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세계 수준의 정보통신기술을 갖고도 원격의료를 방관하고 있다.”
마크 브리트넬 KPMG 글로벌 헬스케어부문 대표는 지난 7월26일 서울 테헤란로 삼정KPMG에서 한국의 원격의료 정책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 영국 국가보건서비스 사무총장까지 지낸 브리트넬은 이날 “미국 뿐 아니라 인도, 싱가포르, 중국 등도 원격의료에 뛰어들고 있다”고 강조했다.
ICT와 의료의 융합분야인 원격의료는 기존 보건의료 시스템을 보편적인 서비스로 혁신할 수 있는 시장으로 주목받고 있다. 원격의료가 4차산업혁명 시대의 핵심 신사업으로 꼽히는 건 이런 배경 때문이다.
의료-인프라 선진국인 일본, 영국, 독일 등이 다양한 방식의 원격의료 서비스로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 인도 등도 ICT 기술력과 시장 잠재력을 앞세워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
시장 전망도 밝은 편이다. 세계이동통신사업자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원격의료 시장은 1천600억 달러 규모로 성장했다. 조만간 1조 달러 시대를 열 것이란 전망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원격의료는 ICT 쪽에도 적잖은 성장동력이 될 전망이다. 2019년까지 원격의료와 관련한 기기 및 소프트웨어 시장 규모만도 29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관련 서버 및 장비 시장은 33억 달러, 모바일 헬스 시장은 1조5천억 달러까지 급성장할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스마트폰과 태블릿 이용자가 계속 늘면서 건강체크, 검진, 기초 진료 등 모바일 헬스, 모바일 원격의료 시장은 ‘황금알 낳는 거위’로 떠오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 원격의료, ICT 시너지 커…의료법 장벽 막혀 제자리
4차산업시대 기대주로 꼽히는 원격의료이지만 한국 상황은 암울하다. 2000년대 중반부터 대기업, 관련 SW업체를 중심으로 원격의료 연구개발 및 인력지원에 나섰지만 10년 째 걸음마도 떼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의료법이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이 원격의료를 위한 의료법 개정안은 두 차례나 발의됐다가 국회 회기 종료로 자동 폐기됐다. 이번 20대 국회 들어서도 정부안으로 재발의 됐지만 의료계의 반발 등으로 제대로 된 논의조차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미래창조과학부, 대통령까지 나서서 원격의료 사업을 국가 전략 사업화하고 또 국가적인 의료혁신을 도모하기 위해 힘을 쏟고 있지만, 의료법 개정은 요원한 상태다.
의료계와 일부 정치권에선 원격의료가 의료계 영리화를 부추길 뿐 아니라 개인정보 유출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고 있다. 대면진료만 허용해야 한다는 원칙론도 만만치 않다.
의료계는 원격의료가 의료 민영화 수순으로 보고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특히 군소 지역병원의 반발이 거세다. 원격의료가 초기엔 노인, 장애인, 도서 벽지 주민 등 병원에 가기 힘든 환자나 만성질환자, 입원 수술을 받은 재택 환자 등을 위해 도입된다지만 결국 대형병원만 살아남을 것이란 주장이다.
대형 병원을 선호하는 국민적 특성과 인프라나 시설 등에서 열악한 동네 의원이 원격의료가 보편화됐을 경우 살아남을 수 있겠냐는 논리다. 이미 일부 대형병원들이 대기업과 손잡고 원격의료를 준비하는 상황인 만큼 결국 자본논리에 따라 작은 병원들은 도태될 것이란 우려다.
의료계는 또 정부가 진행 중인 원격의료 시범사업 역시 안전성 면에서 신뢰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대한의사협회측은 “자체 연구한 원격의료 기술적 안전성 평가 연구에서 의료인간 원격의료 시범사업에서 적용중인 원격의료 시스템은 기술적 안전성 조치가 전무했다”며 “만약 해킹 등 환자 정보가 유출될 경우 최대 3000억 원의 피해가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협회 관계자는 "모든 의료는 대면진료가 원칙”이라면서 “원격의료는 오진 가능성이 있는 만큼 사람이 직접 보고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일본-중국은 미래 신시장 개척에 총력
의료계와 정치권의 반발로 제자리 걸음 중인 우리와 달리 일본, 중국 등은 이미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특히 일본은 의사와 환자 간 원격의료를 전면 허용했다. 일본 후생노동성이 지난해 8월 원격진료에 관한 고시를 개정한 덕분이다.
