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변호사 마리오 코스테자 곤잘라스가 자신에게 불리한 과거의 기사와 검색 결과를 삭제해 달라면서 촉발된 ‘잊혀질 권리’를 국내에서도 법제화 하자는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특히 국내에서는 '잊혀질 권리'를 ‘디지털 소멸’의 개념으로까지 확장, 각 게시물에 타이머를 장착하고 자신이 올린 정보에 한해 각 개인들에 삭제권한을 부여해야 한다는 움직임으로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잊혀질 권리에 대한 찬반 입장이 엇갈리고, 데이터 축적에 집중하고 있는 검색 사업자들과 절충안을 찾는데 많은 진통이 예상된다.
지난 17일 국회에서는 전병헌, 홍문종 의원이 주최하고 강원도, 한림대가 주관하는 잊혀질 권리 법제화를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토론회에서 전문가들은 잊혀질 권리가 ‘사생활 보호’와 ‘표현의 자유’에서 저울질 되고 있지만, 디지털 소비자 주권 확립과 이를 위한 법제화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잊혀질 권리, 유럽과 한국의 차이는?
국내에서 논의되는 잊혀질 권리는 유럽을 중심으로 뜨겁게 일고 있는 것과 큰 차이를 보인다.
유럽에서는 개인의 인권과 사생활 보호 측면에서 잊혀질 권리가 보장돼야 한다는 측면이라면, 국내에서는 한 걸음 나아가 디지털 주권을 개인에게 주고 데이터 공해를 줄이자는 데에 무게가 실려 있다.
또 유럽은 잊혀질 권리를 위해 ‘검색의 차단’을 주장하고 있는 반면에 국내는 ‘정보의 삭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제3자의 글을 삭제할 경우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크지만, 개인이 과거에 올린 정보만큼은 검색 차단 정도가 아니라 삭제될 수 있도록 권한을 개인에게 주자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잊혀질 권리 사업화에 나선 강원도
최근 강원도는 ‘잊혀질 권리(디지털 소멸) 지원’ 조례를 제정하고 관련 시스템을 도입하기로 했다. 또 관련 사업을 추진, 5년간 총 20억 규모의 보조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강원도는 잊혀질 권리 관련 원천 특허 보유 업체와 업무협약을 하고, 잊혀질 권리 사업 전담 법인을 지난 10월21일 춘천시에 설립했다.
디지털 에이징 시스템이란 모든 디지털 데이터에 자동소멸시효를 부여하는 내용의 특허로, 디지털 소멸의 개념을 주창한 원천특허다. 사용자가 게시물을 올릴 때 해당 정보가 삭제되는 타이머를 설정하는 것으로, 이는 곧 불필요하게 서버에 남게 되는 데이터를 줄여주고 해킹 등 외부 위협으로부터 정보가 유출되는 사고를 막아준다.
강원도는 내년 1월부터 해당 시스템을 강원도 홈페이지에 적용한다는 계획이다. 또 점진적으로 강원도 내 18개 시군 홈페이지에 적용한다는 계획이다. 나아가 강원도는 해당 솔루션과 기술이 네이버, 다음, 구글과 같은 국민 대다수가 사용하는 포털 사이트에도 적용될 수 있는 방안을 체계적으로 연구해 제안한다는 방참이다.
■강원도가 잊혀질 권리에 집중하는 이유
강원도가 사생활 보호 측면을 넘어 이용자들의 잊혀질 권리를 보장해 나가려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디지털 시대를 맞아 불필요하게 축적되는 데이터들이 서버에 저장되고 결국 과도한 전력 낭비로 이어지는 만큼, 환경적 측면에서 개선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데이터 정보가 텍스트와 이미지를 넘어 동영상으로 고용량화 고품질화 되고 있어, 데이터센터 운영에 막대한 전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글로벌 기업들이 신재생에너지로 대체해 나가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데이터센터가 잡아먹는 전력의 양이 높아져 지구 온난화를 가속화할 것이란 우려다. 장기적으로는 누적된 데이터를 보관하기 위한 각 기업들의 비용 부담도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것이란 전망이다.
두 번째는 사생활 보호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데이터 소멸 사업이 가능해질 것으로 보고 강원도가 사업자 유치와 일자리 창출에 중요한 역할을 하겠다는 전략적 판단에 기인한다. 개인정보보호 뿐만 아니라 관련 사업을 통한 지역 내 고용창출 그리고, 더 나아가 강원도를 전 세계에서 잊혀질 권리의 메카로 삼기 위한 취지다.
최문순 강원도지사는 “강원도는 세계 최초로 잊혀질권리를 조례로 만들어 예산까지 마련했다”며 “잘못된 정보가 유통되다 보니 기정사실화 되는 문제가 있는데 네이버, 다음, 구글, 관공서 등에도 디지털소멸 기술이 도입되고 또 잊혀질 권리의 법제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잊혀질 권리 법제화 과제는?
잊혀질 권리가 사생활 보호 측면에서든, 사회 환경적 측면에서든, 또 디지털 주권 회복을 위해서든 법으로 명시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여러 과제가 남아있다.
일단 법을 제정하는 국회의원들이 잊혀질 권리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이해하고 그 필요성에 충분히 공감대를 갖고 있어야 한다. 또한 사생활 보호와 표현의 자유 사이에서 찬반이 갈리고 있는 만큼, 뜻을 하나로 모으는 데에도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전병헌 의원이 국회 상임위 차원에서 빠르게 입법화를 추진하고 있지만, 소위원회 구성 제안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은 실정이다. 아직 담당 상임위인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가 미온적인 반응이란 설명이다.
전 의원은 토론회에서 “첨단화된 디지털 문명이 인간에게 많은 효율성, 효용성, 편의성을 제공하지만 한편으로는 사생활과 인권 침해 문제를 일으킨다”면서 “세계적으로 찬반이 엇갈리지만 개인 권리 존중 측면에서 법과 시스템적으로 잊혀질 권리가 보장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상임위에서 빠르게 입법 완료하자고 제안하고 소위원회 구성도 제안 했지만, 양당 간사가 이에 충분한 논의를 이루지 못해 안타깝다”며 “오늘 토론회를 통해 미방위가 법제화 절차가 추진되도록 지원해줄 것을 촉구한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강원도가 추진하려는 디지털 소멸 기술을 ICT 기업들이 도입하는 데에도 많은 난항이 예상된다. 빅데이터 시대를 맞아 여전히 수많은 기업들이 이용자의 정보를 최대한 많이 끌어모으는 데 주력하고 있다. 사용자들의 인터넷 사용 패턴 하나까지 읽어내 이를 마케팅적으로 활용하려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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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저장해 놓은 데이터 총량을 자산 가치로 책정함으로써 회사의 가치를 높이려다 보니 디지털 소멸에 더욱 인색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데이터센터에 드는 비용보다 저장한 데이터의 가치가 더 높다고 판단해 이를 꼭 움켜쥐려는 수비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최문순 강원도지사는 “네이버나 다음은 데이터가 많이 쌓여야 좋으니 수비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면서도 “데이터 축적에 따른 비용 증가에 대한 기업들의 고민도 큰 만큼 디지털 삭제 권한을 개인에게 줬을 때 기업들이 손해를 입지 않는 방안을 입체적으로 논의하고 체계화 한 뒤 이를 기업들에 제안할 계획”이라고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