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대법원엔 ‘4의 규칙’(Rule of 4)이란 것이 있다. 상고 신청이 받아들여지려면 전체 대법관 9명 중 4명의 찬성을 얻어내야 한다는 원칙이다. 그래야 대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다.
‘4의 규칙’은 엄격한 상고허가제를 시행하고 있는 미국 대법원의 근간이나 다름 없다. 무분별한 상고를 막고 대법원이 꼭 검토해야 할 가치가 있는 사건만 선별해서 다루기 위한 조치다.
미국에서 이 원칙이 확립된 건 윌리엄 태프트 대법원장이 재직하고 있던 1925년이다. 태프트는 당시 ‘법원조직법’을 만들면서 대법원 상고허가제를 확립했다. 린다 그린하우스가 쓴 ‘미국 대법원’(The U.S Supreme Court: A Very Short Introduction)엔 상고허가제 도입 이유가 잘 나와 있다.
“대법원은 특정 소송 당사자의 잘못을 고치는 역할을 하는 기관이 아니다. (대법원이) 어떤 결정을 할 땐 원칙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태프트 대법원장은 아예 “개인간 분쟁에서 정의를 세우는 덴 두 번의 재판으로 충분하다”는 말도 남겼다.
■ 대법원 판사 4명 찬성해야 상고심 열려
100년 가까이 이어져 온 상고허가제는 이제 미국 대법원의 기본 토대가 됐다. 그래서 미국에선 항소심 판결이 사실상 최종적인 법리적 판단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표적인 것이 구글과 오라클 간의 자바 소송이었다.
그런데 삼성은 지난 해 쉽지 않은 일을 해냈다. 디자인 특허가 쟁점이 된 1차 특허소송 상고신청에 성공한 뒤 본 재판에서도 사실상 승소 판결을 이끌어낸 것. 미국 대법원이 120여 년 동안 디자인 특허 관련 재판을 한 적이 없다는 점이 상고허가의 중요한 근거가 됐다.
당시 삼성은 본 재판에서도 ‘일부 디자인 특허 침해 때 전체 이익 상당액을 배상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판결을 받아냈다.
삼성이 또 한 차례 대법원 상고심에 도전한다. 이번엔 ‘밀어서 잠금 해제(721 특허)’ ‘데이터 태핑(647 특허)’ ‘단어 자동 완성(172 특허)’ 등 애플 상용 특허 세 건 침해건을 다루는 두 회사간 2차 특허 소송이다.
이 소송 1심에서 패소했던 삼성은 항소심에서 멋진 역전승을 이끌어냈다. 핵심 쟁점이던 ‘데이터 태핑 특허’에 대해선 무혐의 판결을 , 나머지 두 개 특허는 특허 무효 판결을 받아낸 것. 애플과 미국에서 오랜 특허 소송을 벌였던 삼성이 처음으로 이뤄낸 완벽한 승리였다.
하지만 이 판결은 항소법원 전원합의체 재심리(en banc)에서 뒤집어졌다. 9인 재판부가 애플 요청으로 다시 심리한 결과 1심 판결을 그대로 유지하는 판결이 나온 때문이다.
삼성은 지난 3월 항소법원 전원 합의체 판결에 대해 불복하면서 대법원에 상고신청서를 접수했다.
■ 삼성 "법적 자명성 흔들" vs 애플 "특허법 테두리 내의 공방"
삼성은 대법원이 애플과 2차 소송 상고심을 열어야 할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제시했다.
첫번째는 법적 자명성 부분이었다. 미국 특허법 103조는 “그 발명이 이루어질 당시에 선행기술과의 차이가 그 기술 분야에서 통상의 기술을 가진 자에 의해 자명한 것이라면 특허를 받을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기준을 적용할 경우 데이터 태핑을 비롯한 애플 특허 세 건에 문제가 적지 않다고 삼성은 주장했다. 특히 삼성은 전원합의체 진행 과정 자체도 문제가 많았다고 강조했다.
두 번째는 특허 침해 배상 판결을 받으려면 특허 침해와 회복할 수 없는 피해 간에 긴밀한 인과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꼽았다. 항소법원 전원합의체는 이 부분에 대해 간과했다는 것이 삼성 주장이다.
마지막 세 번째로는 침해 범위 문제였다.
특허 청구항 모두를 침해했을 경우에 한해 특허 침해가 인정된다는 것이 대법원의 이전 판례였다. 하지만 항소법원 전원합의체는 이런 부분을 간과했다고 삼성은 주장했다.
그러자 애플은 지난 22일 대법원에 삼성의 상고신청을 받아들여선 안 된다는 취지의 반박 문건을 접수했다.
애플은 항소법원 전원합의체 재심리 요청 때의 법리를 거의 그대로 되풀이했다. 우선 삼성의 손을 들어줬단 항소법원 3인 재판부의 판결에 하자가 많았다는 주장을 먼저 내세웠다.
