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이해진 네이버 창업주가 글로벌 시장 진출 의지를 밝히며, 유럽 진출 계획을 공식화한 지 약 1년의 시간이 지났다.
국내 소프트웨어의 성공사례가 없는 불모지인 유럽에서 네이버는 생각보다 빠르게 지난 1년 간 대규모 투자 활동과 인재 육성 기반 마련, 기술기업 인수까지 발 빠른 행보를 보여 왔다.
많은 ICT 기업들이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새로운 대비책이 필요하다면서도 정작 국내 시장에 머무는 것과 달리, 네이버는 이해진 창업주의 의지로 유럽 시장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건 모습이다. 유럽 진출 거점은 문화의 중심지 프랑스로 잡았다.
적지 않은 기업들이 가까운 나라인 중국이나 일본, 실리콘밸리가 위치한 미국 시장에만 매달리는 사이, 눈을 돌려 유럽의 가능성을 점치고 약 1년 전부터 이 시장에 발을 담근 네이버의 성공 전략과 현재까지의 행보를 정리해 봤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본 유럽 IT 시장 현황
네이버가 유럽 시장 거점으로 삼은 프랑스는 전통적인 문화 강국이며, 유럽에서 테크 투자 분야 1위 국가로 알려져 있다. 포천 500대 기업의 본사가 프랑스에 가장 많이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관련업계에 따르면 프랑스에서는 매년 10만 명 이상의 톱 엔지니어가 배출되고, 1만2천개 이상의 프랑스 스타트업이 활동한다.
특히 ‘스테이션F’와 같은 스타트업 육성을 위한 새로운 정책이 시행되면서 프랑스는 유럽뿐 아니라 글로벌 스타트업과 IT 기업들이 모이는 대표적인 곳으로 떠오르고 있다.
유럽 보험사인 아트라디우스(Atradius)에 따르면 지난해 프랑스 ICT 시장 규모는 670억 유로에 달하며, 지속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프랑스 인터넷 시장은 구글, 페이스북 등 미국계 글로벌 인터넷 기업이 지배하고 있으나, 쇼핑 등 일부 분야는 프랑스 기업들이 활약하고 있다. 검색은 구글이 90.63%를 차지하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는 페이스북을, 쇼핑은 아마존을 가장 많이 사용한다.
프랑스 정부는 미국 기업에 대항하기 위해 ‘프렌치 테크’ 정책을 중심으로 스타트업을 육성하고 적극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유럽은 문화, 기술 선진국인 반면, 인터넷 산업이 성장한 2000년대 초반 기업과 정부 모두 변화의 흐름을 제대로 주도하지 못해 미국 글로벌 인터넷 기업에 시장을 내줬다.
이후 모바일, 빅데이터 시대로 넘어가며 인터넷 산업의 중요성이 더 커지면서 유럽연합과 각국 정부들이 글로벌 인터넷 기업들의 독과점이나 불공정 행위, 세금 문제 등을 집중 감시하고 있다. 또 유럽 내 스타트업들을 육성하려는 적극적인 노력들도 뒷받침 되고 있다.
유럽은 전체 인구의 75%에 이르는 6억1천600만 명이 인터넷을 이용하고 있으며, 영국과 프랑스, 독일의 스마트폰 보급률은 60%에 달한다.
특히 빅데이터, AI, 클라우드, 전자상거래, 온라인 결제 분야에 강점을 갖추고 있다.
영국 벤처캐피털 아토미코(Atomico)는 지난해 유럽 기술 스타트업들에 대한 투자가 136억 달러에 이를 것이며, 올해 유럽 하이테크 분야의 인수합병 규모도 총 88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유럽은 북미 지역과 더불어 글로벌 스타트업 인수합병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
구글이 인수한 딥마인드를 비롯해, 마이크로소프트가 인수한 스카이프, 글로벌 라이브 스트리밍 업체 스포티파이, 텐센트가 77억 달러에 인수한 슈퍼셀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해진 전 의장, 네이버 유럽 진출 출사표 던지다
“사업은 노력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하늘이 도와줘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북미나 유럽에 도전하려고 하면 시간이 앞으로 또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누군가는 가야 후배들에게 또 의미있는 디딤돌이 될 것 아니겠습니까. 비록 성공을 하지 못하더라도 말입니다.”
