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는 말이 있다. 바둑 고수는 상대의 돌 놓는 손 맵시만 봐도 그 실력을 간파한다고 한다. 씨름 고수는 샅바 잡는 것만 봐도 상대를 짐작할 수 있단다.
IT업계에도 고수가 많다. 이들은 한 줄 짠 코드만 봐도 상대의 실력을 대번에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개발자 역량을 정량적으로 평가하고 이를 제도화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고 있어 의문이다. ‘SW기술자 등급체계’가 폐지된지 4년만에 ‘IT인력 역량인정체계(ITSQF)’라는 또 다른 평가 기준이 등장한 것이다.
한국SW산업협회는 “(개발자)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체계”라고 ITSQF를 소개하고 있다. ITSQF는 학력, 자격, 현장 경력, 교육훈련, 대회 수상 경력 등을 평가 기준으로 반영해, SW기술자 개인의 역량 수준을 직무별로 분류했다. 역량 수준은 기능사부터 마스터까지 9등급으로, 직무는 IT컨설턴트, IT프로젝트관리자, SW아키텍트 등 12개로 나눴다.
협회는 이미 폐기된 SW기술자 등급체계와 새로 마련할 ITSQF와 차이가 있다고 강조한다. 기존 SW기술자 등급체계는 학력과 경력 중심의 등급관리 체계인데다 직종별 차이를 구별하지 않지만, ITSQF는 평가기준을 다양화하고 직무별 특성도 고려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ITSQF를 바라보는 개발자들의 시선은 마뜩잖다. 개발자 역량을 등급으로 줄세우고 평가하겠다는 프레임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에 따라 실력이 천차만별이고 개인 역량에 따라 시장에서 다른 대우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실력을 정량적 기준으로 평가해 등급으로 매기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더욱이 등급을 평가하는 기준이 학력, 경력, 자격증, 교육훈련 같은 것이라니, 납득이 어렵다.
이 기준대로라면 하버드대를 중퇴한 마크저커버그는 고졸로 시작한 후 경력을 10년 정도 쌓았으니 이제 ‘중급 개발자’ 수준이다. 학력, 경력, 자격증, 교육 이수는 개인의 역량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인이긴 하나, 그 자체로 실력을 입증해주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등급 매기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한국SW산업협회는 SW기술자 등급제가 폐지됐지만, 여전히 SW사업대가 산정 등 민간시장에서 활용되고 있어 이를 대체할 역량평가체계가 필요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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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업대가 산정에 활용하라고 새로운 개발자 등급제를 만든 것은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처사다. 협회 스스로 최근 공공SW 사업의 대가 산정 방식을 결과물의 품질 위주로 바꾸겠다고 했다. 그 동안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됐던 투입인력 기준 산정 방식이 비효율적이란 비판을 반영한 조치다. SW의 가치를 투입된 인력으로 책정하고 있는 발주 관행을 바꾸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인데, 되레 등급제를 부활시키는 모순적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발주자도 이런 등급제에 의존할 필요 없을 만큼 IT에 대한 이해를 키울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일반적으로 IT분야 인력 시장에선 이런 등급 구분은 필요도 없고 쓰이지도 않는다. 면접이나 테스트로 충분히 실력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의 실력을 검증하는 것도 실력이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하지 않았던가. 발주자가 잘 알아야 이런 의미 없는 등급표를 믿고 개발을 맡기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