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정말 빠르다. MS가 창업된 지도 거의 30년이 되어 간다. 필자는 가끔 MS의 초기 광고를 보면서 그 당시의 MS는 한국 시장에 MS-DOS가 아니라 MS-베이직과 MS-FORTRAN 그리고 COBOL을 팔려고 했던 회사였다는 것으로 기억한다. MS의 첫 출발은 자신들이 만든 베이직으로 시작됐다.초기에는 MS 자체의 운영체제라는 것은 없었으며 본격적인 운영체제를 구현할만한 컴퓨터도 없었다. 그러나 MS는 퍼스널 컴퓨터, 개인들이 사용하는 작은 컴퓨터에 관심이 있었으며 사람들은 미약한 성능이지만 자신의 컴퓨터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에 열광했다.컴퓨터의 역사에서 퍼스널 컴퓨터는 초기부터 대형이나 중형 컴퓨터들의 전통과 유산을 이어받으려 한 것이 아니라 독단적인 길을 걸어 왔다. 과거의 대형기기들이 커다란 회사나 연구용으로 팔리던 것에 비하면 사람들은 무언가 다른 것들을 찾고 있었고 자신의 비즈니스에 컴퓨터를 써 보면 어떨까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컴퓨터를 구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그 이전에 원보드 형태의 컴퓨터라는 기계광들을 위한 기종도 있었으나 그것은 오로지 간단한 프로그래밍을 위한 컴퓨터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낮은 생산성을 가졌다. 하지만 초기의 원보드들이 나오자마자 빠른 시간 내에 수없이 다양한 변종들이 꼬리를 물고 나타났으며, 곧 모니터와 키보드를 내장하게 되었다.1970년대 ‘젊은이들의 시대’MS나 다른 중요한 회사들이 1970년대 초반에 창업되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미국의 문화코드는 1970년대에 이루어졌다고 말할 만큼 당시의 미국 사회는 2차 대전 후 베이비붐으로 태어난 젊은이들과 이민을 온 사람들로 채워지기 시작했고, 1960년대 말부터는 이들의 젊은 피가 사회문화를 주도했다. 1970년대는 젊은이들에 의한 문화가 그 이전과 그 이후를 확연하게 갈라놓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은 당시 질식할 것만 같은 사회 분위기에서 무엇인가를 만들기 시작했고 이들의 문화 판짜기가 바로 오늘날의 미국의 문화코드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950년대와 60년대 초반 빌 게이츠 이전에 미국에서 가장 돈이 많았던 사람 중 하나인 석유왕 폴 게티는 월간지 플레이보이에 자신의 컬럼을 연재하면서 당시의 갑갑한 미국 사회를 비판했다. 그 당시 플레이보이라는 잡지는 그 시대의 기준으론 선정적이고 도발적인 사진들과 함께 수준 높은 컬럼이나 글들을 많이 게재했었다. 컬럼에서 게티가 주장하기를 건강한 사회라는 것은 건전한 비판자, 하다못해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더라도 반항적이고 주관적이며 비판적인 사람들이 많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미국에서는 그 많던 비판자들이 1930년대와 40년대를 거치면서 탄압되고 실종되어 버렸던 것이다. 게티에 의하면 남들과 똑같은 판에 박힌 삶은 안정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사회는 변하며 결국 이러한 모방적인 삶의 방식은 안정적인 것이 아니다라는 내용이 그 요지였다.폴 게티 자신은 당시의 기준에서 볼 때 이단적인 삶을 살았다. 게티 자신이 석유발굴 현장에 잡역부 겸 감독으로 뛰어들면서 옥스퍼드를 나온 엘리트의 길을 포기하고 당시로서는 벤처업계인 석유 산업이라는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간 사람이었다. 석유 산업은 게티의 생전에 이미 초기의 구멍가게 수준의 도박적인 굴착 사업에서 거대 산업으로 변했다. 게티는 성공적인 길은 남들과 같은 옷차림으로 길을 걷고는 저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길을 걷고 행동하는 사람들 속에 있다는 것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따라서 게티는 ‘달라져라’라는 말을 되풀이하곤 했다. 요즘은 ‘달라져라’라는 말 자체가 상업적인 의미와 함께 희미하게 진부한 표현이 되고 말았으나 정작 주관적으로 남과 다르게 사는 사람은 지금도 많지 않을 것이다.스티븐 레비의 유명한 책 『해커 그 광기와 비밀의 기록』을 읽다보면 제1부에는 컴퓨터 문화에 빠져들기 시작하는 해커들의 이야기가 나오며 이들의 이야기가 끝나갈 때쯤부터 사회가 어수선해지기 시작하는 대목들이 등장한다. 그때가 바로 새로운 문화코드의 출발을 알리는 시기였다. 제2부에는 하드웨어 해커들이 등장하는데 바로 이들이 그 새로운 세대이며 PC 혁명을 주도했다. 이들 중 몇 명은 지금도 활동 중이다. 