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훈]진화를 보며 IT컨설팅을 생각하다

일반입력 :2009/11/13 11:31

김용훈 투이컨설팅 수석컨설턴트 anew@2e.co.kr

2009년은 인류사에, 과학사에 매우 뜻 깊은 해이다. 바로 다윈 탄생 200주년이자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이 되는 해인 것이다. 돌이켜 보자면 인류역사 상 진화론만큼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인류의 의식세계를 변화시킨 사상도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진화’라는 말을 익숙하게 사용한다. 익숙하다 함은 매번 문제 의식을 가지고 곱씹어 고민해보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진화생물학의 태두인 스티븐 J. 굴드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 익숙한 범용에 무언가 큰 문제가 있다는 위화감을 느끼게 된다.

굴드는 “다윈 스스로도 <종의 기원>에서 ‘진화’라는 용어를 쓰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했다”고 강조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진화’란 터미널리지는 너무나 오인되기 쉬운, 악용되기도 쉬운 지극히 정치적인 어휘였기 때문이다. 굴드의 지적에 따르면 우리는 ‘진화를 진보나 발전으로 착각하는 오류’에 쉽사리 빠지곤 한다. 좀더 정확히 말해 진화를 학문적으로 배우지 않은 비전공자들 대부분은 진화의 올바른 정의를 모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진화는 진보가 아니다”란 다소 당혹스러운 논제는 이미 오랫동안 여러 영역을 넘나들며 지식세계를 흔들어놓은 굴드의 강력한 어퍼컷이다. EA 프로젝트에서도 공공연히 ‘진화 관리’란 말이 쓰인다. 그러나 이 말은 언뜻 발전되도록, 진보하도록, 더 세련되어지고 기능이 복잡해지도록 결과물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암시를 담고 있다. 최초의 명명자가 아무리 바른 관점으로 정의하였다 하더라도 진화관리란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이 마술 같은 암시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진화는 다양성의 확대일 뿐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면 실제 생명이 진화를 통해 어떤 일정한 방향의 흐름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 예를 들어 어류가 뭍으로 진출하기 위해 폐호흡을 하게 되고 그 결과 신체기관이 복잡하게 발달하고 기능성이 하이브리드해진다거나 인류의 뇌와 손이 발달하여 어마어마한 문명의 쾌거를 이루어낸 것 같은 일들이 사실은 단지 ‘우연의 결과’일 뿐이란 것이다.

모든 진보의 결과는 ‘적응하는 과정의 산물일 뿐’이지, 생명 스스로가 복잡화되려고 목적성을 지니거나 절대자로부터 미션을 부여 받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최초의 단세포 생물에서부터 진화의 정점에 섰다고 여겨지는 현존 인류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에 걸친 거대한 상승장의 주가 그래프 같은 생명 진보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고 여기에는 어떤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고 믿기에 이른다.

굴드는 이를 주정뱅이 모델을 통해 간단히 설명한다. 도저히 똑바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취한 주정뱅이가 집으로 가려는데 오른쪽은 술집 담벼락이고 왼쪽은 도랑이 놓여있다고 설정한다. 그러면 이 주정뱅이는 어떤 방향으로 갈짓자 걸음을 걷더라도 반드시 도랑에 빠지고야 만다. 생명의 진화 또한 최초의 출발이 오른쪽의 단순성의 벽면에서 출발해버렸기에 왼쪽의 복잡성의 도랑으로 자꾸만 향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란 지적이다.

진화론의 오해에는 창조론으로 대변되는 기독교적 배경이 자리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지적 설계론을 주장하는 움직임이 강한 미국에서는 2009년을 다윈 200주년이 아닌 링컨 200주년이라 강조하며 같은 해에 태어난 두 위인의 업적 중 전자는 단지 ‘사실의 발견’에 그칠 뿐이며 후자는 ‘불가능한 역사의 창출’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진화론이 오늘날처럼 본래 의미에서 멀어지게 된 까닭은 학문의 속화와 악용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진화론만큼 속화되기 쉽고 악용되기 쉬운 학문도 다시 없을 것이다. 진화론은 곰곰히 누구라도 고개가 끄덕여질 법한 우생학을 낳았고 우생학은 인종차별의 근거를 제시했다.

