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1) 1982년 한국 프로야구
1982년 프로야구 개막과 함께 한국 야구계엔 두 거인이 탄생했다. 일본과 미국 야구 물을 먹었던 백인천과 박철순이다. 둘은 4할 타율과 22연승이란 경이로운 기록을 수립했다. ‘소인국’에 모습을 나타낸 ‘거인’ 걸리버 같은 존재였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수위타자 자리까지 올랐던 백인천은 아마 티를 채 벗지 못한 한국 선수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마이너리그이긴 하지만 미국 야구를 경험한 박철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던지는 너클볼은, 타자들에겐 만화에서나 볼 수 있던 마구였다.
그 때 이후 한국 야구에선 ‘4할 타율’과 ‘22연승’은 꿈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한국 야구에서 불세출의 스타가 사라졌단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 때 이후 선동렬, 최동원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투수는 또 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초기 프로야구의 거인들이었다.)
(장면2) 2007년 샌프란시스코
이번엔 스마트폰 시장으로 눈을 돌려보자. 2007년 1월 첫 공개된 아이폰은 ‘파괴적 혁신’의 대명사였다. 그 때까지 스마트폰의 상식으로 통했던 모든 것을 무참하게 박살내 버렸다.
무대에 선 스티브 잡스는 그 당시 유행하던 스마트폰을 보여줬다. 하나 같인 전면 절반이 키보드로 덮여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곤 곧바로 아이폰을 소개했다.
(물리적) 키보드가 사라진 매끈한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손가락이 있는 데 스타일러스는 왜 쓰냐?”는 비아냥과 함께 소개한 터치 기능도 압권이었다.
조금 뒤의 일이긴 하지만, 어설픈 성능 경쟁을 무력화시킨 앱스토어 역시 ‘파괴적 혁신’으로 모자람이 없었다. 통신기기였던 스마트폰을 정보 소비 플랫폼으로 한 단계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장면3) 2016년 한국 프로야구
지금 한국 프로야구는 순위 경쟁이 한창이다. 언뜻 보기엔 고만고만한 선수들의 개인 타이틀 경쟁도 뜨겁게 계속되고 있다. 1982년 같은 거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너무도 당연해보였던 4할 타율은 이젠 꿈의 영역이다. 9월8일 현재 타격 1위 최형우는 3할6푼7리다. 그마나 최근 몇 년 사이에 보기 드물게 높은 수준이란 게 눈에 띄는 정도다.
‘나오면 이기던’ 박철순 같은 투수도 찾아보기 힘들다. 22연승은 고사하고 한 해 22승을 하는 것도 버겁다. 두산 니퍼트 투수가 8일 승리투수가 되면서 19승째를 올리면서 20승 투수에 한 발 다가선 게 눈에 띄는 정도다.
그렇다면 1982년 백인천이나 박철순에 비해 지금 리그 정상급인 최형우나 니퍼트의 실력이 떨어지는걸까? 그건 아니다.
이 질문에 대해선 미국의 진화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가 잘 풀어낸 적 있다. 굴드가 1996년 출간한 '풀하우스'에 따르면 4할 타자가 사라진 건 타자의 기량 약화도 투수의 전문화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타자들의 전반적인 타격 능력이 향상된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게 야구계에서 널리 회자되는 '굴드의 가설'이다.
굴드 가설의 논리는 간단하다. 전반적인 타격 능력이 향상되면서 타자들 간의 표준 편차가 줄어들었다는 것. 4할을 웃도는 최고 타자 뿐 아니라 2할대 초반에 턱걸이하는 타자도 사라졌다는 것이 굴드의 설명이다.
결국 리그 전체의 수준이 올라가면서 4할 타율이나 22연승 같은 꿈의 기록은 더 이상 힘든 상황이 됐단 얘기다. 카이스트 정재승 교수가 한국 프로야구를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도 비슷했다.
(장면4) 2016년 스마트폰 시장
애플을 마지막으로 주요 스마트폰 최신 모델이 모두 공개됐다. 삼성이 지난 달 갤럭시 노트7을 먼저 발표했다. 어제 LG가 V20을 공개한 데 이어 오늘 새벽엔 애플이 아이폰7의 베일을 벗겨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 세 회사 모두 깜짝 혁신은 없었다. 적어도 2007년 기준으로 보면 그렇다.
아이폰7은 3.5mm 이어폰 잭을 없앤 대신 무선 헤드폰 ‘에어팟’을 공개했다. 듀얼 렌즈 카메라를 장착해 사진 성능을 대폭 향상시켰다.
방수 방진 기능이 추가됐으며 배터리 수명과 그래픽 처리 성능도 좋아졌다.
어제 공개된 LG의 V20은 오디오와 비디오 기능이 강점이다. LG 스스로 “프리미엄 스마트폰다운 부분을 전부 담았다”고 선언했을 정도다.
음향이나 카메라 부분에 대한 노력을 고객들이 인정해주길 기대한다는 바람도 함께 담았다.
삼성이 먼저 내놓은 갤럭시 노트7은 ‘홍채 인증’이 돋보였다. 엣지 디자인 역시 갤럭시 노트7의 자랑이다.
역대 최고란 평가를 받은 OLED 화면에다 전문가들이 인정한 최고 성능 폰이란 점도 매력이다.
세 스마트폰 모두 매끈하게 잘 만들어졌다.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깜짝 놀랄 혁신’이라고 할만한 건 없다. 다들 기존 패러다임 내에서 성능을 극대화했다.
(어정쩡한 결론) 혁신이 실종된 시대, 우리는 불행한 걸까
지금 스마트폰 시장에선 ‘파괴적 혁신’은 사라졌다. 그건 확실하다. 물리적 버튼을 없애고, 성능 경쟁 대신 생태계로 승부하는 발상의 전환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혁신이 사라진 시대를 사는 우리가 불행한 걸까? 뻔한 대답이지만, 그렇진 않다. ‘혁신의 시대’보다 훨씬 더 뛰어난 성능과 디자인을 자랑하는 제품들이 오히려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유하면 어떨까? 프로야구 초기 백인천, 박철순이 지배했다. 그들이 모든 것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팬들의 시선 역시 온통 두 선수에게 쏠렸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홈런을 펑펑 치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수비를 기가 막히게 잘하는 선수도 있다. 뛰어난 구위와 멘탈을 갖고 있지만, 길어야 한 이닝만 책임지는 투수도 있다. 그들을 보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스마트폰도 마찬가지다. 2007년 이후 몇 년 동안 아이폰 혼자 4할 타자요, 22연승 투수였다. 그 땐 경쟁이란 게 큰 의미가 없을 정도로 독보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정상급 수준에 오른 여러 폰들이 경쟁하는 시대다. 때론 갤럭시가 이기기도 하고, 또 때론 아이폰이 승리할 때도 있는 상황. 여기에다 ‘LG웨이’를 가겠다는 철학을 담은 V20도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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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난 지금 스마트폰 시장에서 ’파괴적 혁신’을 기대하는 건 한국 야구에서 ‘4할 타자’와 ‘22연승 투수’를 거론하는 것만큼이나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한다. 훨씬 실력이 향상된 수 많은 선수들이 한 뼘 차이를 두고 경쟁을 펼치는 상황이 훨씬 더 재미있다. 스마트폰 시장이 지금 딱 그런 상황이다.
그러니 ‘공포의 외인구단’ 같은 기적이 없다고 선수들 탓하지 말자. 그런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삼성과 애플, 그리고 LG가 보여준 ‘패러다임 내 실력 향상’을 차분하게 감상하자. 그게 2016년 스마트폰 시장을 제대로 읽는 길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