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한 경멸을 맞으며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한마디 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의 계층에 속하는 영예를 얻지 못했습니다. 보다시피 나는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운명에 반항한 일개 농부입니다. - '적과 흑' 중에서.
작가 스탕달의 분신이나 다름 없는 쥘리앵 소렐은 야심만만한 평민 청년이었다. 준수한 외모와 타고난 총명함을 겸비했던 쥘리앵은 가정교사로 일하던 집 안주인인 레날 부인의 마음을 사로잡지만, 남편 레날 씨에게 들켜서 쫓겨난다.
신분상승을 꿈꾸던 쥘리앵 소렐에겐 청천벽력 같은 사건. 하지만 레날가에서 쫓겨난 사건은 쥘리앵에겐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
이후 명문 후작의 거만한 딸 마틸드를 유혹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쥘리앵은 드디어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다.
늘 그렇듯, 세상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야심만만한 평민 청년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옛 연인이었다. 결혼식 전날 전 연인이었던 레날 부인의 밀고장이 날아들면서 모든 게 물거품이 되고 만 것. 분노한 쥘리앵은 곧바로 레날 부인을 찾아가 총탄 두 발을 날린 뒤 스스로 경찰에 체포된다.
앞에서 인용한 문구는 '저격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 쥘리앵 소렐의 최후 변론 중 한 대목이다. 발버둥쳤지만 끝내 귀족 사회에 편입되는 데 실패한 한 평민의 처절한 고백이 가감없이 배어 있다.
'적과 흑'을 쓴 스탕달은 쥘리앵 소렐과 비슷한 삶을 살았다. 일개 하사관 출신인 나폴레옹이 유럽 전역을 호령하는 것을 목격한 스탕달은 그 무렵의 야심 많은 평민 청년들처럼 신분상승이란 거대한 꿈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쥘리앵 소렐의 절규가 더 가슴에 와닿는 것은 바로 작가의 분신이나 다름 없기 때문일 것이다.
■ 18세기 살롱, 21세기 소셜 미디어의 원형?
이번엔 스탕달의 ‘적과 흑’과 비슷한 시기 유럽을 다룬 또 다른 작품으로 눈을 돌려보자. 신방과 출신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책. 하지만 끝까지 읽은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책. 바로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변동'이다. 교수 자격 논문을 발전시킨 이 책은 하버마스 사상의 젖줄이나 다름 없는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
하버마스는 이 책에서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국가와 시민 사회 사이에 존재하는 또 다른 사회 영역에 주목한다. 이 곳이 바로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의 중간에 자리잡고 있는 공론장이다.
하버마스는 부르주아 공론장의 맹아를 17세기 후반 영국으로 잡고 있다. 영국의 뒤를 이어 프랑스에서는 18세기, 그리고 독일에서는 그보다 좀 더 늦게 부르주아 공론장이 탄생했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기본 입장이다.
물론 하버마스가 이 책에서 진짜 관심을 갖는 것은 '공론장'의 '구조 변화'다. 다시 말해 근대 시민사회의 발전과 함께 공론장이 재봉건화되면서 사회적 개인들이 비판적 청중 역할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관심을 갖는 것은 재봉건화되기 이전의 공론장, 즉 프랑스와 영국에서 18세기에 융성했던 공론장이다. 하버마스는 이 시기 카페와 살롱을 민주적 토론이 융성했던 공론장의 모범으로 평가하고 있다. 하버마스의 글을 그대로 옮겨보자.
1680년과 1730년 사이에 번성했던 커피하우스와 섭정 시기와 혁명 사이 기간의 살롱이다. 이것은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처음에는 문예적 비판의 중심지였으며 후에는 정치적 비판의 중심지가 된다. 여기서 귀족주의적 사교계와 부르주아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교양층의 평형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102쪽)
당시 카페와 살롱은 문예토론의 중심지였다. 요즘 표현으로 하자면 기본 플랫폼이나 다름 없었다.