따라서 항소법원 전원합의체가 지난 해 10월 항소심 판결을 뒤집은 건 잘못된 판결을 원위치 시킨 것이란 게 애플의 논리다.
특히 항소법원이 삼성 승소 판결을 할 당시 ‘1심에서 논의된 사실을 토대로 법리적 판단을 해야 한다’는 또 다른 원칙을 어겼다는 게 애플의 일관된 주장이다.
미국에선 1심 재판 때만 새로운 사실을 갖고 공방을 벌이도록 돼 있다. 항소심부터는 1심 재판부가 법 적용을 제대로 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만 심사한다. 따라서 1심 재판 때 거론되지 않은 사실을 근거로 판결을 하지 못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두 회사는 대법원 접수 문건에서 상고허가제의 취지에 맞춘 주장을 펼치는 점이 눈길을 끈다.
단순히 잘못된 판결을 했다는 주장만으론 대법원이 개입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삼성은 항소법원 전원합의체가 ‘법적 자명성을 뒤흔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대로 놔둘 경우엔 법적 안정성이 흔들릴 우려가 있기 때문에 대법원이 바로 잡아줄 필요가 있다는 주장인 셈이다.
반면 애플은 대법원 접수 문건을 통해 “특허법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굳이 대법원이 나설 가치가 없는 사건이란 얘기다.
애플은 아예 “항소법원 전원합의체는 특허법의 근본 쟁점을 전혀 변경하지 않았다”고 되풀이 강조했다. 애플은 아예 “(전원합의체 판결에 반대했던) 3명의 판사들도 확립된 법을 적용했다는 점엔 동의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 6월 대법원 회기 종료…그 전에 결정 나올까
삼성이 상고신청서를 접수하고 애플이 반대의견을 내놓음에 따라 이제 공은 미국 대법원으로 넘어갔다. 삼성과 애플의 상고신청이 받아들여질 지는 전적으로 미국 대법원의 손에 달렸다.
현재로선 언제쯤 상고신청 수용 여부에 대한 결정이 나올 지도 분명하진 않다. 다만 한 가지 추론을 해 볼 순 있다.
미국 대법원 개정기는 6월말 끝난다. 그런 다음엔 대법원 판사들은 9월말까지 긴 하계 휴가에 들어가게 된다. 새로운 개정기는 10월초 시작된다.
통상적으로 미국 대법원은 회기 내에 접수된 사건을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지난 3월 접수된 삼성의 상고신청 여부에 대한 결정은 6월 말 이전에 나올 가능성이 많다.
상고 신청이 받아들여질 경우 두 회사간 상고심은 다음 개정기가 시작되는 10월 이후에 열리게 된다. 상고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사건은 곧바로 항소법원으로 파기 환송된다.
그렇다면 삼성의 상고신청은 받아들여질까?
지난 1차 특허소송 땐 미국 대법원의 개입 필요가 명확했다. 양탄자 시대에 확립된 디자인 특허 관련 배상 기준을 한번쯤 손 볼 때가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은 그 때에 비해선 상황이 조금 복잡한 편이다. 따라서 항소법원 전원합의체가 특허법의 근간을 뒤흔들 이슈를 제기했는지 여부가 핵심 판단 기준이 될 가능성이 많다.
밀어서 잠금해제나 단어자동완성처럼 효력이 사실상 끝난 특허권에 대해 침해를 논하는 것이 타당한 지 여부도 쟁점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이와 함께 대법원이 삼성 주장대로 특허법에서 ‘선행기술’에 대해 좀 더 명확한 잣대를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경우엔 상고 신청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워터게이트 특종 보도를 했던 밥 우드워드는 ‘지혜의 아홉기둥’이란 방대한 저술을 통해 미국 대법원 판사들의 판결 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한 적 있다. 그 책에 따르면 대법원 판사들은 때론 자신들이 새로운 판례를 만들어내기 위해 다른 판사들을 설득하기도 한다.
상고허가 신청에 필요한 4명의 판사를 확보하더라도, 승소에 필요한 한 명을 더 가세시키기 힘들다고 판단할 경우엔 아예 상고신청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미국 대법원 진보, 보수의 잣대인 동성애나 낙태 문제 등을 다룬 사건일 경우 특히 그렇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그런 민감한 쟁점은 아닐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어떤 결정이 나오든 전원합의로 판결이 나올 가능성도 적지 않을 것 같다.
(덧글)
앞에서 소개한 윌리엄 태프트란 이름이 다소 친숙한 분들도 있을 것 같다. 태프트 대법원장은 우리가 한국사 책에서 만나는 이름과 동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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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한국 지배란 슬픈 역사의 근거가 된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미국 쪽 협상 당사자가 바로 윌리엄 태프트였다. 당시 윌리엄 태프트는 루즈벨트 대통령 특사였다.
따라서 윌리엄 태프트는 미국 사법역사의 한 획을 그은 위대한 대법원장이었지만, 우리에겐 '일제 지배'란 아픈 역사를 안겨준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