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입장에서야 새로운 하드웨어와 API가 나오면 당장 놀라운 시각 효과를 가지는 게임들이 출시되길 고대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국내에서는 다이렉트X 8조차도 제대로 활용하는 게임을 본적이 없다. 이는 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물론 외국에서 다이렉트X 8을 지원하는 게임이 나오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 기능을 제대로 활용했다고 평가할만한 PC 기반의 게임은 아직 보지 못했다). 이처럼 새로운 기술이 적용된 게임이 출시되는 것이 점점 늦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고 국내에서 다이렉트X 9.0가 적용된 게임이 왜 당장 나오기가 어려운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비관적인 게임 개발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일지 모르겠지만 한번쯤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확장된 기능을 쓰려면 새로운 하드웨어가 필요하다이는 아마 현실적으로 가장 걸리는 문제 중에 하나일 것이다. 실제로 다이렉트X 9.0이 출시되고 그 표준을 만족하는 하드웨어가 출시되었지만, 대부분의 사용자들은 하드웨어 T&L 정도를 지원하는 다이렉트X 7의 기능을 활용할 수 있을 뿐이다(현재 새 PC를 구입하는 사용자들이 가장 많이 사는 그래픽 하드웨어는 엔비디아의 지포스2나 지포스4 MX 제품군으로 알고 있다). 그나마 일반 사용자들은 이보다 더 낮은 사양의 그래픽카드를 쓰고 있는 형편이다.더 큰 문제는 대부분의 사용자들이 업그레이드의 필요성을 더 이상 못 느낀다는 점이다. 이미 CPU와 GPU의 성능은 충분히 발전해 특정한 상황을 제외하면 통상적인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하는 데 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사용자들이 피부로 느낄 만큼의 차이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다이렉트X 9.0을 지원하는 하드웨어는 현시점에서 너무나 비싸다(라데온 9700 제품군은 30만원대 이상이고, 지포스FX 또한 400달러에 가깝게 초기 가격이 책정될 것이라 한다). 또한 초기에 출시되는 제품은 안정적이고 완벽하게 다이렉트X 9.0을 지원해 주지는 못한다. 따라서 다이렉트X 9.0 지원 하드웨어가 널리 보급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곧 고사양을 지원하는 게임 소프트웨어의 개발에 난제로 작용한다. 뿐만 아니라 다이렉트X 8.x를 지원하는 하드웨어처럼 조용히 시장에서 사라져 버릴 요소도 다분하다. 적어도 다이렉트X 9.0을 사용해서 이익을 낼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기 전까지 상용 게임에 적용시키는 문제는 유보되지 않겠는가.국내 시장, 네트워크 온라인 게임이 주류그나마 외국은 하드코어 게이머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이런 부류의 게이머들은 더 빠르고 혁신적인 그래픽 게임에 열광하며 기꺼이 자신의 하드웨어를 업그레이드하고 기다린다. 그러나 국내 시장은 다르다. 네트워크 온라인 게임이 주류이며, 이 게임의 가장 큰 특징은 많은 사람이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이 즐기기 위해서는 최고 사양이 아닌 최저 사양을 항상 고려해야 한다. 물론 다양한 플랫폼을 지원하도록 만들 수는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리 녹녹한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상용 네트워크 게임에서 새로운 기술이란 그림의 떡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온라인 게임에서 다이렉트X 9.0을 제대로 지원하기 위해서는 다이렉트X 9.0 지원 하드웨어가 사용자들의 최저 사양이 되는 날이 와야 하는 것이다. PC 게임 개발자가 넘어야 할 기술적 장벽개발자들에겐 다소 우스꽝스럽게 들리는 말인데, 새로운 하드웨어나 API가 나오면 이와 함께 전파되는 개발자용 광고문구는 언제나 ‘혁신적인 기능을 더욱 쉽고 빠르게’이다. 그러나 아직 한 번도 ‘더 빠르고 쉽게’라는 말이 진실이라고 생각된 적은 없다. 결과적으로 구현 자체는 더 간단할지 모르겠지만 그 기술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기술이란 새로운 것이 나올수록 더욱 복잡해지고 어려워지는 게 일반적이다. 또한 그 기술을 구현한다는 것이 비단 프로그래머에게만 국한되는 문제도 아니다. 