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원래 소아과 의사가 꿈이였다. 큰 돈을 벌 욕심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1조원 대 회사를 운영하는 경영인이 됐다. 어릴 적에 의사를 로망으로 삼은 건 집안 영향이 크다. 외할아버지가 서울대 소아과 과장이었고, 친할아버지도 의사였다.
하지만 의사가 되려던 그는 고등학교때 이 꿈을 접었다. 스키를 타다 부상을 입었는데, 수술하는 걸 보니 의사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정보화를 도입한 KCC정보통신의 이상현 대표(부회장) 이야기다.
KCC는 12일 창립 50주년을 맞는다. KCC정보통신 회장이자 그의 부친인 이주용 회장이 설립한 KCC정보통신은 딱 50년전인 1967년 10월 12일 설립됐다.(당시 이름은 한국전자계산소. 국내 처음으로 소프트웨어(SW) 기업과 시스템통합(SI)기업이 탄생한 것이다.
‘국내 1호 SW기업’이자 ‘국내 1호 SI기업’인 KCC정보통신은 지난 50년간 주민등록전산화를 비롯해 무수히 많은 정보화 사업을 수행하며 대한민국 정보화 역사를 써나갔다. 컴퓨터(대형)를 우리나라에 처음 들여온 것도 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이다. 이 회장은 미국 IBM 입사 ‘한국인 1호’로 컴퓨터와 그의 인생 이야기를 다룬 책 ‘반세기 컴퓨터와 함께한 나의 인생’을 2007년에 발간하기도 했다.
창립50주년 행사 준비로 분주한 이상현 KCC정보통신 대표를 12일 강서구 염창동 본사에서 만나 회사의 지난 50년과 앞으로의 50년을 들어봤다. 현재 이 대표는 자동차 딜러가 주력인 KCC모터 대표와 KCC 계열사를 총괄하는 지주회사인 KCC홀딩스 대표도 맡고 있다.
“아버지한테 물려 받을때 200억대 규모였는데 지금은 1조원대(KCC정보통신과 KCC모터스 매출 포함)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며 감개 무량한 표정을 지은 이 대표는 “10년 뒤인 창립 60주년때는 IT매출을 현재보다 3배 정도 더 끌어올리겠다”고 강조했다.
대한민국 정보화의 산 증인인 KCC정보통신의 50주년 기념식은 12일 오후 6시 드래곤시티 컨벤션센터 3층 그랜드볼룸에서 열린다. 기념식에는 이홍구, 이수성 전 국무총리와, 양승택 전 정보통신부 장관 등 이주용 회장 지인과 조현정 한국소프트웨어산업협회 회장 등이 참석해 자리를 빛낸다.
■1967년 10월 12일 설립한 한국전자계산소가 전신
-KCC정보통신 50주년을 축하하다. 설립 당시를 이야기 해달라.
"처음에 설립할 때 이름은 한국전자계산소였다. 당시만해도 컴퓨터를 모르던 때다. 컴퓨터를 탁상용 전자계산기로 생각하고, 주판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이다. 그러니 아버님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아버님 회고록에 따르면 우리나라 컴퓨터 1호는 IBM기종(IBM1401)이 아니라 후지쯔 기종이다. 후지쯔 패콤(FACOM222)이 IBM1401보다 한달 보름 먼저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가동도 더 빨랐다. 생산성본부에 설치됐다. 당시 생산성본부에 근무하던 아버님이 컴퓨터 교육 등의 필요 때문에 독립해 세운 것이 한국전자계산소다."
-그동안 숱한 정보화 사업을 수행했다. 기억에 남는 사업은.
"회사로는 1975년 맡은 정부의 주민등록 전산화 사업이다. 1963년 주민등록법이 제정됐지만 당시까지 주민등록 자료를 종이 파일로 관리하고 있었다. 미국에는 소셜 시큐리티 넘버(Social Security Number) 라는게 있다. 미국은 이 번호로 한 사람의 출생부터 사망까지를 관리한다. 주민등록 전산화 프로젝트는 이와 견줄만한 마스터 파일을 만드는 초대형 정보화 사업이였다. 일본도 못한 거다. 새마을호 승차권 정산발매와 태국철도청 수출 프로젝트도 의미가 있다.
