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대규 사장은 학창 시절 모범생이었다. 1970년대 대구 영남고에 다닐 때 늘 반장이었다. 그는 "뭐든지 빨리 배우는 편"이라고 말했다. 당시에는 주산학원이 유행이었는데 선수반에 들 정도였다. 끈질긴 성격에 따분한 일에도 싫증내지 않고 오래 참는 게 그의 장점이었다. 그래서 막연히 공부 열심히 해서 교수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가난했다. 서울대 공대(제어계측공학과) 박사 과정 때 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 박사 과정 초기에 교수의 꿈을 접었다. 지도교수 역시 "박사라 해서 교수가 돼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라. HP 같은 회사를 만들어보라"고 권유했다. 그리고 박사 과정을 마치던 89년 친구.후배들과 함께 서울대 부근에 조그만 회사를 차렸다.같은 위기는 반복되지 않는다, 늘 새로운 위기가 기다린다.회사 설립 후 "디지털기기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예측한 변 사장은 드디어 96년 9월 유럽 규격에 맞는 디지털위성방송 수신기(셋톱박스) 개발에 성공했다. 아시아 최초였다. 그리고 다음달 셋톱박스를 실은 배가 이탈리아와 남아프리카공화국 시장을 겨냥하고 부산항을 떠나가는데….첫 수출이라 흥분을 감추지 못했지만 이것이 고난의 시작이 될 줄은 변 사장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다. 품질에 문제가 생기면서 리콜이 쏟아진 것이다. 수출된 제품의 무려 절반에서 품질불량 문제가 생겼다. "그저 많이 팔겠다는 욕심이 앞섰습니다. 기본 역량도 모자란 상태에서 말이죠.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97년은 한해 내내 팔았던 물건이 돌아오는 시기였다. 불량제품 모두를 가져와 수리하기도 하고 폐기하기도 했지만 타격은 엄청났다. 위기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주된 수출목표로 했던 유럽의 한 방송사업자가 97년 다른 유럽 대형방송사에 합병돼 버렸다. 갑자기 시장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97년 5월 영국 벨파스트에 갔다. 그는 시차로 인해 허름한 호텔방에서 새벽에 잠이 깨버렸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며 메모지를 꺼내 문제점을 차근차근 적어보았다. '품질불량, 수출량의 반이 돌아오면… 50억원이 날라가고… 코스닥 주가는 바닥인데, 이거 이러다 가는 거 아닌가. 왜 나는 낙관적이었을까. 스스로 최면을 걸은 건 아닐까.'간신히 리콜 문제를 수습하던 중 더 큰 문제가 터졌다. 여전히 셋톱박스 수출로 한푼의 매출도 못 올리고 있는 상태에서 97년 10월 거래업체인 해태전자가 부도 났다. 대기업이라 담보 하나 없이 거래한 24억원이 순식간에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끈질기게 그 회사를 찾아가 조금씩 자금을 회수하면서 버티는,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계속됐다. 그러나 나쁜 일은 겹쳤다. 외환위기가 닥친 것이다. 휴맥스의 부도는 초읽기에 들어갔다. 은행에서는 빚 독촉이 이어졌다.다행히 희망적인 소식이 날아들었다. 영국 북아일랜드 산업개발청이 600평 규모의 공장을 지어 놓고 2년 무상 임대를 제시한 것이다. 리콜 제품을 워낙 많이 고치다 보니 기술력도 늘었다. 창고에 수북이 쌓여 있는 재고 부품 덕에 오히려 부품을 새로 발주하지 않고도 신제품을 만들어 낼수 있었다. 성격대로 끈질기게 버텼다. 마침내 유럽 시장에서 조금씩 물건이 팔리기 시작했다. 품질이 우수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위기는 조금씩 비껴가고 있었다.큰 도전이 큰 결과를 만들어 낸다."요즘 세태를 보면 힘든 일은 잘 안하려 합니다. 진로 선택도 영악하게 하기 일쑤죠. 자꾸 쉬운 일에만 도전하려는 습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길을 가는 만큼 큰 결과가 나옵니다."변 사장은 리콜이 쏟아진 뒤에도 제품수출 방식을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에서 탈피, 과감히 휴맥스 브랜드로 바꾸는 모험을 단행했다. 목표 시장도 방송국에서 일반 유통시장으로 바꿨다. 인지도도 없는 회사가 방송국이라는 안정적이고 정해진 시장에 안주하지 않고, 일반 시장에 제품을 내놓는 것은 큰 도박이었다. 그러나 큰 도전을 한 끝에 큰 결과를 만들어냈다. 지금의 휴맥스는 초창기 때보다 무려 30배가량 성장했다. 변 사장은 일이 잘 풀릴 때 배울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위험을 넘어도 또 다시 포기하고 싶은 위기가 반드시 올 것이라고 예상한다. 정말 재수좋게 그냥 넘어가는 일은 거의 없다고 본다. 그 자신이 저절로 굴러들어온 운을 잡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변 사장은 요즘도 새로운 위기에 직면해 있다. 여전히 성장을 유지하고 이익도 많이 내고 있지만 2002년부터 이익률과 성장률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다(지난해 매출액 3637억원). 그래서 변 사장은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있다. 디지털TV와 홈미디어 서버 관련사업 진출이다. 마침 세상은 디지털과 홈네트워크 붐이다. 그는 "'산을 오르는 게 힘들까'생각하지 말고 '어떤 큰 산을 오를까'고민해야 한다. 큰 도전은 사람들을 크게 성장시키고 나중에 오래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야기들을 남긴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