속화된 우생학은 나치에 의해 ‘저열한 유대인이란 유전자 수 백만 명을 박멸’하는 ‘합리적이며 과학적인’ 배경이 되었다(히틀러는 ‘인류에 해악이 될 유전자’를 말살하는 과정에서 머리카락과 금니 등 갖은 재화를 수탈하여 그 일부를 경매에 부쳐 헐값에 독일과 주변 피침국의 국민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전쟁 중 경제를 도울 뿐 아니라 대중을 이 끔찍한 만행의 공범자로 만드는 놀라운 악의 기술을 선보였다).

진화론의 속화는 그 본래 논의를 왜곡시키고 결국 등장 후 150년 흐른 지금 사람들의 인식 속에 진화를 진보나 개선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진화는 진보가 아닌 무엇이란 말인가? 굴드는 진화가 ‘종의 다양성의 확대일 뿐’이라고 정의한다. 생명 개체들이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온 오늘날의 생태시스템은 오로지 환경에의 적응에 의한 무목적적인 다양성의 증대 과정에서 생긴 결과들의 집합체일 뿐이란 것이다.

IT컨설팅도 진화한다

본질적 논의든 변질된 논의든 진화론은 인류의 과학적, 문화적, 사회적 영역으로 그 개념이 확장, 적용되어 왔다. 그리고 IT컨설팅 또한 진화라는 관점에서 산업과 서비스, 기업과 개인의 현재가 설명될 수 있다.

진화가 진보인양 인식되는 왜곡의 현실은 진화론에서와 마찬가지로 IT컨설팅 종(種, species) 주변에서 자주 목격된다. 수사와 기교, 딜리버러벌의 형식과 문장이 규정하는 결과물의 유무에 집중하여 그 기술과 표현이 정교해지고 복합화되고 잘 다듬어진 모습이 되어가는 진보야말로 IT컨설팅 종의 진화 목표인 양 받아들여지곤 한다.

그러나 사실은 IT컨설팅 또한 산업과 사회 생태계에서 적응하고 다양성이 확대되어간다는 점에서 본질적 진화의 논의에 어긋남이 없다.

우리 종의 생태 환경을 살펴보자. IT컨설팅 기업과 컨설턴트만이 적응하고 진화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고객과 경쟁자 또한 생태계의 한 종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IT 산업의 생태 환경은 경제와 정책 같은 더 큰 메조, 메가 환경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진화론의 논란은 늘 신의 계획과 토론이 아닌 교화의 영역인 종교의 문제로 귀결되기 쉬우나 IT컨설팅 생태환경을 통찰력 있게 목도하노라면 과연 이 진화에 어떤 목적성이나 의도가 사전 기획되어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갈라파고스의 고도(孤島)를 넘나들며 런던에서 희대의 사기꾼으로 조롱당하며 비루한 삶을 살던 다윈이 어째서 이 문제를 의도된 목적을 가진 진보가 아닌 무목적적 진화로 정의했는지 이해할 만하다 할 것이다.

현실의 IT컨설팅 기업과 컨설턴트는 철저히 생존을 위해 적응한다. 기린의 목 길이를 설명하는 아이디어처럼 IT컨설팅은 대상을 만들고 대상이 운영되도록 하며 활용될 것을 제안하고 그 과정이 관리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 다시금 경량화나 통합의 이슈로 새로운 테제를 몰고 간다. 이는 실제로 환경이 종을 지배하듯 종 또한 환경을 이용하는 철저한 ‘적응-진화’의 모습 그 자체에 다름이 아니다.

어느 시인이 말했듯 현실은 항상 잔혹한 것이다. IT컨설팅 종 또한 생존을 위해 못마땅한 타협을 하고 경쟁자를 물어뜯는다. 같은 생태계 내의 고객이란 종과 공생하는 듯하다가도 여차하면 서로에게 등을 돌리거나 책임을 전가할 태세마저 되어 있다. 게다가 종 내의 개체 단위에서 보자면 보다 처연하고 비장한 오늘의 역사가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인간만이 유독 다르다

그러나 다윈의 학설대로 생태계의 모든 진화 현상을 자연(nature, 의도가 담기지 않은 우연이란 의미에서)적이라고 보더라도 인간만이 유독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모든 생물이 천체의 움직임, 조석간만, 습온의 변화, 생육 여건에 따라 진화의 결과 – 마치 미리 정해진 섭리처럼 보이는- 대로만 움직인다. 야행성을 제외하고는 모든 동식물들이 일몰과 더불어 잠이 든다. 오직 인간만이 자연의 도도한 변화에 ‘특이한 적응’을 해 불을 피워 밤을 밝힌다. 그 어떤 지구의 생명들도 번식하고 결실하는 시기가 따로 정해져 있다.