최근에는 계열사인 시스원이 구축한 출입국관리시스템이다. 몽골에 수출도 했다.지난 9월에는 대만에서 열린 세계정보기술서비스연맹(WITSA) 정보기술 총회에서 ‘2017년도 국제정보화상 대상’도 받았다.
내 개인적으로는 90년대 중반 수행한 ‘BC카드 다운사이징 프로젝트’다. 진짜 힘들었다. 당시는 다운사이징이 컴퓨팅 대세였다. 메이저 금융사로는 처음으로 시행하는 다운사이징 프로젝트였다. 프로젝트 금액도 상당했다. 관심이 컸고, 모두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보람이 컸지만 너무 고생을 많이 했다. 이가 갈릴 정도였다(웃음). 다시하라면 못할 것 같다. 분당 재생 병원 프로젝트도 기억에 남는다. 처음으로 분당에 디지털 병원을 구축하는 거 였다. CT, MRI 자료 등을 PC로 전송하는 거 였는데, 지금이야 보편화했지만 당시만해도 꽤 진보한 개념이였다. 그런데 의사들 요구가 저마다 달라 고생했다. 집을 다 지었는데, 여러 사람이 와서 이렇게 고쳐달라 저렇게 고쳐달라 하는 꼴이었다. "
이 대표는 경기고와 서울대 전자공학과(85학번)를 나왔다. 대학 졸업후 삼성전자에 들어가 1년 8개월간 휴대폰 해외 영업을 했다. 이후 1991년 KCC에 조인, 1995년 4월에 대표이사 전무가 됐다.
■대학 졸업후 삼성서 휴대폰 해외 영업도
-전자공학을 전공했는데 휴대폰 해외 영업을 했다. 매칭이 잘 안된다. KCC정보통신에 들어갈 당시는 어땠나.
"전자공학을 전공했지만 공대보다는 문과 쪽이 내 적성에 더 맞았다. 집안에 의사가 많아 어릴적에 의사를 천직으로 생각했는데 고3때 스키를 타다 팔이 부러졌다. 수술하는 거 보니 의사는 아니다 싶었다. 의사를 포기하니 갈 곳이 없었다. 공부는 꽤 잘했다. 그래서 들어간게 서울대 전자공학과다. 차석으로 들어갔다.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가 동기다.
공대에 들어가보니 ‘수학 천재’들이 너무 많았다. 공학 수학 듣고 “빨리 자리를 비켜줘야겠구나”하는 생각을 했다(웃음). 공대는 전공 필수만 듣고 법학, 경영, 경제 등 사회과학 수업을 들었다. 대학 다닐때 MBA를 거의 다 했다.(웃음).
대학 다닐때는 KCC에 들어갈 생각을 안했다. 우리 아버님이 좀 강하시지 않나. 아버님도 원하지 않았다. 아버님 주위에 잘 받쳐주는 든든한 직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회사에 문제가 생겼다. 당시 회사는 성장 열매를 직원들과 나누기 위해 인센티브와 별도로 이익분담금 제도를 도입, 이익 중 절반을 직원에게 나눠줬다. 기여도에 따라 차등을 줬다. 첫해에 30억원의 이익금 가운데 15억원을 직원에게 돌려줬다. 당시 30억원은 엄청난 액수였다. 기여도가 높은 직원이 받은 이익 공유금은 서울에서 아파트를 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금액 차등에 반발한 이들이 노조를 설립, 회사가 갈등에 휘말렸다.
노조는 이익금을 모두에게 똑같이 분배하라며 아버지의 대표이사 사퇴를 요구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물러났다. 여기에 아버지가 믿고 있던 두 분 중 한명이 간경화로 쓰러졌고, 다른 한 분은 아버지가 국내에 없는 틈을 타 핵심 직원을 데리고 나가 다른 회사를 차리는 일이 발생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1991년에 KCC에 발을 담았고, 영국(워릭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것도 당시 우리가 하던 프로젝트와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1993년에 기조실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경영에 참여했다. 회사 상황이 매우 안좋을 때 였다. 직원 400여명중 절반 정도를 내보냈다."