이를테면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들은 PC 혁명이 시작된 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각종 언론자료에 나타나 혁명은 계속된다고 외치곤 한다. 얼마 전 뉴스위크에는 ‘PC 시대는 끝났는가’라는 글이 표제로 등장했는데 그 글은 공교롭게도 스티븐 레비가 작성한 것으로 전반부는 PC 산업의 성장이 둔해지는 이유와 사례들이, 후반부에는 레비가 빌 게이츠를 인터뷰하는 내용이 있었다.8비트 시대, MS 베이직인텔에서조차 시장성을 예측하지 못한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컴퓨터 회사가 아니라 군수업체나 산업계로 팔려 나갔고 이들 중 일부 재고들이 실리콘 밸리의 전자광들을 자극하면서 퍼스널 컴퓨터의 역사가 거의 아무런 기반도 없는 상태로부터 시작됐다. 인텔은 1974년 8비트 범용 컴퓨터인 8080을 출시했는데 사실상 8080은 사용하기 어려운 칩이었으나 그래도 범용 컴퓨터로 사용할 수는 있는 칩이었다.이 칩은 74년 1월 ‘엘렉트로닉스’에 발표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그 해에 MITS라는 회사가 돌아다니는 재고를 이용하여 알테어(altair - 알테어는 스타트랙에 나오는 행선지 별 이름이라고 한다)라는 이름의 조립키트로 만들었다. 이 컴퓨터가 파퓰러 엘렉트로닉스라는 잡지에 실리자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거의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수준의 알테어를 사고 싶어 했다. 조립은 사용자가 해야 했다. 이 키트를 만든 MITS는 공급이 수요를 감당하지 못했다. 키보드가 아닌 2진 스위치 몇 개와 LED 몇 개가 인터페이스의 전부였으며 MITS가 물건을 아무리 늦게 배달하여도 사람들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그 당시에 이미 8080 이전의 8008 같은 컴퓨터로 무언가를 해보려고 골똘히 생각하던 폴 앨런과 빌 게이츠는 8080이 나오자 이제 제대로 작동할 수 있으며 커다란 잠재력을 가진 작은 컴퓨터가 나왔다는 것을 직감했다고 한다. 1974년 엘렉트로닉스 잡지를 보던 두 사람은 이 칩이 만들어 줄 수 있는 가능성을 얘기해 가며 1년 동안 만져보지도 않은 이 칩에 대해 궁리했고 인텔 칩에 사용할 수 있는 BASIC(Beginner’s All-Purpose Symbolic Instruction Code : 1963년 다트마우스 대학의 John George Kemeny와 Tom Kurtzas에 의해 교육용 툴로 개발됐다. 베이직의 인터프리터는 상대적으로 구현하기 쉽다) 프로그램을 개발해 줄 수 있다고 다른 컴퓨터 회사들에게 편지를 보내곤 했으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1975년 1월이 되자 파퓰러 엘렉트로닉스 잡지에 알테어가 실렸다. 폴 앨런은 잡지에서 이 키트를 보고 빌 게이츠에게 보여 주었으며 둘은 갑자기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빌 게이츠가 회고하기를 수천명이 이 키트를 보았을 터이고 사람들도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기 시작할 것이며 우리는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하는 걱정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파퓰러 엘렉트로닉스를 보고 이 커다란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다급한 마음이 생긴 것이 MS의 창업의 이유라면 이유였다.그래서 다른 회사의 의뢰를 받아 개발을 하느니 차라리 직접 개발하여 팔아보기로 정한 두 사람은 사람들이 컴퓨터를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작은 베이직 인터프리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종이와 연필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교내에 있던 DEC의 미니컴퓨터를 이용하여 폴 앨런이 8080의 시뮬레이터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 시뮬레이터 위에서 베이직이 수행됐다. 초기의 MS 베이직이 만들어지기까지 5주 가량이 걸렸다고 한다. 두 사람은 잠도 거의 자지 않고 하루 종일 방안에 쳐박혀서 아주 간단한 베이직 인터프리터를 만들어 냈다. 메모리 용량이 4KB인 MITS의 기계에서 수행되던 초기의 베이직은 코드를 줄이고 또 줄이는 이른바 코드 버밍(code bumming)이라는 나름대로의 용량 최소화 과정이 필요했다(젊은 시절의 빌 게이츠는 코드 버밍의 천재였다고 한다).