일본은 19년 전인 지난 1997년 12월 원격의료를 처음 허용했다. 당시엔 의료접근성이 떨어지는 낙도와 산간벽지 주민을 대상으로 한 제한적인 서비스였다.
후생노동성은 '정보통신기기를 활용한 진료'(원격진료)에 대한 고시를 제정해 대면진료 보완 차원에서 의사-환자 간 원격의료를 제한적으로 허용해 왔다. 대면진료를 원칙으로 하면서도 도서벽지 환자 및 재택 당뇨, 고혈압 환자 등 9가지 만성질환에 한해 원격의료를 허용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이후 3차례 고시를 개정하면서 허용 범위를 확대해 왔다.
일본은 2003년 3월엔 대면진료를 대체할 정도로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경우, 원격의료를 허용했다. 2011년 3월에는 동일본 대지진 이후 방사능 오염으로 의사가 없는 의료 소외지역이 늘어나면서 이 지역에 대한 원격의료까지 허용했다. 이어 지난해 8월 고시를 다시 개정해 의사-환자 간 원격의료를 전면 허용했다.
의료 및 IT 기반 인프라가 취약한 중국도 지난 3월 말부터 B2C 원격진료 서비스를 본격 시작했다. 환자가 병원을 직접 방문하지 않아도 모바일과 같은 IT기기 및 의료 장비를 통해 의사의 진료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중국에선 이미 B2B 원격의료가 정착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도시에 있는 3급 병원과 변두리 지역의 의료기관 간 원격의료가 자연스럽게 실시되고 있다. 3급 병원은 대형 종합병원으로, 수준 높은 전문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대학교와 과학 연구 임무를 수행하는 병원이다.
땅이 넓은 중국은 인구 1000명 당 의사가 1.5명에 불과한 현실을 원격 의료 도입으로 해소해나가고 있다.
의료계 뿐만이 아니다. 중국 대표 ICT 기업인 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 등도 인터넷 의료 시장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바이두는 검색 중 약 10%가 건강에 관한 검색인 것을 확인하고, 중국 최대 병원인 301병원과 합작해 공동 모바일 인터넷 의료 플랫폼 설립을 추진 중이다. 알리바바는 2014년 5월 자사 온라인 결제 시스템인 알리페이와 병원 서비스를 연계한 ‘미래병원’ 계획을 발표했다. 알리페이를 통한 의료기 결제 서비스, 회원 및 데이터 관리 시스템, 클라우드 컴퓨팅 노하우 기술을 응용한 인터넷 의료 서비스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목표다.
시장조사기관 아이리서치에 따르면 2009년 중국의 원격의료 시장 규모는 2억위안(약 351억원)에 불과했지만 2014년에는 109억위안(약 1조9000억원)으로 크게 성장했다. 또 작년에는 160억 위안(약 2조8000억원)을 넘어서며 해가 갈수록 고공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 규제 막힌 한국 기업들은 '밖으로, 밖으로'
ICT 기업들까지 자국 내 원격 의료 사업에 적극 뛰어드는 중국과 달리 우리 상황은 조금 복잡한 편이다. SK텔레콤, KT 등 주요 ICT 기업들은 상대적으로 규제가 약한 해외 시장 쪽에 눈을 돌리고 있다.
SK텔레콤은 분당서울대병원과 조인트벤처인 ‘헬스커넥트’를 설립하고 국내와 중국에서 각종 개인건강관리 사업을 하고 있다.
