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미국시간) 그래픽 솔루션 및 하드웨어 전문업체인 엔비디아 주최로 미국 새너제이 컨퍼런스센터에서 열린 컴퓨팅기술포럼 '엔비전08' 현장.
그래픽 기술이 우리 생활 전반에 걸쳐 어떤 형태로 자리잡고 있으며 향후 어떤 역할을 맡게 될지 살펴볼 수 있는 사례들이 쏟아졌다. 그래픽카드 핵심코어인 GPU가 디지털 라이프를 보다 입체적으로 만들어줄 비주얼 컴퓨팅을 이끌고 있다는게 핵심 메시지였다. GPU는 더 이상 CPU의 종속변수가 아니라 독립변수 자격을 획득, 독자적인 생태계를 만들어나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3D로 ‘돈맥’을 잡아라
이번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주된 관심은 ‘3D’에 몰렸다. 지금까지 자주 노출됐던 3D게임과 영화에 대한 소개도 곁들여졌지만 산업분야에 3D를 어떻게 적용할수 있는지가 주로 다뤄졌다.
3D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리얼타임테크놀로지(RTT)의 피터 스티븐슨 최고운영책임자(COO)는 “컴퓨터로 자동차를 설계하는 작업은 이전부터 있었던 일이지만 색감이나 차의 재질에 따른 느낌 등 세밀한 표현에는 한계가 있었다”며 “3차원 그래픽이 제공되면서 소비자가 원하는 주문대로 차의 색상이나 인테리어 등을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행사에서 고급 스포츠카 '람보르기니' 실제 디자인을 현실감 넘치는 3차원 그래픽으로 표현해 청중들로부터 감탄사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피터 스티븐슨 COO는 이젠 자동차의 시제품을 직접 제작하던 비효율적인 과정은 거치지 않아도 될 만큼 그래픽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의료산업과 결합된 3D 기술도 눈길을 끌었다. 상당수 병원에 공급돼 있는 자기공명영상촬영(MRI)과 컴퓨터단층촬영(CT)과 같은 장비엔 이미 엔비디아 GPU칩이 공급돼 있다고 한다. 앤비디아는 의료 및 생명공학 분야는 개인용 시장보다 수익성이 월등한 만큼, 이 분야에 대한 투자를 계속 늘려나가고 있다.
엔비디아 관계자는 “평면TV를 통해 뇌 수술을 할 때, 특히 개봉수술이 아닐 경우에는 뇌의 측면까지 볼 수 없어 치료에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최근엔 3차원 영상이 지원되면서 수술 시간을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성공률도 높아졌다”고 강조했다.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도 3D의 영향권에 들어섰다. 3D를 통해 침체된 인터넷 광고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국내 업체인 누리엔 소프트웨어가 선봉에 나섰다.
행사 첫날 무대에 오른 김태훈 누리엔 소프트웨어 대표는 젠슨 황 엔비디아 CEO의 모습을 그대로 본 뜬 아바타를 등장시켜 눈길을 끌었다.
이 서비스엔 ‘피직스 물리엔진’이 적용됐는데 머리카락 움직임은 물론 옷자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 등을 생생하게 표현해 젠슨 황CEO로부터 “제발 그만해 달라. 보기 민망하다”는 농담 섞인 칭찬을 이끌어냈다.
김 대표는 “3D SNS는 자신의 공간에 TV나 소파 등 인테리어를 마음대로 설치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점들이 새로운 인터넷 광고시장으로써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사진에서만 봤던 대형스크린의 ‘멀터터치’ 기술도 인기였다.
'퍼셉티브 픽셀'이라는 벤처기업을 설립한 개발자 제프 한(한국명 한재식)은 여러 사용자의 다양한 손가락 동작을 인식하는 '멀티 터치' 기술을 이날 행사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로 선보였다.
섹시모델, 카레이서, 여성우주인…독특한 이력의 강연자
이번 행사에서 기조연설을 맡은 인사들의 경력도 참으로 독특했다.
최초의 여성 우주선 파일럿이자 지휘관이었던 아일린 콜린스씨를 비롯해, 북미 지역 인기 자동차경주대회인 나스카(NASCAR)에서 우승 깃발을 흔들었던 카일 부쉬, 지난 2007년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모델로 꼽혔으며 SF케이블 TV드라마에서 상종가를 달리고 있는 트리시아 헬퍼가 전세계 내로라하는 그래픽 전문가들과 대화를 나눴다.
이쯤되면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래픽 기술과 무관할듯한 이들을 보기 위해 1천달러에 가까운 참가비를 내가면서까지 이번 행사에 온 이유는?