이해진 네이버 전 의장이 지난해 7월 기자 간담회 때 한 말이다.
이 전 의장은 라인의 성공을 “기적적인 일”이라고 겸손히 표현하면서도,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유럽 시장 진출을 공식적으로 알렸다. 유럽 진출에 대한 출사표는 네이버의 방대한 데이터가 저장돼 있는 춘천 데이터센터 ‘각’에서 이뤄져 의미를 더했다.
그후 지난해 8월 라인이 뉴욕과 도쿄 증시에 동시 상장되던 날, 이해진 전 의장은 기술력을 가진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겠다는 계획과 함께 유럽 등 해외 시장 공략에 대한 의지를 재차 강조했다.
이 전 의장은 올 3월 주주총회를 끝으로 의장직도 내려놓기로 하고 일본 시장을 개척했던 것처럼 유럽 공략에 앞장섰다.
이 같은 이해진 전 의장의 유럽 진출 계획은 단순한 포부로 끝나지 않았다. 빠르게 실행 단계에 들어갔다.
■ 유럽 기술 회사 투자·AI 연구소 인수·스타트업 양성까지
지난해 9월 네이버는 플뢰르 펠르랭 전 프랑스 디지털경제 장관과 유럽 금융전문가 앙투안 드레위가 설립한 코렐리아 캐피탈의 유럽 투자 펀드 ‘K-펀드 1'에 첫 출자 기업으로 참여했다. 규모는 라인과 네이버가 각각 5천만 유로씩, 총 1억 유로를 출자했다.
코렐리아 캐피탈은 유럽에서 경쟁력을 갖춘 강력한 스타트업을 육성하겠다는 목표로 세워졌다. 네이버와 라인을 EU 시장 투자 펀드에 영입한 것에 대해 회사는 당시 유럽 IT 업계에 새 흐름을 만들어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내놨다.
네이버와 라인은 펀드 참여를 통해 기술 및 사업 분야에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기업을 발굴하고, 유럽 시장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그 후 네이버는 코렐리아 캐피탈과 함께 프랑스 기술스타트업 드비알레에 전략적 투자를 단행했다. 드비알레는 프랑스 하이엔드 음향 기술 스타트업으로, 홈오디오 시장을 넘어 TV와 자동차 등의 분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해 나가던 프랑스 대표 혁신 IT 기업으로 손꼽힌다.
네이버의 유럽 공략은 단순한 투자 수준에만 머물지 않았다. 유럽 등에서 활동하는 유망한 스타트업들과 협력을 꾀하고, 역량있는 인재들을 직접 발굴하기 위한 행보에도 적극 뛰어들었다.
네이버와 라인은 지난 6월 세계 최대 스타트업 인큐베이터 공간인 ‘스테이션F’에 80석 규모로 스타트업 육성 공간 ‘스페이스 그린’ 오픈 소식을 전했다.
스테이션F는 3만4천㎡ 규모의 캠퍼스로, 페이스북과 젠데스크(고객관리 솔루션), 방트 프리베(인터넷 쇼핑)와 같은 글로벌 기업이 스타트업 대상으로 육성 프로그램을 제공 중이다.
네이버와 라인은 스페이스 그린을 통해 유럽의 역량 있는 스타트업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 등 다양한 국가의 스타트업들을 입주시켜 협력자이자 지원 역할을 한다는 계획이다. 또 이들에게 기술을 공유하고, 컨퍼런스 등 다양한 부대행사를 통해 기술교류도 활발히 진행해 끈끈한 파트너십도 구축한다는 방침이다.
같은 달 네이버는 또 한 번 깜짝 발표를 했다.
미국 제록스 사로부터 프랑스 그르노블에 위치한 제록스리서치센터유럽(이하 XRCE)을 인수하고, AI 등 미래 기술 분야 연구를 확대한다고 알린 것이다.
1993년 설립된 XRCE는 미국의 실리콘밸리를 연상케 하는 첨단기술연구센터다. 주로 AI, 머신러닝, 컴퓨터비전, 자연어 처리 같은 미래 기술 분야를 연구 중이다.