그 다음에는 알테어를 만드는 MITS가 있던 뉴멕시코 주의 알브퀘큐(Albuquerque)라는 이상한 이름의 도시로 달려가 직접 알테어에서 베이직을 구현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컴퓨터가 너무 부족하여 사람들은 줄을 서서 시간대 별로 15분씩만 키보드를 만질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상황으로 마이크로컴퓨터의 프로그래밍 작업이 시작되었고 그 해에 MS라는 이름의 작은 회사를 만들게 되었다. 이 베이직은 베이직의 발명자인 존 케메니가 지적한 오리지널 베이직의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하지만 둘은 개의치 않고 베이직 개발을 계속했고, 결국 나중에는 케메니의 우아한 베이직보다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MITS 베이직으로 알려진 초기의 베이직을 포함하여 두 사람은 다른 기종의 베이직도 개발해 판매하고 있었다. 이들의 베이직 프로그램은 상당히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동호회를 통해 원본 종이테이프를 복사해 사용했다. 수적으로는 많은 MITS 베이직이 사용되고 있었으나 이들은 MS의 요구대로 프로그램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해적판’을 사용하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또 컴퓨터 해커들의 관례로 보면 MS의 주장은 먹혀들지 않았다. 시장이 채 열리기도 전에 MS는 ‘컴퓨터 애호가들에게 드리는 공개서한’이라는 글을 여러 곳에 발송했는데 그 내용은 더 많은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한 자본을 축적할 수 있도록 소프트웨어 해적 행위를 중지해 달라는 내용이었다.저작권법은 나중에야 컴퓨터 프로그램에도 적용되었는데 그 이전에 이미 MS는 MITS 베이직에 대한 판권을 소유하려 하는 MITS와의 소송으로 판권을 찾아왔다. MS의 첫 번째 제품부터 판권소송이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초기부터의 이상은 모든 책상과 가정에 MS의 제품이 사용되는 컴퓨터를 보급하자는 나름대로 원대한 것이었는데 당시 사람들 눈에는 이들의 너무나 진지한 태도가 정말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도 있었다. 1977년이 되자 애플, 코모도어, 라디오 새크 같은 기업들이 퍼스널 컴퓨터 시장에 진입하고 MS는 이미 이 당시에 이들과 일괄 계약으로 자신들의 베이직을 시장에 보급하려고 했다.당시에 베이직이 그토록 중요했던 이유는 아무런 애플리케이션이 없던 마이크로컴퓨터 시장에서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려면 베이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MS는 다른 회사들에 베이직을 공급하며 성장했다. 결국 대량으로 판매되는 기종들에 평판이 좋던 MS의 베이직을 사용함으로써 하나의 표준인 것처럼 베이직 언어 시장의 장악하는데 성공했다.그러나 80년대가 되기 전의 시장 규모는 미약한 것이었다. 8비트의 시장과 16비트의 시장은 규모의 단위가 다르다. MS는 70년대 말부터 일본의 니시 가즈히코(아스키를 창업한다)와 손을 잡으면서 아시아 시장에서도 MS 베이직의 판권을 팔았다. MITS 시절 4KB 정도의 기억장치에서 16KB, 32KB 그리고 마지막에는 64KB 근처까지 메모리가 늘어났지만 당시의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애플리케이션 언어는 베이직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베이직이 아니라면 어셈블리 언어로 개발해야 했다(파스칼이 중요한 언어로 등장한 것은 80년대의 UCSD Pascal이며 그 다음에는 볼랜드가 8비트부터 터보 파스칼 선풍을 일으켰다. C는 그보다는 늦게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16비트 시대가 되어서도 80년대 말까지 베이직은 매우 중요한 언어였다. 적어도 PC 세계에서는 그랬다.운영체제 MS가 베이직만으로 성공적인 영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컴퓨터들이 너무나 간단했기 때문이었다. 운영체제라기 보다는 모니터 롬에 가까운 마이크로컴퓨터의 구조가 그러했다. 이 ROM은 컴퓨터의 부팅부터 화면에 글자를 띄우기까지 간단한 초기화를 한다. 디스크 드라이버가 없는 초창기의 애플 II 컴퓨터를 켜면 1~2초 만에 ‘삑’하는 소리와 함께 ‘Apple II’라는 글자가 나오고 바로 베이직 인터프리터가 나오는 구조였다. 사실상 베이직 인터프리터를 띄우기 위한 펌웨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컴퓨터를 제어하는 번지수들은 64KB 주소공간 안에 있고 베이직 명령어 peek와 poke를 사용하여 무엇이든지 제어할 수 있는 너무 간단한 구조였다.컴퓨터들이 외부의 데이터를 읽어와야 하는 경우 가장 초기의 기계들은 종이테이프에 구멍을 뚫어서 읽는 방식이었다. 