알고보니 우주항공산업과 자동차설계 및 디자인, 헬스케어 등 다방면에 걸쳐 그래픽 기술은 물리적인 한계를 넘어 비용절감에 이르는 효과까지 톡톡히 누릴 수 있는 첨단 정보기술(IT), 로봇기술(RT)들의 보고였다.
872시간 우주비행기록을 가진 아일린 콜린스씨는 컨퍼런스가 이틀째를 맞은 날 기조연설을 위해 무대에 섰다.
그는 “우주선의 도킹작업과 착륙, 발사 직전의 상황 등을 실감나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훈련해 왔다”며 당시 활약상을 담은 영상과 컴퓨터 시뮬레이션 장면을 청중들에게 공개했다.
그는 “한치의 실수도 허락하지 않는 우주항공산업에선 엄청난 양의 연산을 빠르게 처리할 수 있어야 정확한 그래픽을 구현할 수 있다며 이때 GPU 성능과 쿠다(CUDA)와 같은 병렬 처리기술이 동원되면 원하는 영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콜린스에 이어 미 자동차 경주대회 나스카의 1등 카레이서 카일 부쉬이 바통을 넘겨받았다. 그는 자동차 내부와 똑같이 만들어진 자동차 시뮬레이션을 통해 훈련하는 모습을 직접 시연했는데 “트랙에서 진짜 자동차로 훈련하는 것과 큰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며 그래픽 기술 진화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적게는 수십억 원, 많게는 수천억원의 비용이 소모될 훈련 과정을 천분의 일, 혹은 백분의 일의 비용만으로도 동일한 성과를 일궈낼 수 있는 그래픽 기술의 ‘경제효과’. 엔비디아가 GPU로 또 하나의 디지털 혁명을 꿈꾸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세계 주요 흥행작중 그래픽 기술을 채용하지 않은 영화는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가 유일하다. 그만큼 영화시장에서 그래픽은 흥행에 필수적이다.
미국 TV드라마 시리즈 ‘배틀스타 갤럭티카’에서 미래로봇과 호흡을 맞춘 여배우 트리시아 헬퍼는 “3차원 가상 로봇을 제작할 때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나타내기 위해 배우가 바라보는 눈의 방향이나 손의 움직임 등을 먼저 잡아내고 그 방향에 맞도록 로봇의 행동을 그려낸다”며 작품으로 만난 미래로봇과의 열연은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그래픽 기술 덕에 가능했다고 극찬했다.
‘인텔은 아주 먼 미래와 과거만 찾는다’ 일축
엔비디아의 창업자겸 최고경영자(CEO)인 젠슨 황은 이번 행사에서 기자간담회도 가졌다. 간담회는 '라라비'를 앞세워 비주얼 컴퓨팅에 속도를 내기 시작한 '공룡' 인텔을 엔비디아가 어떻게 견제할 수 있겠느냐가 화두였다.
CPU와 GPU 진영간의 패권다툼으로 몰아가던 기자들의 질문에 젠슨 황은 “라라비는 아주 먼 미래의 얘기”라고 일축하며 “인텔이 우리에 대해서 지적하는 모든 내용 역시 아주 먼 옛날 얘기다”고 깍아내렸다.
그는 또 “인텔이 매년 개최하는 인텔개발자회의(IDF)는 단지 PC산업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주력하는 산업은 사회각층에 기여하고 있다. 그들(인텔)의 행사는 좀 작지만, 우리는 크지 않는가?라며 인텔과의 싸움에 자신감을 보였다.
엔비디아의 최고기술책임자인 데이비드 B. 컬크도 지디넷과의 인터뷰에서 “CPU 제조사들이 최근 그래픽 부문에 큰 관심을 가지고 투자를 하고 있는데 참 재미난 현상”이라며 젠슨 황을 거들고 나섰다.
젠슨 황은 기자회견에 앞서 스탠포드 대학에서 진행중인 질병 연구를 위한 '단백질 폴딩 시뮬레이션' 사례를 기조연설에서 소개했다.
그는 “그동안 GPU는 3D게임과 같은 컴퓨터 기술에 국한됐으나 이제는 CPU보다 훨씬 높은 성능을 내는 고속연산기술을 지원해 질병 연구와 같은 차세대 고성능 컴퓨팅(HPC) 분야에서도 밝은 미래를 보여준다며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슈퍼컴퓨터가 아닌 일반 PC들을 연결해 '유휴자원'을 활용한 결과로 비용과 시간을 혁신적으로 줄일 수 있어 더욱 가치 있었다”며 힘주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