그래픽 디자이너 역시 해당 기술을 이해하고 신기술에 맞춰서 모델링 등을 해줘야 하며, 이에 맞는 새로운 형식의 리소스를 만들 능력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외에 기획자나 기타 스텝들도 전체적인 이해가 필요하다(둠 III의 화려한 그래픽이 단지 존 카멕 혼자의 능력 때문에 구현된 것이 절대 아니다). 새로운 기술을 적용시키기 위한 기본적인 설계나 구조 등을 만들 때 고려되어야 할 사항들도 더욱 늘어난다. 새로운 기술이란 전례가 없기에 수많은 테스트와 연구가 요구되는 것도 당연하다. 이러한 모든 노력이 뒷받침된 이후에나 상용 게임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이 부분은 IT 기술을 주도해가는 미국 개발자들도 힘들어 하는 점이다). 그나마 분업화가 잘 되어 있는 미국과 달리 거의 혼자서 게임 개발을 담당해야 하는 우리나라 개발자들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개발 시간과 비용 증대다이렉트X 9.0 API를 사용하고 그래픽 하드웨어만 받쳐준다면 CG 영화에 가까운 수준의 표현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는 역으로 CG 영화와 비슷한 화면을 만들어 내려면 이와 맞먹는 작업량과 비용이 들어간다는 말이 된다. 게임의 경우 이 비용이 더 들어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캐릭터 하나당 1000개의 폴리곤으로 만들던 작업을 10만개의 폴리곤으로 만든다고 가정하면 작업자의 입장에서야 더 세밀하고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해지므로 반가운 일이지만 그만큼 시간과 비용은 증가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영세한 국내 게임 개발사의 현실에서 봤을 때 제작 비용과 기간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게임 개발에 선뜻 나설 업체는 거의 없지 않을까. 이런 의미에서 새로운 기술로의 이전은 거대 기업들의 독점을 가속화할 지도 모르겠다. 개발 시스템 자체가 낙후돼 있다우리나라는 게임 개발이 시작된 지 이제 불과 10년 남짓이다. 그동안 축적된 개발 시스템이라고 해봐야 소수의 인원으로 그다지 크지 않은 게임을 만들어왔을 뿐이다. 게임 산업은 산업의 최상 위에 위치하는 기술 집약적 산업이다. 다른 기초 과학이나 공학 시스템의 수준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선진국들에 비해 낮은 수준의 시스템이나 기반을 갖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대부분의 게임이 극소수의 개발자들에 의해 1년 남짓한 기간에 개발된다는 사실을 아는가? 개인적으로 필자 주위에는 1주일 만에 2D 게임 하나, 3개월 만에 3D 게임 하나 만드는 개발자들도 본 적도 있다. 그나마 영세한 게임 개발사의 현실은 오랜 연구 기간이니 개발자들의 수준 향상이니 하는 사항은 고려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험 요소를 안고 새로운 기술의 도입을 생각할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통상적으로 우리나라는 개발 시스템이 미국에 비해 몇 십 년 이상이나 낙후돼 있다. 미국에서조차 당장 힘든 일이 현재의 우리 시스템으로 가능하겠는가. 게임 산업에 대한 사회와 개발자의 시각차앞서 말한 내용을 토대로 생각해 보면 다이렉트X 9.0으로 제대로 만든 게임이 국내에서 나오기는 불가능할지도 모른겠다. 필자가 보기엔 아마도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는 시스템 자체의 낙후가 아닐까 생각된다. 다른 이유들이야 시간이 가거나 상황이 변하거나 소수의 노력에 의해 바꿔나갈 수 있는 문제지만 전체적인 시스템의 변화는 많은 이들의 노력과 지속적인 관심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사실 정부나 사회가 바라보는 게임 산업의 모습과 개발자가 바라보는 게임 산업의 모습이란 너무도 다른 것이 현실이다. 개발자와 개발사들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기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소프트웨어 산업, 특히 게임 산업을 바라보는 시각을 교정하고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줘야 가능한 일이 대부분이다. 다소 우울하지만 국내 게임 개발의 현주소를 정리해보았다. 이런 필자의 글에 반론을 제기할 독자도 있겠지만 다이렉트X 9.0이 나온 마당에 최신 기능과 최고 성능의 게임을 개발해보고 싶은 필자의 간절한 소망이라 생각해주면 고맙겠다(사실 필자가 볼 수 있는 세상이 그리 넓지는 못하다). 다이렉트X 9.0이 과거의 모습을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려 하듯 우리의 개발 현실도 새로운 모습으로 나아가길 기대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