작은 플로피 디스크의 10분의 1만 채우려 해도 종이테이프는 약 20피트 가량의 길이가 되곤 했으며 끊어지면 조심스럽게 이어 붙여야 하는 일을 되풀이하곤 했다. 그 다음에는 FSK(Frequency Shift Keying)를 이용한 방식으로 간단한 모뎀 같은 회로를 이용하여 프로그램과 데이터를 카세트테이프 음성으로 저장했다. 하나의 프로그램을 띄우려면 일반 카세트테이프의 이어폰 단자에 컴퓨터를 연결하고 팩스나 모뎀과 비슷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70년대 중반이 되자 거의 같은 성능의 기계에 플로피 디스크를 장착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이 정도의 기계에서 운영체제를 논의하는 일이 우습기는 해도 마이크로컴퓨터들이 나온 지 불과 3~4년 후에는 벌써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채택하는 기종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만큼 진보가 빨랐다.DOS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CP/M이라는 운영체제를 아는 독자는 아마 소수일 것이다. 이른바 DOS(Disk Operating System)라는 것은 70년대에는 하나의 커다란 기술적 도전이었다. DOS라는 이름이 붙으려면 적어도 플로피 디스크 정도는 컨트롤할 수 있어야 했다. 하드디스크는 훨씬 더 뒤에 나온다. 요즘은 구별이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8인치 짜리의 플로피를 플로피 디스크(disk)라고 했으며, 그 다음에 나온 5.25인치와 3.5인치를 플로피 디스켓(diskette)이라고 불렀다. 디스크보다 작다는 뜻이다.1970년대 후반이 되었을 때에는 회사들이 DOS를 고려할 때는 둘 중의 한 가지를 선택해야 했다. 하나는 CP/M을 이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들만의 DOS를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애플은 애플 도스를, 다른 회사는 회사의 이름을 딴 자신들만의 DOS가 있었고 바로 옆에는 시장에 일찌감치 진입한 CP/M이 있었다.CP/M과 기타 운영체제라는 이름으로 불려도 마땅할 산업계 표준인 CP/M은 신기하게도 다른 회사들이 마이크로컴퓨터를 만들기도 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이 운영체제를 만든 사람은 게리 킬달로 일종의 천재이지만 결코 상업적일 수는 없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킬달은 한때 매우 성공적인 디지털 리서치(Digital Research Institute)의 창업자이자 사장이었다. 게리 킬달이 비즈니스적인 능력을 함께 발휘했다면 적어도 운영체제에서는 MS를 떨쳐 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프로그래머나 엔지니어로서는 매우 출중한 사람이었다. DRI와 MS는 한때 IBM의 운영체제가 되기 위해 경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결정적인 계기는 IBM PC와 함께 시작된다. 1980년대 초 IBM이 돈 에스트리지의 지휘 하에 IBM PC를 만들기 위해 비밀리에 개발 회사들을 타진하고 다닐 무렵 IBM은 PC를 만들 하드웨어도 소프트웨어도 없었다. 하드웨어는 신생 회사라 못미덥기는 했으나 쉽게 주변 부속을 쓸 수 있는 인텔의 8088을 CPU로 선정하였으나 디스크를 장착하기로 해서 간단한 운영체제가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IBM은 일종의 DOS를 필요로 했다. IBM의 직원들은 몇 군데의 회사를 만나러 다녔으며 그 중에는 최종적으로 MS와 디지털 리서치가 남았다.사실 두 회사를 비교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말할 수 있었다. DRI의 CP/M은 이미 아성을 구축하고 있었다. 1973년 슈가트에서 인텔에 샘플로 8인치의 디스크 드라이브를 기증하자 그 전부터 인텔과 일해 왔던 킬달은 이 장치를 보고 너무나 마음에 든 나머지 개발장비 엔지니어이던 존 토로드와 함께 개발장비를 위한 디스크 컨트롤러를 만들었다. 디스크 제어기가 곧바로 만들어졌고 학교의 학생들과 함께 이 제어기를 컨트롤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작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CP/M의 조상이 되었다.CP/M은 PDP-10의 VMS 운영체제에서 명령어와 파일 이름을 구성하는 방법을 차용했다고 한다. 그의 제자였던 고든 유뱅크스는 원시적인 CP/M을 위한 베이직 인터프리터를 만들었다. 