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년은 애플의 시대였다. 2007년 내놓은 아이폰을 앞세워 ‘모바일 시대’를 지배했다.
애플 파워의 핵심은 ‘생태계’였다. 생물학에서나 쓰였던 이 단어는 애플 이후 비즈니스 상용어로 바뀌었다.
생태계와 함께 애플의 또 다른 무기는 ‘디자인’과 ‘인터페이스’였다. 특히 물리적 키보드를 깔끔하게 치워버린 터치스크린 UI는 아이폰 파워를 극대화한 ‘회심의 한 수’였다.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한 생태계 안에선 애플을 당할 자가 없다. 그런데 이젠 조금씩 경기 규칙이 바뀌려 하고 있다. 그럴 경우엔 얘기가 달라진다.
굳이 비유하자면, 프로복싱의 시대가 가고 종합격투기 시대가 열리려는 조짐이 보이고 있단 얘기다.
그 상징적인 무대가 올 초 열린 CES 2017이었다. 인공지능(AI)과 사물인터넷(IoT) 등이 중심이 된 4차산업혁명 시대는 애플이 아닌 다른 기업이 주도할 수도 있다는 단초를 보인 행사였다.
그리고 ‘애플 아닌 다른 기업’으로 유력하게 떠오른 업체가 바로 아마존이었다. 알렉사란 뛰어난 음성인식 플랫폼을 갖고 있는 아마존은 행사 기간 내내 화제가 됐다.
외신들에 따르면 LG, GE, 포드 등이 알렉사를 탑재한 기기를 선보였다. 알렉사는 스마트폰 시대의 상징인 ’터치스크린 UI’ 대신 ‘제로 UI’란 새로운 시대 흐름을 선도하고 있다.
제로 UI란 스크린이 없는 UI를 의미한다. 손 대신 말로 각종 기기를 작동시키는 상황을 묘사한 말이다. IoT와 인공지능이 결합된 시대를 대표하는 키워드다.
■ CES 2017에서 '알렉사 파워' 과시
숫자로 드러난 것만 봐도 아마존 음성 플랫폼의 파워는 강력하다. 시장조사업체 포레스터리서치는 지난 해말까지 아마존 에코 기기가 600만개 판매된 것으로 추산했다. 에코는 알렉사를 탑재한 아마존의 블루투스 스피커다.
미국 IT 전문매체 비즈니스인사이더는 “에코 시장은 스마트폰과 비교하면 여전히 미미한 수준이다”면서도 “하지만 이 시장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아마존은 어떻게 제로UI 시대를 주도할 수 있었을까?
비즈니스인사이더는 아마존 에코 성공 비결 중 하나로 ‘과장하지 않은 점’을 꼽았다. 음성인식 기능을 탑재한 아마존 에코가 처음 등장한 것은 2014년이었다.
그 무렵 음성인식 기술의 대명사는 애플 시리였다. 2011년 아이폰4S에 첫 탑재된 시리는 시중의 온갖 화제를 독점했던 스타였다.
하지만 아마존은 ‘시끄러운 홍보’ 대신 조용한 전진을 택했다. 그리고 알렉사에 대한 긍정적인 입소문이 확대되자 그런 흐름에 맞춰 새로운 기능들을 추가했다.
현재 알렉사는 우버, 트위터, 네스트 등을 비롯한 각종 앱들과 연결되는 수 천 가지 기능을 갖고 있다고 비즈니스인사이더가 전했다.비즈니스인사이더는 이런 상황에 대해 “’기괴한 물건’에 불과했던 에코가 어느날 갑자기 생태계로 진화했다”고 평가했다.
아마존은 또 자신들의 상거래 생태계에 알렉사 음성인식 기술을 자연스럽게 녹여 넣었다.
다른 업체들은 쉽게 필적하기 힘든 아마존의 장점은 또 있다. 아마존은 굳이 알렉사를 탑재한 기기 판매를 통해 돈을 벌 필요가 없다.
자신들이 구축하고 있는 강력한 상거래 생태계의 입문자 역할만 해도 회사 전체적으론 남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전자책 리더기인 킨들을 싼 값에 내놓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알렉사란 강력한 음성인식 기술을 탑재한 아마존 에코는 현재 ‘가장 선호하는 IoT 기기’로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올해 CES에서 유독 아마존이 관심을 모은 건 이 때문이다.
■ 구글, 안드로이드+검색 파워 앞세워 맹추격
시장의 흐름이 그 쪽이라면 다른 기업들도 그냥 바라보고만 있을 가능성은 제로다. 실제로 구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MS) 같은 글로벌 기업들은 경쟁적으로 이 시장을 추적하고 있다.
이들의 당면 과제는 ‘아마존이 IoT 시장 문턱을 지배하는 상황’을 막는 것이다. 구글이 구글 홈을 내놨을 때 외신들이 ‘아마존 에코 대항마’라고 불렀던 것도 이런 상황 때문이다.
비즈니스인사이더는 현재 상황에서 아마존의 강력한 대항마는 구글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구글은 아마존이 갖지 못한 두 가지 장점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검색과 안드로이드다.‘제로 UI’ 시대가 되면 ‘잘 찾아주는 기술’이 더 중요해질 가능성이 많다. 그런 점에서 구글이 20년 가까이 축적한 검색 기술은 엄청난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여기에다 구글은 최소한 양적인 면에선 모바일 시장 지배자다. 현재 전 세계에 깔려 있는 안드로이드 기기만 15억 대에 달한다.
비즈니스인사이더는 “이론상으론 이 모든 기기에 구글 어시스턴트를 탑재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코타나란 음성인식 비서를 갖고 있는 MS의 행보도 예사롭지 않다. 구글이 검색과 모바일이란 키워드를 경쟁 포인트로 내세우고 있다면 MS는 윈도10과 비즈니스 소프트웨어 경쟁력이다.
비즈니스인사이더는 “MS는 지난 수 십년 동안 오피스, 다이나믹스 등을 앞세워 비즈니스 생산상 소프트웨어 시장 지배자로 군림해왔다”고 강조했다. 이 부분이 아마존에 대항할 MS의 경쟁 포인트가 될 수도 있단 얘기다.
■ 시리로 음성비서 대중화시킨 애플, 여전히 고민
가장 요란하게 음성인식 비서를 채용한 건 애플이었다. 지난 2011년 아이폰4S에 시리를 탑재하면서 시장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실속 면에선 다소 아쉬운 편이다. 아마존을 비롯한 경쟁자들이 이 부문에서 한 발 한 발 전진해갈 때 애플은 제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애플뮤직, 비츠, 시리 같은 다양한 소품들을 갖고 있긴 하지만 ‘꿰어야 보배’다. 아마존 알렉사 같은 것들이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애플이 뛰어들 여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애플의 거실점령 야심작 중 하나인 홈키트(HomeKit)는 여전히 만족스런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터치스크린’과 ‘앱스토어 생태계’로 지난 10년을 지배한 애플 입장에선 고민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애플에겐 또 다른 한 방이 있다. 따지고 보면 애플이 남보다 한 발 앞서 시장을 개척한 적은 별로 없다. 대부분 살짝 뒤따라가다가 결정적인 순간 시장 패러다임을 바꾸는 전략을 택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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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비유하자면 선두그룹에 살짝 뒤쳐져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 스퍼트를 하는 쇼트트랙 스케이팅 선수 같은 전략이었다.
과연 애플은 이번에도 이런 전략에 성공할 수 있을까? IoT와 음성인식 기술이 지배하는 제로UI 시대를 지켜보는 또 다른 관전 포인트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