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기업인 A씨는 대기업에 납품하면서 분통 터지는 경험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대기업 직원들이 접대나 리베이트를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건 기본이고 개인적 인 술자리 비용까지 떠맡기기가 일쑤다. 더욱이 신기술을 개발해 납품 의뢰를 했더니 대기업측이 아예 설계도면을 통째로 요구했다.또 가격 협상이 지지부진해지자 대기업이 이 설계도면을 경쟁업체에 넘겨버려 자기 기술을 놓고 경쟁사와 가격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제조원가 산출 내역을 가져간 뒤 관리비용 명목으로 5% 마진만 붙여 일방적으로 납품가격이라고 통보하는 것도 예사다. A사장은 "대기업 담당직원들의 접대 요구 정도는 참을 수 있지만 납품단가를 낮추면 승진 등의 인센티브까지 주는 사례도 있다”고 비판했다. B사 사장도 "대기업이 벤처들을 단순 하도급업체 취급하며 수익을 착취하고 납품 단가를 후려치는 풍토 아래서는 성장 한계를 느낀다”며 "암암리에 불공정 한 거래를 유지하면서 공개적으로는 중소ㆍ벤처기업을 배려한다는 `눈 가리고 아웅`식 태도에 분노를 느낀다”고 말했다. C사장은 "납품 기일을 일방적으로 통보하거나 기술 개발비 전액을 협력업체들 이 부담하도록 하는 대기업도 있다”며 "대기업이 부담해야 할 리스크마저 그 대로 중소기업들에 전가한다”고 밝혔다. 지난 8일 이헌재 경제부총리와 관계장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벤처기업 활 성화 간담회에서 한 기업 대표는 스스로를 "소작농 신세”라고 비하했다. 열심히 농사를 지어 제대로 수확을 낼 만하면 지주에게 농토까지 빼앗겨버리는 소작농 신세와 대기업의 횡포에 짓눌린 벤처기업의 현실이 영락없이 똑같다는 게 그의 한탄이었다. SK텔레콤 등 대형 이동통신사업자들과 콘텐츠 제공업체들과의 관계가 전형적인 예로 거론됐다. 우선 콘텐츠 개발 업체들은 연 매출액이 300억원이 넘는 회사가 없다. 수익이 날 만하면 이동통신업체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이용해 이익 배분 구조를 확 바꿔버리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벨소리 등 콘텐츠 내려받기(다운로드) 사업. 휴대폰 화면을 이용한 콘텐츠 내려받기 사업은 접속했을 때 초기화면 메뉴 1번으로 누가 올라가는가에 따라 매출이 배 이상 차이가 난다. 그는 "업체 기술이나 콘텐츠 질보다는 관계사 여부 또는 인위적인 로비에 의해 사업자가 결정되는 예가 많다”며 "괜찮은 아이템을 제안했을 때 그 제안서 자 체가 그대로 이동통신사 자회사에 넘어가는 사례도 있다”고 지적했다. 벤처업체가 다 만들어놓은 콘텐츠 서비스를 이동통신사 사업부서가 `개발비`란 명목으로 몇 푼 던져주면서 그대로 먹어버리는 사례도 있다고 그는 털어놓았다 . 또 다른 콘텐츠업체 대표는 "이동통신 가입자들이 한 쪽으로 쏠리는 현상이 심 화되면서 횡포는 갈수록 심해진다”며 "이동통신 3사가 시장점유율이 엇비슷하면 상호 경쟁 때문이라도 협력업체들에 장난질을 치지 못할텐데 갈수록 안하무인”이라고 지적했다. 무선통신 단말기를 납품하는 업체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지난 6월 시중에 중소벤처기업이 만든 60만원짜리 PDA폰이 인터넷상에서 원가 의 4분의 1밖에 안되는 개당 15만원대 가격으로 대량 유통된 적이 있다. 이동통신회사 관계자의 약속만 믿고 2003년 초 PDA폰을 대량 생산했다가 대기업이 구매 약속을 지키지 않자 창고에 쌓아놓은 30만대가량의 PDA폰 가운데 절반을 방출했기 때문이다.회사 관계자는 "처음에 우선 2만대 정도를 생산하겠다고 담당자에게 얘기했다가 생산능력이 그것밖에 안되느냐는 핀잔을 듣고 위험을 무릅썼다가 회사가 자칫 망할 뻔했다”며 "처음엔 손해배상 청구도 고려했지만 장사를 한번 하고 말 게 아니어서 포기했다”고 밝혔다.벤처활성화 간담회에 참석한 다른 벤처기업 대표들도 대기업이나 공공기관과 거래할 때 불공정거래 계약을 맺는 사례가 많아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장흥순 벤처기업협회 회장은 "대기업들은 사상 최대 이익을 내는 와중에서도 여기에 납품하는 벤처기업들은 적자에 허덕이는 까닭이 불공정거래 관행 때문”이라며 "이같은 불평등 구조에선 전략적인 기술을 가진 전문 벤처가 태어나고 자라날 수 없다”고 밝혔다.이날 간담회에 참석한 김석동 재경부 금융정책국장은 "불공정거래 관련 사항은 이날 참석한 벤처기업 대표들이 대부분 얘기했다”며 "이헌재 부총리나 이희범 산자부 장관 등도 이러한 관행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데 대해 놀라움을 표시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한편 중소기업특별위원회와 중소기업청은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불공정 관행을 사례별로 모아 자료집을 만든 뒤 정부 차원에서 개별ㆍ건별로 시정대책을 만들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