네이버는 미래기술 연구 방향에 있어 XRCE와 같은 길을 걷고 있어 향후 연구 개발에 있어 상호 연계와 시너지 효과가 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기술연구전문 자회사 네이버랩스와 AI, 자율주행, 머신러닝, 컴퓨터 비전 등 연구 성과를 공유하고 더 나은 결과물을 창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네이버는 XRCE 인수 이후 명칭을 ‘네이버랩스 유럽’으로 변경하고, 네이버랩스와 ‘생활환경지능’에 대한 공동 연구를 진행 중이다. 연구소에 있던 80명의 인력은 그대로 남아 네이버랩스 유럽을 세계적인 AI 연구소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XRCE 인수로 네이버는 단숨에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컴퓨터 비전 컨퍼런스에서 5편의 AI 관련 논문을 발표하는 영예까지 안았다.
네이버가 논문을 발표한 ‘컴퓨터 비전 및 패턴인식’ 컨퍼런스인 CVPR은 기술 단체인 IEEE와 CVF가 1983년부터 공동 주최하는 컨퍼런스다. 매년 새 기술 연구에 대한 수준 높은 논문들이 발표되는데, 올해로 30번째 맞은 컨퍼런스에서는 총 2천680편의 논문이 접수됐고, 이 중 29%인 783편의 논문이 통과됐다.
이 중 네이버는 총 5편의 논문이 통과돼 발표해는데, 이 중 4편은 네이버랩스 유럽의 연구 성과다. 특히 2편의 논문은 CVPR 상위 8% 이내에 선정, ‘스포트라이트 세션’에서 별도 발표돼 세계에서 모인 각국 AI 전문가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 어렵지만 가야할 길 가는 네이버
누구도 확신할 수는 없지만 네이버가 미래의 깃발을 꽂은 프랑스, 유럽은 여러모로 성공의 기회가 아직 열려있는 지역이다.
많은 기업들이 가까운 중국과 일본, 다수의 글로벌 기업이 탄생한 북미 시장 진출을 꿈꾸느라 거리도 멀고 상대적으로 생소한 유럽을 등한시 했지만, ‘기회의 땅’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삼성, 현대차와 같은 대기업들이 유럽에서 한국 기업에 대한 인지도를 높였고, 미국 중심의 공룡 기업에 대한 거부감도 커 이를 대체할 수 있는 한국의 기업과 기술에 상대적으로 관대할 수 있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공통된 얘기다.
특히 삼성 스마트폰이 한국 기술력에 대한 인식을 상당히 높인 점도 네이버의 유럽 진출에 있어 유리한 면이다. 라인의 성공도 좋은 레퍼런스가 된다.
국내 유망한 기업들의 독일 진출을 도와주는 독일 NRW 한국대표부의 김소연 대표는 올 초 지디넷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지금이야말로 국내 기업들이 유럽에 투자하고 진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면서 “지금 투자하지 않으면 영원히 못 들어간다”고 말했다.
독일 등 유럽 시장의 특성상 진입장벽은 높지만, 경쟁의 공정성이 작동하는 나라가 바로 유럽이기 때문에 높은 품질과 기술력으로 지금부터 미리 문을 두드려야 길이 열린다고 강조했다. 한국 기업과 기술에 대한 호감도와 인지도, 가성비에 대한 평가 역시 중국이나 일본 대비 긍정적이란 평가였다.
다시 이해진 전의장이 기자 간담회 때 말한 유럽 출사표를 곱씹어 보면 네이버가 어려운 길을 선택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많은 이들이 단시한적 관점에서 빠른 성공을 바라지만, 네이버가 라인으로 일본 시장을 뚫기까지 걸린 시간도 약 10년의 시간과 수없는 시행착오가 발생했다.
이해진 전 의장도 이를 잘 알고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가야 의미있는 디딤돌이 될 것 아니겠나”라는 말을 한 것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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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네이버가 일본에서 포털 서비스를 실패하고 7전8기로 라인을 성공시킨 때와 달리, 네이버는 미국과 일본 증권 시장에 상장한 물적 토대와, 글로벌 메신저라는 수식어까지 얻은 라인이 뒷받침 하고 있다.
튼튼한 자본력과 기술력, 든든한 파트너들이 세계 도처에 있다는 점이 네이버의 유럽에서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으로 손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