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쯔가 일본을 대표할 차세대 슈퍼컴퓨터 '포스트K컴퓨터(post-K computer)' 개발 방향을 크게 틀었다. 기존 고성능컴퓨팅(HPC) 프로세서 '스팍(Sparc)' 시리즈 후속 모델을 개발하는 대신 64비트 ARM 칩을 채택한 슈퍼컴퓨터 시스템을 만들기로 했다. 게다가 목표 성능은 스팍 칩을 쓰기로 했을 때의 10배 수준으로 잡았다.
주요 외신들은 후지쯔가 지난 20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제슈퍼컴퓨팅컨퍼런스(ISC) 현장에서 연산 성능 세계 5위의 'K컴퓨터'보다 100배 빠른 후속 슈퍼컴퓨터 시스템, 포스트K를 오는 2020년까지 개발한다는 계획을 제시했다고 보도했다. 후지쯔는 일본의 슈퍼컴퓨터 국책연구개발사업 담당기관인 이화학연구소 계산과학연구기구(理化?硏究所 計算科??究機構, RIKEN AICS)의 제조부문 파트너 기업이다.
현재 K컴퓨터의 성능은 10페타플롭스(PFLOPS), 즉 부동소수점 연산을 1초에 10경(京)회 수행할 수 있는 수준이다. 포스트K의 목표는 그 100배에 달하는 1천PFLOPS, 다시 말해 부동소수점 연산을 1초에 100경회 수행할 수 있는 수준이다. 이는 ISC의 최신 톱500 리스트에서 93PFLOPS를 기록해 슈퍼컴퓨터 성능 랭킹 1위를 차지한 중국의 '선웨이 타이후라이트'보다 10배 이상 빨라야 달성할 수 있다.
후지쯔는 이런 최신 포스트K 개발 계획이 담긴 공식발표 관련 자료를 별도 배포하진 않고 있지만, ISC 현장에선 그 야심찬 성능 목표보다 더 흥미로운 소식도 들렸다. 포스트K에서 64비트 ARMv8 코어와 호환되는 애플리케이션을 구동할 계획이라고 밝힌 것이다. 이는 2년전 초기 제시된 포스트K 개발 계획의 설계 방향이, 실제 구현 단계에 접어들면서 크게 바뀌었음을 시사한다.
IT미디어 더레지스터는 포스트K 시스템에 얼마나 많은 ARMv8 코어가 탑재될지와 ARM과 GPU기반 가속장치같은 다른 프로세서 아키텍처가 혼용될 것인지 여부 등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사안에 정통하다는 익명의 관계자 발언을 인용해 "ARM이 후지쯔의 미래 HPC CPU 아키텍처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참조링크: Fujitsu picks 64-bit ARM for Japan's monster 1,000-PFLOPS super]
일본 정부의 국책 연구자금을 받는 이화학연구소가 2년 전 공개한 계획을 보면, 당초 포스트K는 후지쯔가 지난 2014년 8월 선보인 최신형 '스팍64-11fx(Sparc64-XIfx)' 프로세서를 사용할 예정이었다. 포스트K의 선조격인 'K컴퓨터(K computer)'도 후지쯔와 이화학연구소가 손잡고 스팍 프로세서를 채택해 개발한 결과물이었다. [☞관련기사: 中이어 日도 100페타플롭스 슈퍼컴 도전]
K컴퓨터는 2011년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슈퍼컴퓨터'로 톱500 리스트에 처음 등재됐다. 5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에서 5번째로 빠르다. 2년전 일본은 그런 K컴퓨터의 스팍 칩보다 4배 이상 성능을 낸다는 신형 스팍 프로세서를 기반으로, 그 시스템 성능의 10배 수준인 100PFLOPS를 목표로 하는 포스트K 개발 계획을 그렸다. 왜 이제 와서 ARM 칩을 채택하기로 했을까.