하버마스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18세기의 위대한 문필가들 중 먼저 이러한 담론으로, 즉 아카데미에서의 강연과 무엇보다도 살롱에서의 담론으로 먼저 자신의 기본 생각을 토론에 부치지 않았던 사람은 거의 없다(105쪽)”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 막힌 사회와 열린 사회
다시 '적과 흑' 얘기로 돌아가보자. '적과 흑' 주인공인 쥘리앵 소렐을 힘들게 한 것은 꽉 막힌 사회 구조였다. 자신의 야심을 맘껏 펼칠 수 없는 폐쇄된 구조 때문에 숨이 막혔다. 유럽에서 한 때 번성했던 카페와 살롱 중심 공론장은 숨막힐 듯한 폐쇄적인 사회 속에 자리잡은 자유의 공간이었다. 그 때문에 18세기 유럽의 카페, 살롱 공론장에서 블로그와 SNS를 비롯한 시민 저널리즘의 원형을 찾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여기서 조금 비약을 해보자. ‘적과 흑’의 폐쇄된 구조는 전통 언론들이 이슈를 독점하던 시대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주장을 언론을 통해서만 유통되던 시절. 쥘리앙 소렐처럼 야심많은 젊은이들도 귀족 사회 속에 편입되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던 것처럼, 제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기자들의 펜을 빌리지 않으면 자신들의 주장을 펼칠 수 없었던 시대.
하버마스가 카페와 살롱문화를 그토록 높이 평가한 것은 이런 폐쇄적 구조를 무너뜨린 힘 때문이었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만찬회, 살롱, 커피하우스가 공중의 범위와 구성, 교제 스타일, 논의의 풍토, 주제의 정향에 있어 아무리 다르다 하여도, 이들 모두는 경향적으로 사적 개인들간에 벌어지는 지속적 토론을 조직화했다.
특히 눈에 띄는 강점은 바로 '성역없는 토론' '계급장을 뗀 토론'이 가능했다는 부분이었다. 역시 '공론장의 구조변동'에서 그 부분을 그대로 옮겨보자.
첫째, 지위의 평등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지위 전체를 도외시하는 일종의 사회적 교제가 요구된다. 서열의식에 반하여 경향적으로 동등함의 예외가 관철된다.
둘째, 이러한 공중의 토론은 이제까지 의문시되지 않았던 영역의 주제화를 전제한다.
셋째, 문화를 상품 형태로 전화시킴으로써 문화를 비로소 토론능력을 갖춘 문화로 만들어낸 동일한 과정이 공중의 원칙적 비폐쇄성을 가져온다. (107~108쪽)
소셜 미디어의 또 다른 특징은 ‘끼리 끼리’ 모이는 성향이 강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공적담론의 실종’을 우려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부분에선 특정 이슈에 대해 좀 더 깊이 있는 토론이 가능하다는 해석도 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커피하우스와 살롱의 시대엔 어땠을까? 미셸 스티븐스의 고전적 저작인 ‘뉴스의 역사’에 따르면 당시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흥미롭게도 커피하우스도 나름대로 다루는 주제가 명확했단 얘기다. 역시 그 부분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당시 런던은, 오늘날 수많은 잡지들이 쏟아져나와 잡지 홍수 시대를 이룬 것처럼, 수많은 커피하우스로 포화 상태를 이루었다. 그래서 커피하우스는 작은 규모의 특정 손님을 찾아야했는데, 그 때문에 증권에 관심 있는 손님이 모이는 커피하우스는 증권 거래소, 테니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주로 모이는 커피하우스는 테니스 코트라는 별명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뉴욕 커피하우스는 식민지 국가와의 무역에 대해 토론하는 것에 관심이 많은 남성들의 출입이 많은 곳이었다. 그리스 커피하우스는 학자들이 많이 출입했다. 연국인 커피하우스와 문학인 커피하우스도 있었다. ('뉴스의 역사' 51쪽)
스탕달의 ‘적과 흑’이 그리는 세계는 암울하다. 신분의 벽이 강하게 작용하는 폐쇄된 사회다. 굳이 따지자면 나폴레옹 몰락 이후 프랑스 전역을 강타한 반동 열풍의 영향도 적지 않게 작용했던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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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적과 흑’을 썼던 평민 스탕달은 파리의 살롱 문화에서 정신적인 자유를 만끽했다. 우리에겐 백과전서파로 널리 알려진 평민 디드로 역시 살롱의 스타였다.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 변동’은 바로 그 자유의 시대에서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그 논의에서 우리는 21세기 소셜 미디어의 전형적인 모습을 읽어낼 수 있다. 그게 고전의 힘이요, 위대한 학자의 통찰력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