■1978년~1992년이 전성기...숱한 어려움도
-50년 역사 중 언제 가장 좋았는지
"황금시대를 꼽으라면 1978년부터 1992년까지 10여년간이다. 프라임이라는 미국 회사가 만든 컴퓨터 하드웨어를 팔았는데 장사가 잘 됐다. 컴퓨팅 환경이 오픈시대로 바뀌는 시기였다. 병원, 공공기관, 금융기관 등 약 500곳에 공급했다. 여기에 주민증 사업하면서 공급한 데이터 입력기도 히트를 쳤다. 회사 상황이 진짜로 좋았다."
-제일 어려웠던 때는
"위기는 여러번 있었다. 1992년 7월에 미국 프라임이 망했는데 덩달아 우리도 힘들어졌다. 인원을 절반으로 줄였다. IMF때도 마찬가지다. 죽을 고비를 넘겼다. 주력 고객인 은행들이 잇달아 합병, 고객이 그만큼 줄었다. 여기에 IMF 안 온다던 정부말을 믿었는데 결국 IMF가 와 큰 금액의 환차손까지 입었다. 그야말로 죽을 지경이었다."
-한때 SI사업에서 멀어져 ‘외도 아닌 외도’를 했는데...
"시장 상황이 어려운데다 SI사업에 환멸을 느낀 일이 몇가지 발생했다. 모 금융사의 글로벌 프로젝트를 하는데 발주처가 말도 안되는 요구를 했다. 당시 1등하던 SI기업과 손잡고 들어오라고 했다. 그 SI기업은 아무 하는 일 없이 20% 이상의 이익을 달라고 요구 했다. 우리 솔루션인데 왜 대형 SI랑 같이 들어가냐고 발주처에 항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또 다른 은행은 PR프로젝트를 내면서 우리에게 제안요구서를 안줬다. 여기에 결정적인 일이 터졌다. 두개 기관이 합병한 모 공공기관이 유지보수 사업을 발주했는데, 발주액이 커 1~3등하는 대형 SI업체들이 모두 참여했다. 통합하기 전 한 기관은 우리가 유지보수를 했었다. 그래서 당연히 우리도 참가했다. 결국 말도 안되는 가격을 써낸 모 대형 SI업체가 사업을 수주했다.
SI 사업에 환멸이 왔고, 쉬어 갈겸 해서 이후 2012년까지 한 10년간 임직원들에게 “힘빼고 가자”고 말했다. 자동차 딜러 사업에 진출한 것도 이 시기다. 자동차 분야 매출은 올해 처음으로 1조원을 넘을 것 같다. 자동차 분야 매출이 많다 보니 부업이 본업이 된 것 같다.(웃음)"
■“비즈니스는 학다리...계속 변해야”
-한국정보산업연합회회장을 맡는 등 다시 IT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데...
"대형 SI업체들의 공공시장 진입을 막은 SW산업진흥법이 2013년에 생기면서 다시 신발끈을 매고 있다. 인력도 충원했고 매출도 1천억 원대로 다시 올라섰다. 1997년에 1천억 원대 기록하고 하락했었는데 다시 1천억대를 회복했다.
정보산업연합회장은 2016년 11월에 맡았다. 컴백해보니 예전보다 시장 상황이 더 안좋은 느낌이다. 과거엔 대형 SI 3개사가 시장을 장악했었는데 지금은 춘추전국시대가 된 느낌이다.
사업환경도 이전과 다르다. 예전에는 프로젝트 총괄하는 우리 같은 SI회사들이 갑이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우리는 을이자 병이다. 고객한테는 영원한 을이고, 여러 협력사 눈치를 봐야 하는 병이기도 하다. 이제 협력사들한테 함부로 못한다. 업무 지시나 근태 지시를 할 수가 없다. 정부 감독도 강해졌다.
