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엔터프라이즈 하드웨어 시장을 말해주는 장면이라면 휴렛패커드(HP)와 시스코시스템즈의 충돌이다. 서버의 강자와 네트워크의 강자들이 상대방의 텃밭을 공략하는 장면은 IT업계에 불고 있는 ‘경계 허물기’를 보여준다.
시장의 경계가 허물어졌고, 영업현장의 경계도 무너졌다. 레드오션으로 뛰어들어 블루오션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신성장동력을 찾아내려는 업계의 전쟁이 본격화된 한해였다.
■HP vs, 시스코, 서로의 텃밭을 노린다
HP는 지난 6월 최신 데이터센터를 공개했다. 이 데이터센터는 시스코의 네트워크 장비를 단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다. 말그대로 ‘시스코 프리’였다.
HP는 올해 3월 쓰리콤 인수절차를 마무리하고, 제품라인업을 재정비했다. ‘서버-스토리지-네트워크’에 이르는 모든 하드웨어를 HP에서 제공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을 강조했다. 통합솔루션으로 고객에게 원스톱쇼핑을 제공한다는 HP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x86서버 사업에서 닦은 기반을 바탕으로 시장을 넓혀가겠다는 전략이었다. 스토리지업체인 3PAR도 인수해 줄기차게 라인업을 채웠다. 다음은 모든 인프라를 통합관리할 수 있는 SW업체다.
HP는 여기에 오픈 아키텍처를 내세웠다. HP 제품이 아닌 타사 제품을 사용해도 전체 IT인프라를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드웨어 자체가 아니라 최고의 솔루션을 판매하는 회사라는 점을 인지시켰다.
비슷한 시기에 시스코의 시선은 HP의 텃밭에 있었다. 서버, 스토리지 사업을 강화하고 IT인프라 전체를 노린 것이다. 지난해 출시한 유니파이드 컴퓨팅 시스템(UCS)으로 데이터센터 시장에 발을 들였다.
시스코 UCS는 네트워크 스위치, x86서버, 스토리지, 가상화 SW를 통합한 플랫폼이다. 파이버채널오버이더넷(FCoE) 등 I/O통합기술로 케이블링을 줄이고 메모리 용량을 늘린 것이 특징이다. 스토리지는 EMC, 넷앱 등과 협력해 채웠다. 가상화 솔루션은 VM웨어다.
네트워크 장비로 시스코가 안 쓰인 곳이 없다는 게 자신감의 근원이었다. 기존 고객 기반으로 영역 확대를 꾀한다는 전략이다. 순서만 반대일 뿐 HP의 구상과 동일하다. 차이가 있다면 비디오와 기업용 협업 솔루션을 보강하면서 네트워크란 장기를 살려간 것이다. SW는 자체개발과 사업제휴로 해결하는 모습이다.
시스코는 가상화와 클라우드를 보며 시장을 낙관적으로 전망한다. 가상화와 클라우드는 서버와 네트워크를 구분하기 어려운 만큼 UCS에 대한 시장의 이해도 높아진다는 것이다.
■거인의 통합솔루션을 향한 전력질주…승자는?
시장에서 격돌하는 회사들이 SW, 하드웨어 등에서 시작했던 회사들이 이제 한 곳에 모여 싸우기 시작했다. 산업군을 굳이 나누기 힘들 정도다. 통합솔루션을 외치는 기업들의 목표는 동일하다. 표현은 저마다 다르지만 구호는 ‘애플처럼’이다.
HP와 시스코는 IT업계를 주름잡았던 하드웨어 제조회사였다. 각자의 영역에서 왕국을 건설했던 그들이 비슷한 시기에 통합 솔루션 회사로 변신을 선언했다. 현재 시선은 각자의 텃밭이지만 결과적으론 IT산업 전체시장에서 격돌한다.
통합 솔루션 회사로 변신을 선언한 것은 시장변화와 맞물린다. 최고 성능의 단일 제품보다 하드웨어와 SW, 서비스까지 ‘최적화된 IT’ 전체를 요구하는 것으로 시장이 변했다.
HP와 시스코만이 아니다. IBM, 오라클, 델 등도 IT인프라 전체를 노린다. 글로벌 IT거인들이 올해 인수합병(M&A)에 투입한 금액만 1천억달러를 훌쩍 넘는다. 인수되는 기업들도 하드웨어, SW 포괄적이며 그 이름을 열거하면 80여개에 달한다.
하드웨어를 통합하는데 주력했던 회사들은 이제 하드웨어와 SW의 결합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오라클이 대표적으로 기존의 SW에 서버, 스토리지, 네트워크, 운영체제(OS), 가상화 등을 결합해 최적화하는 통합 시스템을 내놓은 것이다.
통합솔루션의 장점이라면 최적화다. 하드웨어, SW의 제조업체가 달라지면 어딘가 충돌을 빚을 수 있다. 성능을 극대화하는 데도 시간과 노력이 더 요구된다. 때문에 애플의 아이폰처럼 단말기와 OS를 한 곳에서 만들면 최적의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인식이 퍼졌다.
이에 더해 제품을 단순히 공급하는 사업에서 벗어나 관리, 유지보수, 온디멘드 등 꾸준한 매출도 기대할 수 있다. IBM이 이미 이같은 변신으로 성공사례를 만들어냈기에 그 효과는 입증된 셈이다.
누가 향후 10년을 주도할 것인가는 아직 확실치 않다. 업계 전문가는 “IT기업의 M&A 성공여부는 인수한 회사들과 솔루션을 얼마나 매끄럽게 융합하느냐에 달렸다”라며 “그 틈새 속에서 각 기업들의 경쟁력이 도출될 수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