킬달은 인텔과는 아주 친했고 인텔의 8008 시절부터 디버거와 시뮬레이터를 만들어 왔으므로 MS보다 더 빠른 시기에 이미 운영체제와 베이직 인터프리터를 갖고 있었다. 1976년 이전의 초기 버전들은 공공시설인 해군 연구소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공개돼 돌아다녔고 해군 연구소를 나온 후 곧 바로 토로드와 함께 DRI의 전신인 IDR(Intergalactic Digital Research)를 창립했다(Intergalactic은 은하계 간이라는 뜻이다).회사가 창립되자마자 두 사람은 여러 마이크로컴퓨터 제조회사를 위해 디스크 제어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1976년 당시 대표적인 회사였던 MITS와 경쟁 회사였던 IMSAI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2만 5000달러에 DRI와 비독점적인 계약을 한다. 여러 회사가 CP/M을 원하고 있었으므로 킬달은 프로그램을 완전히 다시 짜고 BIOS(BASIC Input/Output System)라는 이름의 기본적인 모듈만 바꾸면 다른 기종 간에도 자유롭게 CP/M을 이식할 수 있도록 전체 구성을 재설계했다. 그리고 에디터, 어셈블러 그리고 디버거와 다른 유틸리티를 첨가했다(이 전통은 그 다음의 DOS에서도 거의 비슷한 패키징이 들어가는 것으로 이어졌다).완전한 마이크로프로세서 개발 시스템으로 탈바꿈한 CP/M은 업계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회사 이름을 다시 Galactic Digital Research로 바꾸고 CP/M-80이라는 이름으로 90달러에 판매했다. 놀랄 만큼 많이 팔린 CP/M-80은 개인들뿐만 아니라 1977년이 되자 회사들까지 사용하기 시작했다. 회사들은 자신들의 BIOS를 만들고 이 바이오스는 CP/M을 성공적으로 로드하면 되었다. 킬달의 회사 이름은 다시 galactic을 빼고 Digital Research Institute로 변경되었다.CP/M은 어찌 보면 시대를 뛰어넘은 설계라고 할 수 있다. 킬달은 나중에 회고하기를 CP/M의 성공은 확신할 수 없었으나 플로피 디스크의 성공은 확신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1978년이 되자 MS의 FORTRAN, UCSD Pascal, MicroPro의 WordStar, Ashton-Tate의 dBase를 포함한 많은 프로그램들이 CP/M에 기반한 기계들 위에서 수행되고 있었다. 많은 기계들이 CP/M을 이식할 준비가 되었기 때문에 CP/M은 Apple, Radio Shack, Commodore, Zenith, Sharp 같은 거의 모든 기종에서 동작했다. 기계의 성능은 카세트조차 없던 초기의 기계들과 비슷했으나 메모리를 늘리고 디스크 컨트롤러만 달면 CP/M을 이용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MS도 CP/M에 관여하고 있었다. MS에서 개발된 소프트 카드라는 제품으로 이미 6502라는 다른 CPU를 사용하고 있던 애플에 카드를 꽂으면 Z80 CPU 기계로 바뀌고 당연히 애플에서도 CP/M을 즐길 수 있었다. 애플의 숫자가 워낙 많아서 소프트 카드는 대단한 히트 상품으로 변했다. 다른 기종의 CP/M의 카피 수와 비슷할 만큼 많은 양의 CP/M이 MS를 통해 팔려 나갔다. 영업 면으로는 대단한 수확이었으나 CP/M이 MS의 운영체제는 아니었다.1980년에 IBM은 DRI와 접촉하여 8086 버전인 CP/M-86을 라이선스 받으려 하였으나 킬달은 이미 다른 언어들의 프로젝트에 바빠 잘 마무리를 지으려고 하지 않았다. 다른 회사들도 CP/M-86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킬달은 자신의 프로젝트에 바빴다. 1979년 8086 기반의 컴퓨터 키트를 만들고 있던 시애틀 컴퓨터(Seattle Computer Products)는 CP/M-86을 기다리다 지쳐서 팀 패터슨이라는 프로그래머를 고용하여 운영체제를 만들고 패터슨은 이를 QDOS라고 불렀다. QDOS는 Quick and Dirty Operating System(급조한 DOS)의 약자로 CP/M의 기능조차 완전히 구현하지 못한 제품이었다고 한다. MS는 근처에 있던 시애틀 컴퓨터를 위해 베이직의 변형판을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에 QDOS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16비트의 초입에서 IBM의 직원들이 DRI를 방문했을 때 킬달의 전처이자 DRI의 공동대표였던 도로시와 DRI 측의 변호사는 IBM의 비밀준수를 거부했다. IBM 측의 비밀유지 계약이 너무나 일방적으로 IBM 측에 유리한 조항이 많아서라는 이유였다. 아예 킬달은 회의장에 나오지도 않았다. CP/M-86의 변경도 거절했으며 IBM이 제시한 것보다 더 높은 로열티를 요구했다. 협상은 결렬에 가까웠다.MS 측에도 협상이 있었는데 게이츠는 베이직 때문에 IBM과 일해 본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의 기회를 붙잡기로 했다. 당시의 상황은 아무래도 DRI 측이 유리했다. 