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게이트’와 ‘창조경제’의 몰락

[이균성 칼럼]대통령이 할 일은 더이상 없다

방송/통신입력 :2016/11/09 13:32    수정: 2016/11/10 14:23

대통령이 ‘창조경제’를 말할 때 많은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지어 관련부처의 고위 관료들마저 그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기술혁신과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만들어가자’는 취지 쯤 될 것으로 누구나 짐작했을 터인데도, 고개를 끄떡거리는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그 방향이 틀리지 않으나, 동의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점에서 희한한 일이었다.

기술 기업들이 모여 있는 IT 업계에서는 특히 쌍수를 들어 환영해야 할 정책이었다. 창조경제가 실제로 잘 구현될 경우 혜택을 볼 수 있는 업종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명박 정부 시절 건설 중심의 ‘삽질경제’ 탓에 찬바람만 몰아쳤던 IT 업계로서는 더 반가운 일이어야 했다. 그런데도 4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지만 이 정책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야기하는 IT 업계 전문가를 만났던 기억이 없다.

전문가들은 헛된 구호에 휘둘리지 않을 만큼 현실을 통찰(洞察)하고 있었던 것이다. ‘창조경제’가 대통령의 순수한 정책 의지라 한들 이 정부에서 그게 제대로 구현될 리 만무하다는 걸 전문가들은 대부분 다 직감했다는 뜻이다. 정권이 바뀌면 ‘창조경제’가 국정조사 대상 1호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전문가들이 많았던 까닭도 같은 맥락이다. 그걸 확인하는 데는 정권이 바뀔 필요조차 없었다.

‘최순실 게이트’는 ‘창조경제’라는 게 결국 사욕에 눈 먼 이리떼들의 먹잇감에 불과했다는 걸 낱낱이 입증해주고 있다. 그 이리떼의 진짜 두목이 누구인지를 비롯해 ‘최순실 게이트’의 총체적 진실을 밝히는 것은 검찰의 몫이다. 하지만 이 불행한 결과가 온전히 대통령의 전근대적인 통치 스타일에서 비롯됐다는 걸 부인하는 사람은 별로 없겠다. 시민들의 ‘하야 촛불’이 드높은 까닭도 거기에 있다.

케이블TV 2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

이원종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최순실이 대통령 연설문까지 고쳤다는 의혹이 불거지자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더 험악한 일들도 벌어졌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죽어간 열사들의 피와 시민의 항쟁으로 쟁취한 민주공화국이 순식간에 봉건시대 이전으로 퇴보해버린 셈이다. 봉건시대도 아니라면 대체 어디까지 퇴보한 것인가. 고대시대의 신정(神政)?

대통령 주변에 유독 신기(神氣)가 많이 감돈다는 점이 수상하다. 하필이면 국정 최고 과제가 ‘창조경제’이고 창조(創造)의 뜻이 두 개라는 점도 이채롭다. 인간의 영역에서 창조는 ‘전에 없던 것을 처음으로 만든다’는 의미다. 신의 영역에서 창조는 ‘우주 만물을 만든다’는 뜻이다. ‘창조경제’는 당연히 전자(前者)의 의미였어야 한다. 그런데 이 정부에게 그것은 후자의 색채가 더 강했던 것 같다.

인간의 창조는 자유로운 상상과 토론에서 비롯된다. 신의 창조는 인간에게 불가침의 영역이다. 대통령이 쓰던 창조의 의미가 후자라고 보는 건 그가 자유로운 상상과 토론에 심한 알레르기를 보여 왔기 때문이다. 그의 특기는 상상과 토론이 아니다. ‘째려보기’다. 그가 마지막까지 챙겼던 우병우 전 민정수석도 ‘째려보기’의 진수를 보여줬다. 그 째려보기는 신권(神權)이 침해당할 때 발현된다.

‘최순실 게이트’는 이 정부가 토론을 통한 견제와 균형의 민주적 국정시스템이 아니라 ‘째려보기 神權’과 그에 아부하는 무리들이 전횡을 일삼는 ‘신정(神政)구조’로 운영돼왔다는 점을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다. 그들이 저지른 패악의 종점이 어디인지는 아직까지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진실한 IT 전문가들이 ‘창조경제’에 고개를 젓고 엮이지 않으려 했던 이유는 이런 결말을 다 예상했기 때문이다.

인류는 지금 ‘4차 산업혁명’의 쓰나미에 휩쓸리는 중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기술이 고도로 발전하고 생산력이 끝없이 높아지면서 경제 패러다임이 송두리째 바뀌고 있다. 자칫하면 승자가 모든 과실을 독식하고 기술이 인간의 노동을 배제하는 끔찍한 세상이 될 수도 있다. 아이폰이 세계 스마트폰 시장 이익 100% 이상을 가져가고 나머지 기업들은 대부분 적자에 허덕이는 세상이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취할 방법은 두 가지다. 기술 개발에 매진하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게 첫 번째다. 그와 함께 반드시 병행해야 할 것은 특정 집단의 독식을 막기 위해 민주적인 견제와 균형 장치를 튼튼히 하는 것이다. 첫째가 주로 민간의 영역이라면 둘째는 주로 정치와 정부의 영역이다. 이렇게 민주주의를 고도화해도 못자랄 판에 신권정치라니 논하기가 참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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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게이트’는 그러나 우리에게 기회일 수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두 가지 의제를 다시 진지하게 고민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걸 기회로 만들려면 ‘째려보기 신권정치’ 및 ‘박근혜式 창조경제’와 완벽하게 결별부터 해야 한다. 어정쩡하게 타협하거나 적당히 봉합하면 앞으로도 답이 없다. 4차 산업혁명의 위기를 모르더라도 촛불을 든 시민은 직감적으로 그 답을 아는 것이다.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