특히 SK텔레콤은 지난 2012년 9월 중국 의료기기 전문업체 티엔롱 지분 49%를 인수해 2대주주로서 경영에 참여했다. 이를 계기로 체외진단기기 시장 등 중국 헬스케어 시장에서 활동하고 있다. 2013년 6월에는 중국 북경의 대표적 의료법인인 비스타(VISTA) 사와 합작회사를 설립하고 2대 주주로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이 회사는 또 2014년엔 중국 선전에 ‘SK텔레콤 헬스케어 R&D센터’와 ‘SK선전메디컬센터’를 오픈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분당서울대병원, 이지케어텍과 컨소시엄을 통해 병원정보시스템 구축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KT는 연세의료원, 르완다 키갈리 국립대학병원과 함께 르완다 의료환경 개선을 목표로 하는 디지털헬스케어 시범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KT와 연세의료원은 시범사업에 ICT 기술이 집약된 모바일 진단솔루션과 의료역량을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KT는 소량의 혈액과 소변을 이용해 말라리아, 뎅기열, 에이즈, 신부전 등 질변을 진단할 수 있는 모바일 진단솔루션을 공급한다.
또 KT는 부산대병원, 부산테크노파크 등과 컨소시엄 구성해 알파라비 카자흐스탄 국립대학교, 서카자흐스탄 주립의대, 악토베주(州) 보건청 및 4개 유관기관과 카자흐스탄에서 디지털헬스케어 시범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 밖에 KT는 바이오인포매틱스 사업에도 힘을 쏟고 있다. 지난 2012년에는 유전체 분석 플랫폼 지놈클라우드를 출시했으며, 작년 9월에는 서울대와 생명정보 데이터분석 전문 연구센터를 열고 암 유전제 분석 알고리즘을 개발 중이다.
■ “원격의료 시대, 늦기 전에 대처해야”
ICT 업계와 정부는 의료법 개정으로 원격의료를 국가적인 주요 산업으로 키워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더 지체될 경우 글로벌 기업들에 밀려 도태될 수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복지부는 `보건산업 종합발전전략`을 확정, ICT 기반 보건의료 서비스를 강화하기 위해 원격의료 시범 사업을 확대하기로 했다. 국내 뿐만 아니라 페루, 필리핀, 중국, 몽골 등 해외 시범사업을 본격화 한다는 전략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지난 6월에 의료법 개정안이 20대 국회에 다시 제출된 상태”라면서 “반대 논리 중 하나가, 동네 병원들이 몰락 우려인데, 법에는 아주 예외적이 경우를 제외하고 동네 병원에서 원격의료를 하게끔 돼 있다. 이를 통해, 오히려 의료 전달체계가 개선돼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현재는 아주 복잡한 기술이나 고난이도가 아니라 기본적인 네트워크 망과 기술을 활용하는 것이 목표”라며 “ICT 기반의 의료와 헬스케어 시장까지 확산되면 새로운 산업 모델이 탄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래부 관계자는 “의료법 개정에 반대가 많아 현재는 시범사업들이 진행 중이고, 이를 미래부도 예산과 관리지원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창조경제와 4차 산업혁명 대응차원에서 원격의료를 위한 의료법 개정과 같은 규제 혁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관련기사
- 4차혁명 엔진될 '규제프리존' 반년째 답보2016.09.09
- 자율주행 '속도' 車업계, 규제에 시장 뺏긴다2016.09.09
- 국경 허문 4차혁명, 역차별부터 없애야2016.09.09
- 韓 인터넷은행 ‘골든타임’ 놓치나?2016.09.09
익명을 요구한 한 통신사 관계자는 “원격의료에 대한 찬반 논쟁이 너무 뜨겁기 때문에 기업이 앞에 나서 법 개정을 요구하기에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라며 “원격의료가 허용된다면 국내 ICT 기업들이 가진 네트워크 인프라와 다양한 기술들이 결합된 편리한 의료 서비스들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김승희 의원실 측은 “현재는 원격의료에 대한 찬반이 첨예한 상황이어서 양쪽의 입장과 뜻을 모아나가는 단계”라면서 “최근에는 환자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원격모니터링 하는 개념도 추진되고 있어 원격의료에 대한 우려나 거부감이 일부 줄어들 것으로 기대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