다만 인간만이 임의로 짝을 짓고 매일 새로운 종의 일원을 탄생케 한다. 더욱이 그 어떤 생명 종도 일찍이 다른 종의 절멸을 가져올 만한 이기적 번식을 이룬 적이 없을 터인데 오로지 인간만이 오늘날 하루에도 수십 종의 생명을 지상에서 자취도 없이 사라지게 만드는 가공할 오만을 선보이고 있다.

이 영특한 번영과 (지구라는 행성과 다른 생물종에게는 잔혹한 일이기까지 한) 진화의 현실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다른 종들이 생존을 위해 ‘적응’하기 바쁠 때 인간 종만은 유별나게도 생존을 위해 ‘지혜로운 적응’을 해냈기 때문이다.

이 지혜로운 진화야말로 다른 종의 본능적 진화로부터 인간 종을 차이 있게 만드는 본질이며 제 아무리 무신론적, 유물론적 관념으로 건조하게 지구를 바라보고자 해도 논란이 남는 이유이기도 하다. 즉 인간 스스로가 진화에 ‘지혜롭게 의도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와 과학이 공증된 문서로 확인할 수 없는 신의 계획을 두고 갑론을박하는 이면에는 바로 이 같은 인간이란 독특한 종의 유전자가 내린 ‘이기적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지혜라는 간장은 지식이란 메주를 삭혀낸 결실이다. 지식이란 메주는 정보란 콩으로 빚어졌고 정보는 데이터란 토양 속에서 추수된 것이다. 오늘날 산업 생태계에서 기업과 기업의 IT는 생존하기 위해 지혜로운 진화를 꿈꾼다. 현실은 비록 본능적 적응에 급급하더라도 누구나 스스로가 지혜로워지길 원하고 그래야만 적으나마 개체의 장구함과 존엄의 획득이 가능하다고 절절히 인식하고 있다. 그런 욕심에 좋은 콩으로 메주를 빚기보다 서둘러 양산된 남의 지혜를 후불제로 구입하려고 들기도 한다.

결국 IT컨설팅 종이 인간의 경제, 산업 생태계에서 존엄을 잃지 않고 성장 번영하는 길 또한 전혀 다르지 않다. 이 종의 개체인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고객과 함께 지혜로워지는 길’이 바로 우리의 의도된 진화이며 IT컨설팅 종의 이기적 유전자가 내리는 절대적 명령이다.

그러나 공영이란 목적은 생태계 뿐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도 불가능에 가까우리만치 어려운 ‘균형의 극치’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 개체는 그 이상성에 쓴 입맛을 다시고 쉽사리 고개를 돌리게 된다. 하지만 가격과 범위 조정, 야근과 주말 특근 같은 이해관계의 절충이나 경쟁환경에서 비롯하는 어려움만으로는 설명이 충분치 않은 느낌이다.

IT컨설팅 종은 인간사회와 경제 생태계에서 산업의 생태계에서 IT 산업 생태계에서 보다 지혜롭게 진화해야 한다. 완전한 사회란 존재하지 않듯 궁극의 지혜 또한 최소한 ‘오늘의 실존’은 아니라고 본다면 진화의 종착이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의 우리 종이 정체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면 무슨 까닭일까?

새로운 진화를 꿈꾼다

과학은 그다지 정교하지 않고 논리학은 사실 완벽하지 않다. 오히려 과학이 스스로 “나는 허점투성이”라고 인정하고, 논리학이 “나는 실제로는 별 쓸모가 없다”라고 시인했을 때 순수한 의미에서 ‘발전’했던 듯하다.

