘심리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야만 상고심이 열리게 됩니다.

그런데 소셜 미디어 플랫폼의 콘텐츠 관리 행위는 굉장히 중요한 쟁점이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연방대법원이 법적인 기준을 제시할 필요성이 높은 상태입니다.

사실 소셜 미디어 플랫폼의 법적 책임 문제는 이미 여러 형태로 공방의 대상이 돼 왔습니다. 그 동안 소셜 플랫폼의 ‘수호 천사’ 역할을 했던 통신품위법 230조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은 상태이구요.

잘 아는대로 미국은 2016년 대통령 선거 이후 페이스북을 비롯한 소셜 플랫폼을 통해 무차별 유포되는 허위정보 때문에 많은 사회적인 갈등을 겪었습니다. 소셜 미디어 플랫폼들이 사회적 영향력에 걸맞은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한 편입니다. 조 바이든 대통령 역시 통신품위법 230조 개정에 찬성하고 있습니다.

(사진=미국 연방대법원)

통신품위법 230조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는 건 보수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보수 쪽에선 조금 다른 피해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 플랫폼들이 보수적인 의견을 의도적으로 더 탄압하고 있다는 겁니다. 최선봉에서 이런 주장을 펼치고 있는 인물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입니다.

텍사스 주가 통과시킨 ‘HB 20’법은 보수 쪽의 이런 정서를 담아낸 법입니다.

‘로 대 웨이드’ 판례 파기 움직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최근 미국 연방대법원은 보수 쪽으로 많이 기울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미국 연방대법원이 소셜 플랫폼의 ‘콘텐츠 관리권’에 대해선 어떤 해법을 내놓을까요? ‘로 대 웨이드 판례 파기’ 움직임에서 보여준 대로, ‘HB 20’ 건에 대해서도 보수의 손을 들어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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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선 이 질문에 대해 똑 부러진 대답을 내놓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다만 텍사스 주 법이 합헌 판결을 받을 경우엔, 소셜 미디어 플랫폼이 더 혼탁해질 가능성이 많아 보입니다. 극단적인 주장들이 난무할 우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엔 의회가 입법을 통해 새로운 활로를 뚫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