빌 게이츠는 IBM에 DOS와 베이직 패키지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더 유리한 가격 조건으로 제공하겠다고 나섰다. 곧바로 시애틀 컴퓨터의 SCP-DOS를 5만 달러에 라이선스하고 팀 패터슨을 고용하여 이 도스를 IBM PC에 맞추는 일을 시켰다. IBM은 그 이전에도 몇 번 PC의 개발을 중도에 포기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MS로서는 상당한 모험이었다. 결국 언어의 개발과 유지보수만 해도 벅찬 인력을 가지고 있던 MS는 개발되어 있는 8비트 운영체제조차 없으면서 IBM 측에 걱정하지 말라고 일종의 블러핑을 한 후 QDOS를 가지고 MS-DOS를 만든 것이다. DRI에는 이미 CP/M-86은 거의 완성 상태였다.IBM이 MS-DOS의 첫 번째 릴리즈를 테스트했을 때 300개가 넘는 버그를 찾아냈다고 한다. IBM도 급했기 때문에 디버깅과 개선을 도와주었고 매뉴얼까지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DRI는 DOS의 버전 1.0 이후에 CP/M-86을 발표했다. IBM은 CP/M-86과 DOS를 같이 발표했는데 MS-DOS는 60달러였고 CP/M-86은 240달러에 책정되었다. DOS 1.0이 아무래도 기능이 많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사용자들은 선뜻 돈을 더 내고 DRI의 제품을 사려고 하지 않았다. DRI는 CP/M을 카피(시스템 콜, 프로그램 구조, 유저 인터페이스)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MS를 제소하려고 했지만 이것은 IBM을 제소하는 결과가 되며 길고 머나 먼 법적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결국 포기했다. MS는 운이 좋았다. 1982년이 되자 IBM 측이 MS에게 DOS의 하드디스크 버전을 요청했고 MS는 완전히 새로운 코드 재작성의 기회를 얻었다.DOS 버전 2.0은 1.0과 완전히 다른 코드를 사용하게 되었고 DRI의 제소 기회는 사라졌다. MS-DOS의 성능도 점차 개선됐다. 결국 전세는 바뀌어 DRI는 CP/M-86을 개량하여 멀티태스킹과 멀티유저 기능을 추가한 버전을 내놓지만 이번에는 DOS와 100% 호환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외면당했다. 불과 2~3년 만에 전세가 역전된 것이다. 나중인 1989년에는 DRI에서 DR-DOS를 만들어 MS-DOS와 완전히 호환되는 버전을 만들어 냈지만 MS의 마케팅 전술을 이겨내지 못했다. MS-DOS 버전 5.0과 6.0에 DR-DOS의 특징들을 포함시켰기 때문이다.초기에는 MS-DOS가 과연 CP/M의 아성을 깰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많았다고 한다. CP/M에 깔려 있는 수많은 소프트웨어들과 그 사용자들이 과연 성능이 그렇게 우수하지도 않은 XT 기종으로 옮겨 갈 것인지도 의문스러운 상황이었다. CP/M은 그만큼 잘 설계된 운영체제였다. 개발자들 역시 기존의 CP/M을 포기할는지 의문스러운 상황이었다. CP/M은 고사하고 애플이나 다른 컴퓨터의 사용자들이 IBM PC를 선택할 지조차 의문스러운 상황에서 예상보다 빠른 전환이 일어났다. 그 이유는 분분하나 사람들이 IBM PC를 사용하기 시작하자 좋은 애플리케이션들이 IBM PC에서도 나타났고 더욱이 10배 이상 커진 메모리 공간의 도움을 톡톡히 받고 있었다. 한번 변화가 일어나자 사실상 산업계의 표준은 IBM 호환으로 바뀌었다. 게리 킬달과 CP/M나름대로 커널과 운영체제에 관심이 많은 필자로서는 8비트 시대의 가장 획기적인 운영체제인 CP/M에 대한 언급을 회피할 수 없다. 8비트 시절의 빈약한 하드웨어 위에 본격적인 운영체제를 만든 사람인 게리 킬달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80년대의 PC 왕국은 어떠한 형태이건 CP/M과 킬달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그림자는 90년대에 윈도우가 나오면서 간신히 희석되기 시작했다(초기의 MS-DOS 버전의 시스템 콜과 CP/M의 시스템 콜 그리고 MSX-DOS의 시스템 콜은 정말 놀랄 만큼 흡사했다).게리 킬달에 관한 글을 보고 있으면 어쩌면 컴퓨터 업계에서 회피할 수 없는 2가지의 커다란 대극, 그러니까 아카데미즘과 비즈니스라는 두 가지 측면이 극명하게 대비된다. 게리 킬달은 아카데미즘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급변하던 당시의 상황은 예상되었던 승부를 바꾸어 놓았다. 조금 더 느린 템포로 발전하고 있었다면 어떤 승부가 났을지 생각해보곤 한다. 때때로 필자는 가끔씩 프로그래밍하는 어떤 사람들의 성향은 빌 게이츠보다는 게리 킬달에 가까운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킬달의 성향은 일종의 전형적인 해커들의 성향과 유사했다.DDJ(Doctor Dobb’s Journal)의 편집장이었던 M. Swaine은 게리 킬달에 관한 글에서 초기의 마이크로컴퓨터의 발전을 하나의 혁명으로 보았다. 