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명이 있는 한 실패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살아 있고 건강한 한, 시련은 있을지언정 실패는 없다. 낙관하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아산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중에서)
고(故) 아산(峨山) 정주영 명예회장의 가장 유명한 어록에는 광복 이후 격변의 시대를 치열한 도전정신과 추진력으로 이겨내 온 그의 삶이 함축돼 있다.
2001년 3월 21일 86세의 나이로 영면에 든 고 정 회장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24일 재계 총수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날 오후 서울 한남동 그랜드하얏트 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아산 정주영 탄신 100주년 기념식' 행사장에는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 현대중공업그룹 대주주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등 범현대가 오너는 물론 허창수 전경련 회장(GS그룹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구본무 LG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등이 자리를 함께 했다.
정 회장과 아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은 오후 4시께 행사장에 도착했다.
곧이어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을 시작으로 정몽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과 정상영 KCC 명예회장이 도착했고 4시 30분께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구본무 LG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허창수 전경련 회장 등 재계 인사들이 차례로 입장하며 정몽구 회장 등과 인사를 나눴다. 이후 정 회장 일행은 '아산 정주영' 사진전을 둘러보고 곧바로 기념식장으로 들어섰다.
글로벌 경쟁 심화와 내수경기 침체 등 대내외 적으로 녹록치 않은 경영환경에 직면한 국내 기업들을 이끄는 수장들에게는 이날 행사 참석이 단순히 고인을 기리는 추모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한 재계 관계자는 "아산이 기업을 일굴 무렵 우리나라는 자본은 물론 기술력도 부족한 황무지 상태였다"면서 "한국경제 위기설이 불거지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아산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이봐, 해봤어"로 대변되는 도전과 창조정신의 계승"이라고 강조했다.
정 명예회장은 모두가 안 된다고 만류하는 일에 끊임없이 도전하면서 자동차, 조선, 건설 등 각 분야에서 글로벌 대표 기업들을 키워내며 한국 경제를 한 차원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1976년 최초의 국산차 '포니'의 탄생에서 글로벌 5위로 도약한 현대차그룹은 물론 사우디의 주베일 산업항 공사 수주로 대변되는 현대건설의 중동 신화,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이 대표적이다.
500원짜리 이순신 지폐에 있는 거북선을 보여주며 영국에서 건설 자금을 유치, 울산 조선소를 건설하며 세계 1위 조선회사 현대중공업의 초석을 놓은 일화는 아직도 인구에 회자된다. 기업가 정신 쇠퇴로 저성장에 시름하는 한국 경제에 제 2의, 제 3의 정주영이 절실한 이유다.
이날 정몽구 회장은 "선친께서 이루신 필생의 업적들을 되돌아 보니 다시 한번 깊은 감회와 더불어 무한한 존경과 그리움을 금할 길이 없다"며 "선친의 뜻과 가르침을 이어받아 대한민국이 세계 경제의 주역으로 새롭게 도약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아산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위원장을 맡은 정홍원 전 국무총리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불굴의 도전을 계속해 온 아산의 의지는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좌표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범 현대가 지원 논의, 이뤄졌을까
한편 이날 행사에는 최근 집안 행사에 모습을 자주 드러내지 않던 정몽구 회장이 참석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정 회장은 지난 18일 정주영 탄생 100주년 기념 음악회와 23일 학술 심포지엄에는 참석하지 않고 아들인 정의선 부회장만 보냈으나, 이날 기념식 만큼은 직접 챙겼다.
현대차그룹을 비롯해 현대중공업그룹, 현대백화점그룹, KCC, 한라그룹 등 범현대가 주요 인사들 역시 모두 자리했다.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을 필두로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 정몽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 정상영 KCC 명예회장, 정몽혁 현대종합상사 회장, 정몽규 현대산업그룹 회장, 정교선 현대백화점 부회장 등이 빠짐없이 참석했다.
집안 제사를 제외하고는 이례적으로 한 자리에 모인 만큼, 범 현대가가 직면한 현안에 대한 논의는 물론 협력 가능성에도 무게가 실리고 있다.
정몽준 이사장이 이끄는 현대중공업은 지난해 3조원대의 대규모 적자를 내며 구조조정에 돌입한 데 이어 올해도 조 단위의 영업손실이 불가피해 전 계열사가 긴축경영체제에 돌입한 상태다. 앞서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은 올해 9월과 이달 초 잇따라 현대중공업 및 계열사인 현대삼호중공업이 보유한 현대차 주식을 매입한 바 있다.
이번 거래는 재무 구조 개선을 추진 중인 현대중공업이 현대차그룹에 매수 의사를 타진하면서 이뤄졌다. 앞으로도 요청이 있을 경우 지원이 가능하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여지는 대목이다.
현대가 며느리인 현정은 회장의 현대그룹 역시 해운시장 악화로 인한 현대상선의 경영난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주식담보대출과 영구채 발행 등을 합쳐 7천억원 규모의 자금을 조달키로 한 상태다.
재계 관계자는 "정치권에서 현대상선과 한진해운을 통합하는 내용의 해운산업 구조조정 방안도 흘러나오고 있다"며 "범 현대가 차원에서 현대상선 지원에 대한 논의가 이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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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날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행사 시간인 5시가 임박해서 행사장에 도착했다. 이미 정몽구 회장 등 일행은 행사장에 입장한 뒤였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이날 행사는 순수하게 정주영 명예회장을 기리는 게 목적"이라며 "고인을 회고하는 자리에서 경영 현안과 관련한 깊은 논의는 없었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