놀랍게도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데에는 패러다임이란 것이 있어, 하나의 패러다임이 성립되면 그 패러다임의 지향과 귀결에 맞춰 실험과 관찰을 평가한다. 그리고 패러다임과 틀린 실험결과가 나오면 패러다임이 틀렸노라고 소리치지 않고 어이없게도 조용히 그 실험결과를 한 켠으로 제쳐두고 다시 패러다임에 맞을 새로운 실험을 기획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계몽적 이성이 지배한 이래로 세계의 과학이 행해온 묵시적 방식이다. 즉 어떤 관념과 철학 하나가 패러다임으로 추대되기도 어렵지만 일단 패러다임으로서의 지휘를 획득하면 어지간한 반론에는 끄떡도 않고 그 자리를 지킨다.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뉴튼이 그처럼 4세기를 지배했고 다윈도 1과 반 세기를 지배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물론 왜 이러한 시스템으로 수렴되어야만 하는지는 심리학적, 사회학적으로 분명한 해석이 가능하며 그 불완전함이 비웃음 받을만한 것이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 IT컨설팅 종 또한 우리 생존과 산업을 바라봄에 있어 놀랍도록 ‘과학적인’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다. IT컨설팅이야말로 여러 산업 생태계를 가로질러 놀랍고 창의로 가득한 패러다임을 양산해온 이 시대 최고의 과학적 기수가 아닐 수 없다. 때로는 거짓말이라는 비난의 목소리도 있지만 진화의 일면에서 보자면 지극히 자연스럽고 정당한 과정들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생태계의 패러다임은 우리가 생각하고 매력적으로 슬로건화하는 그 단위보다 더 큰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BPR과 BPM은 우리 현실에서 패러다임 시프트이지만 사실은 더 큰 동일 패러다임 속의 인자들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우리가 눈 앞의 패러다임과 그 당면한 입증에 매몰될수록 우리의 눈은 마이크로해지고 논리는 놀랍도록 정교해진다. 그리고 우리는 이 글의 맨 처음으로 돌아가 그 진보가 진화라고 오인하게 될 것이다.

냉정히 보아 이 생태계는 아직도 탠저블한 구축물만이 유의미하다는 패러다임, 오픈과 철수가 끝이란 패러다임, IT성과의 요체는 곧 성능일 것이란 패러다임 따위의 꽤 낡은 큰 패러다임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고객 종은 여러 프로젝트의 실험 결과 교훈을 얻지만 패러다임에 맞지 않으면 이내 그 교훈을 포기하고 새로운 의도된 실험을 기획한다.

IT컨설팅 종은 늘 기발한 네이밍 센스를 뽐내며 패러다임 시프트를 반복 주장하면서도 정작 이 생태계의 게임의 법칙에 본능적으로 적응해왔을 뿐이다. 즉 모든 종은 패러다임이란 개념을 진화의 마디가 아닌 수단으로 활용해온 것이다.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는 음모론자 멀더 요원의 말처럼 우리 진화의 진실은 사실 고객 저 너머에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담담한 눈길로 우리 자신과 고객 종을 포함하는 생태계의 변화를 관찰할 필요가 있다.

고객 종 또한 생존에 목마른 진화하는 한 종일 뿐이다.

“드릴이 필요하다”는 고객의 요구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컨설턴트 A는 고객 예산에 맞는 최적의 드릴을 시장조사하고 부서별로 하나씩 견적을 내어 제안하며 안전한 사용과 관리방법을 소개한다. 컨설턴트 B는 왜 드릴을 찾는 것일까 고민하다 사실 고객은 벽에 구멍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 드릴 자체를 원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내 전문기사가 저렴하고 재빠르게 구멍들을 시공하는 대안을 제시했다.

컨설턴트 C는 “그럼 구멍은 왜 필요한가”를 한번 더 살펴 진실로 고객의 고민은 사무실에 옷을 걸어둘 수 없어 불편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C는 사무실마다 싸구려 공용 행거 하나씩을 장만해주었다(물론 현실세계에서 A와 B는 C의 결론을 일찌감치 눈치채고 ‘현실적 생존 방법’을 선택한 것이란 설이 가장 설득력 있어 보인다).

우리의 생존 방법은 우리 자신에게도 또는 고객에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다 안전해지고 품위를 잃지 않으며 생존을 유지할 지혜로운 진화 방법은 고객조차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는 고객 저 너머를 탐색하는 데 있다.

월드컵 4강의 들뜬 열병이 채 가시지 않은 즈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아직도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지 무슨 희망으로 살 것인지는 여러 선택지를 둔 질문일 뿐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다시 WBC 4강의 희열이 온 몸을 감쌀 즈음 불현듯 나란 생명의 진화가 어느덧 한 기(期)의 정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직 어찌 적응하고 어찌 생존할지 어떻게 지혜를 구하고 어떻게 희망하는 진화를 추구할지 거의 모든 답란이 비워진 채로 나는 컨설턴트로 굳어진 이번 기 진화의 결말을 마주하게 되었다.

진정 이것이 내 진화의 일단락이라면 쉽게 적응하기 보다 새로운 진화를 꿈꾼다. 나를 둘러싼 생태 환경을 살펴 고객과 함께할 저 너머의 지혜로운 생존을 찾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