IT미디어 이위크는 포스트K 설계 과정에 전력소비를 억제하면서도 대규모 시스템을 구동하기 위해 필요한 성능을 끌어올리기 위한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라 추정했다. 미래지향적인 슈퍼컴퓨터 개발 사업 방향엔 스팍과 인텔 x86 칩과 같은 여타 아키텍처 대비 전력당 성능 면에서 유리한 대안으로 ARM 아키텍처가 꼽혔으리란 지적이다. [☞참조링크: Fujitsu Chooses ARM Over SPARC for Its Next Supercomputer]
실제로 일본 이화학연구소는 슈퍼컴퓨터 시스템을 저전력으로 운영하는 기술에 관심이 많다. 연구소는 22일 공식사이트를 통해 이론상 최대 성능 2PFLOPS를 달성한 '쇼부(Shoubu)', 3평방미터 면적에 둘 수 있는 크기로 톱500 리스트 성능 475위에 등재된 '사츠키(Satsuki)', 2종의 시스템을 소개했다. 이는 연구소가 페지컴퓨팅(PEZY Computing)과 엑사스케일러(ExaScaler), 2개 회사와 소규모 저전력에 초점을 맞춰 공동 개발한 결과물이다. [☞참조링크: RIKEN is home to the world’s two greenest supercomputers]
이상한 얘긴 아니다. 데이터센터 인프라 시장에서도 저전력이 화두가 되면서 모바일 기기에 널리 쓰여 온 ARM 기반 시스템 도입이 고려되고 있는 건 사실이다. 32비트 ARM 칩만으로는 메모리의 제약으로 기업용 IT인프라에서 필요로하는 애플리케이션 구동 환경을 지원하는 데 제약이 많았지만, 최근 64비트 ARM 칩이 상용화하면서 이를 활용한 서버 시스템을 자체 개발하거나 제품화하려는 움직임이 늘고 있다.
소프트웨어 생태계가 충분치 않다는 점도 HPC 영역을 비롯한 기존 IT인프라 시장에 ARM 아키텍처의 진입 장벽으로 작용해 왔다. 이에 ARM 아키텍처를 라이선스하는 영국회사 ARM홀딩스가 2년전 엔비디아와 손잡고 HPC시스템용 CPU-GPU통합칩 출시를 예고했고, 작년말엔 HPC 애플리케이션 개발 라이브러리를 내놓는 등 극복 움직임을 보이는 중이다. [☞관련기사: ARM-엔비디아, 슈퍼컴퓨터 공략 위해 뭉쳤다] [☞관련기사: ARM, 수학·과학용 슈퍼컴 생태계 진입 시도]
이번 계획은 후지쯔의 기업용 데이터센터 시스템 사업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후지쯔는 그간 시장 주류인 인텔칩 기반 서버 시스템뿐아니라, 스팍 프로세서를 탑재한 상용 슈퍼컴퓨터와 데이터센터용 유닉스 서버 제품군도 개발, 공급해 왔다. 차세대 슈퍼컴퓨터 개발이 ARM 아키텍처 위주로 진행될 경우, 기존 후지쯔의 스팍 프로세서 기반 범용 서버와 상용 슈퍼컴퓨터 로드맵 방향도 지금과 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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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ARM 아키텍처의 영토확장을 견제하려는 인텔 입장에서 K컴퓨터의 후속 슈퍼컴퓨터에 ARM을 채택하겠다는 후지쯔와 일본 이화학연구소의 계획은 달갑지 않은 소식이다. 하지만 당장 곤란한 처지에 놓이는 건 인텔이 아니라 오라클 쪽이 될 수 있다. 오라클은 후지쯔와 스팍 아키텍처 기술개발 협약을 맺은 썬을 인수한 회사로, 스팍 로드맵 기반 데이터센터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제품 사업을 꾸리고 있다.
이위크는 "오라클은 썬을 인수 후 썬과 후지쯔간에 체결된 것과 유사한 내용으로 스팍 기술 개발 파트너십을 연장해 왔다"며, 포스트K에 ARM 아키텍처가 채택될 경우 후지쯔가 원래 거기에 적용하려고 개발해 온 스팍 프로세서의 개발이 근본적으로 중단될 수 있다"는 애널리스트의 관측을 인용해 전했다. 이는 데이터센터 시장에서 오라클의 스팍 칩 기반 서버 사업에도 부정적인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