건설과 SI가 비슷한게 많다. 하지만 건설은 노가다라고하지만 프로젝트 관리 기법이 IT보다 낫다. 건축은 설계 변경시 대가를 지불한다. IT는 이런게 없다. 최근 과기정통부가 이를 수정한다고 하니 기대를 갖고 있다. SI업체에 비해 자체 솔루션을 갖고 있는 패키지SW업체들은 상황이 나아 보인다. 약방의 감초처럼 프로젝트에 국산 SW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동차 이야기 좀 해보자. 자동차 쪽 사업은 어떤가.
"최근 독일 프랑크프르토에서 열린 자동차 쇼를 참관하고 왔다. 많이 놀랐다. 자동차와 IT가 하나가 되가고 있는 걸 목격했다. IT회사들이 잇달아 세미나를 열고 전자화되는 자동차 시대를 대비하고 있더라. 알리안츠 같은 보험회사도 자율주행차 시대가 되면 보험 정책이 어떻게 바뀌는 지 발표했다. 세상이 급격히 바뀌는 걸 실감했다.
애플하고 구글이 핸드폰 운용체계(OS)로 핸드폰 시장을 장악했는데, 자동차 시장도 이렇게 될 것 같다. 구글과 애플에 하드웨어를 만드는 자동차업체들이 종속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이렇게 바뀌는 세상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이다. 우리도 자동차 분야에 꽤 많은 돈을 투자했다."
■IT역할 커져...10년후 IT분야 매출 현재보다 3배 정도 향상
-격량의 50년을 지나왔다. 앞으로 50년은 어떻게 보나
"처음 사업을 물려받을 때 외형이 200억 원이였다. 이걸 내가 10배로 키워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외형이 50배 정도로 커졌다. IT쪽만 보면 KCC정보통신이 1000억 원, 계열사인 시스원이 800억 원 정도 한다. 작년에 IT와 자동차 합쳐 전체 매출이 1조 원 정도였다. 올해는 자동차만 1조 원이 넘을 것 같다.
대기업이 되니 어려운 점도 많다. 보통 중소기업을 졸업하면 몇년의 유예를 두고 규제를 받는데 우리는 바로 받은 것 같다. 1천억, 2천억, 3천억 회사가 계속 커져 1조원 회사까지 가야하는데 여러 규제가 이를 방해하고 있다. 이런 규제는 성장을 거부하는 피터팬 신드롬을 만든다.
임원들한테 힘빼고 가자고 2003년 말하면서 강조한게 박스(하드웨어)매출을 줄이고 서비스 매출을 늘리자는 거였다. 어떤(애니) 서비스도 제공하는 프로바이더가 되자는 것도 강조한다.
IT역할이 점점 커지고 있다. 이전엔 단순 보조였는데 지금은 모든 프로세스와 조직에 영향을 끼치는 핵심역할을 한다. 우리 자동차 사업만 봐도 그렇다. 고객 관리에 IT가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고 생각하면 아찔하다. 앞으로 자동차 판매는 온라인에서 활발히 이뤄질 것이다. 온라인은 IT를 말한다. IT는 이제 보조가 아니라 메인이다. IBM과 손잡고 블록체인 사업을 모색하는 등 AI와 블록체인 같은 신기술 수용도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기업은, 경영은 한자리에 머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계속 변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비즈니스는 학다리'라고 말한다. 학다리 자세로 서 있어 봐라. 오래 못 서 있고 넘어지려 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 스카이 퐁퐁처럼 옆으로 움직여야 한다. 마찬가지다. 비즈니스도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 계속 움직이고 변해야 한다. 노키아가 제지로 출발했지만 세계최대 핸드폰 회사가 됐다가 지금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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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와 IT가 합쳐지고 있는데 여기서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보고 있다. 구체적 숫자를 제시하기는 어렵지만 하지만 창립60주년 행사를 하는 10년 후에는 IT분야 매출을 현재보다 3배 정도 끌어올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