초기의 분위기는 참여한 사람들의 연령을 고려하고 새로운 형태로 빠른 발전이 일어나는 분야임을 고려할 때 대학교처럼 정보가 자유롭게 공유되는 분위기가 자연스러웠다고 한다. 과거의 것들을 붙잡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유로웠고 정보의 고유와 빠른 발전의 시너지가 대단한 발전의 핵심요소였다고 지적했다. 퍼스널 컴퓨터의 혁명은 진정한 혁명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MS와 애플은 본사를 캠퍼스라고 부르며 이런 분위기를 유지하려 한다고도 지적했다. 하지만 가장 이런 분위기가 가장 충만했던 회사는 DRI였으며 대학교의 분위기 바로 그 자체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게리 킬달은 타고난 교사 스타일의 사람이었으며 비즈니스는 그에게 별로 걸맞는 일이 아니었다고 했다.킬달이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세계로 들어오게 된 것은 1972년으로 대학 게시판에서 25달러짜리 마이크로컴퓨터의 광고를 우연히 본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인텔에서 만든 광고물 조각이었다. 1972년으로 봐서도 그것은 싼 가격이었다. 이 광고는 4004를 만든 테드 호프가 이 칩은 마이크로컴퓨터라고 부르는 것이 옳고 결국 엔지니어들은 마이크로컴퓨터를 이용할 것이기 때문에 광고를 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호프는 마이크로컴퓨터의 장래를 낙관했다. 킬달은 25달러를 보내고 이 칩을 구입했다.그 당시에 청바지에 티셔츠를 허접하게 입고 다니던 킬달은 누가 보아도 얼마 후 컴퓨터 업계에서 비중 있는 일을 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유롭게 사는 킬달이 영원히 컴퓨터나 가르치고 있을 사람으로 보았으며 또한 사실이었다. 킬달이 인텔의 칩으로 처음 만든 것은 아버지의 부탁으로 항해용 삼각계산을 하기 위한 계산기를 만들면서부터였다. 4004는 4비트였기 때문에 너무나 불편했다.결국 킬달은 인텔을 찾아갔는데 인텔의 마이크로컴퓨터 연구 부서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회사에서는 아주 작은 공간과 인력만을 마이크로컴퓨터 부서에 제공해 주었다. 부서의 사람들과 킬달은 곧 친해졌는데 킬달은 1주일에 한번 컨설팅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인텔과 일을 같이 하기로 했다. 주당 하루의 일 때문에 킬달은 하루 종일 또는 한달 내내 거의 4004의 프로그램에 미쳐가고 있었다. 폴 앨런이 했던 작업처럼 킬달 역시 대형 컴퓨터로 시뮬레이터를 만들어 4004와 그 후속작인 8008을 위한 명령어 셋트를 테스트하고 있었다. 몇 달의 작업 후 킬달이 만들어 낸 것은 베이직이 아니라 PL/I의 마이크로컴퓨터 판인 PL/M이었다. 이 언어는 대형기기에서 수행되던 본격적인 언어였다.인텔에서 주당 1회의 일로 들어오는 수입 말고도 킬달은 개발 장비를 얻을 수 있었다. 1970년대 초반에 인텔은 개발기인 인텔렉트 80을 업그레이드하면서 킬달에게 비디오 모니터와 고속의 종이테이프 판독기를 제공했고 킬달은 학교에 이 장비를 갖다 놓고 그의 학생들에게 마이크로컴퓨터를 가르쳤다. 킬달은 마이크로컴퓨터를 사용하면서 이 기계의 가장 취약한 부분은 저장장치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아직 알테어 컴퓨터가 생기기도 전이었다. 당시의 디스크 드라이브는 500달러이고 플로피는 5달러 정도였기 때문에 종이테이프보다 쌌으며 플로피 디스크만 있다면 마이크로컴퓨터는 다른 컴퓨터의 지원 없이 독자적으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국 혼자 힘으로 컨트롤러를 개발하려 했으나 몇 번의 실패 후 친구인 존 토로드에게 하드웨어의 구성을 부탁했다. 이 컨트롤러는 잘 동작했다.킬달을 기업의 세계에 발을 딛게 만든 계기는 점성술을 계산하는 기계였다. 마이크로네이션이라는 회사에서 킬달에게 기계를 완성해 달라고 부탁했다. 기계는 만들었지만 잘 팔리지 않았다. 대신 이 기계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의 실전 테스트를 해볼 기회를 제공했는데 킬달은 여러 달 동안 프로그램을 다시 짰고 또 짜곤 했다. 디버거 어셈블러 그리고 에디터의 일부를 만들 수 있었다. 결국 베이직 인터프리터까지 만들었으나 킬달은 그 일을 그의 학생이자 해군장교인 고든 유뱅크스(Gordon Eubanks - Symantec의 대표를 지냈다)에게 맡겨 인터프리터도 개발됐다. 이들 프로그램이 나중에 디스크를 제어하기 위한 CP/M(Control Program for Microcomputer 또는 Control Program Monitor라고도 한다)의 구성요소가 됐다.컨트롤러까지 완성되었을 때 이들은 CP/M을 2만달러에 인텔에 팔려고 했다. 인텔은 킬달의 소프트웨어를 사주었는데 PL/M을 사고 CP/M의 판권은 사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CP/M은 인텔의 개발 장비로 제공받은 인텔릭스를 많이 닮았다. 인텔은 마이크로컴퓨터를 임베디드 시장에 내놓으려 했고 CP/M은 그러한 장비를 개발하는 데 필요한 모든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인텔은 원하지 않았다. 인텔에는 인텔릭스 같은 제품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인텔이 원하는 물건이 아니더라도 킬달과 토로드는 CP/M이 하드웨어 해커들과 개발자들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필요한 물건임을 알고 있었다.본격적인 사업에 뛰어들게 된 것은 아내인 도로시가 킬달에게 사업체를 만들자고 졸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킬달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도로시가 영업을 하기로 했다. 회사가 만들어지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모든 회사들이 디스크 운영체제를 원했기 때문에 회사는 잘 운영되었다. 초기에는 라이선스를 공짜에 가까운 염가로 주기도 하다가 물건이 잘 팔리면 다음 해에는 가격이 100배 정도 올려서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소프트웨어의 가격 모델이라는 게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IMSAI와의 비독점적인 CP/M 공급계약을 2만 5000달러에 맺은 1977년부터 킬달은 회사에만 전념했다. 비록 거의 라이선스를 도둑맞았다고 할 만큼 싼 가격이었지만 다른 회사들이 IMSAI의 관례를 따라 CP/M을 계약하기를 희망했으므로 IBM과의 거래 이전에는 중요한 경쟁자라는 것은 없었다. 회사는 급성장했다.70년대 말이 되자 킬달은 과연 자신이 정말 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어 고민하기 시작했다. 회사를 친구에게 넘기려고 몇 번이나 주저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아무런 득점도 없는 게임과 업계에 대한 싫증으로 학교로 돌아가려고 몇 번이나 주저했다고 한다. 친구들에게 회사를 넘겨주는 금액으로 7만달러 정도를 생각했던 킬달은 도로시의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회사를 계속 유지하기로 했다. 1981년이 되자 회사의 매출액은 600만달러 정도가 되었다. 그해에 IBM과의 계약이 진행되기도 했다.IBM PC의 운영체제 계약의 실패는 두고두고 킬달을 실의에 빠뜨렸으나 킬달은 그 후에도 계속 활동했다. 킬달은 GEM 같은 GUI 환경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멀티태스킹 운영체제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최초의 CD-ROM 파일 시스템을 설계하기도 했다. 한 명이 이루어낸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많은 일을 하기도 했으나 사업적으로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업적에 더해 사람들은 그의 인간성과 인내심 그리고 너그러움을 언급하곤 했다.게리 킬달의 비극 ‘상대가 빌게이츠였다는 사실’사람들은 그의 비극이라면 바로 뒤에 쫓아오던 상대가 빌 게이츠였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자기가 LISP로 만든 알고리즘이 너무 아름다워 액자에 걸어두고 싶을 정도라고 말하는 사람과 게이츠의 시합은 어떤 면에서는 승패가 이미 정해진 것이다. 그를 취재했던 포춘의 기사에서는 그를 우선 휴머니태리언으로 소개했다. 사실 빌 게이츠와 킬달은 어떤 면에서 많이 다른 사람이었다.1997년 DDJ의 M.Swaine이 쓴 스페셜 리포트의 제목은 게리 킬달을 기억하며(In memory of Garry Killdall)였다(정말 잘 요약된 글이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꽤 많을 것이다. 게리 킬달은 1992년에 사고로 사망했고 그 이전에 이미 업계의 판도는 완전히 MS에 의해 지배받게 되었다. DRI의 많은 제품들은 사람들에게서 잊혀졌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게리 킬달과 CP/M을 잊지 못한다. 필자도 게리 킬달을 기억하며 앞으로도 잊지 못할 것이다. @* 이 기사는 ZDNet Korea의 자매지인 마이크로소프트웨어에 게재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