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문제를 놓고 삼성과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면으로 맞붙었다.
삼성그룹 오너 일가의 경영승계를 위해 삼성물산의 주주이익을 훼손하려 한다는 엘리엇의 주장과 빈 틈을 노려 기업을 위협하는 외국계 '먹튀 펀드'의 주도면밀한 공격이라는 논리가 맞서고 있다. 양측은 합병 결의를 위한 주주총회를 앞두고 각각의 논리로 주주를 설득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또 엘리엇의 가처분 신청으로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다. 이번 사태는 특히 다양한 구조개편을 시도하고 있는 한국 기업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디넷코리아는 삼성물산과 엘리엇 공방의 배경과 우려 사항을 3회에 걸쳐 긴급진단한다.[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①삼성 흔드는 엘리엇, '정의의 사도'인가
②공격 받은 삼성, 무엇을 준비하나
③엘리엇 사태 장기화…우려되는 악재들
“시장은 이미 너무나 효율적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주가가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하는 대신, 주식을 산 뒤 그 기업이 주주이익 극대화를 위해 무언가를 하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헤지펀드 트라이언펀드매니지먼트를 이끄는 넬슨 펠츠 최고경영자(CEO)의 말이다. 그는 최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제동을 걸고 나선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의 수장 폴 싱어와 마찬가지로 ‘행동주의 투자자(Activists)’로 분류된다.
행동주의 투자자란 사업의 향후 실적을 전망해 투자하는 소극적 방식에서 탈피, 대량 주식매수를 통해 특정 기업의 주주로 등재한 후 지배구조, 자본구조, 사업전략 등에 혁신과 구조조정을 요구하면서 직접 기업 경영에 개입해 적극적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투자방식을 의미한다.
지난 3월 글로벌 컨설팅사 PWC가 발간한 주주행동주의 관련 보고서에 따르면 2003년 이후 지난 10년 동안 주주행동주의 헤지펀드들은 275개가 증가해 지난해 11월 기준 운용하고 있는 자산 규모는 1천155억달러(약 127조7천억원)에 달한다.
과거 헤지펀드들은 적대적 인수합병을 통해 저렴한 가격으로 지분을 매집한 후 이사회 장악 및 핵심자산 매각 등을 통해 단기 차익을 극대화하는 ‘기업사냥꾼’이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최근 주주행동주의를 표방한 헤지펀드들이 나타나면서 장기적으로 주주 가치를 끌어올리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이들은 철저한 사전조사를 통해 장기적 관점에서 기업가치를 제고하는 것을 목표로 사업 구조조정 등을 제안하고 미디어를 통해 적극적으로 여론을 형성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저금리 시대에 고배당 종목을 선호하는 주주들의 요구에 따라 실제 표 대결(proxy fight)에서 행동주의 투자자가 승리하는 비율도 상승하고 있다.
하지만 기업이 미래 성장을 위해 활용해야 할 자원을 주주에게 부여함으로써 주주의 단기적 이익을 위해 기업의 장기적 성장을 희생한다는 비판 역시 상존한다. 행동주주 투자자들에 대해 “소액주주의 이익 대변자”라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로빈훗을 가장한 위선자”라는 상반된 평가가 이어지는 이유다.
■행동주의 투자자, 기업 흔들기 전략보니…
행동주의 투자자들의 전략은 다양하다. 이사 후보를 추천하거나 경영진 교체를 요구하는 등 지배구조와 관련된 것부터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을 요구하고, 비핵심자산 매각이나 인수합병(M&A)를 추진하기도 한다.
트라이언은 지난 2012년 5월 산업용 장비 제조업체인 잉거솔랜드의 지분 7%를 취득하고 사외이사로 선임된 이후 20억달러 규모의 자사주 매입 및 배당 30% 증가 등 자본구조의 개선을 요구했다. 또 2013년 말 보안 사업부문인 알레지온 분사 등 사업 구조조정을 단행해 주가를 크게 끌어올렸다.
또 다른 행동주의 헤지펀드인 서드포인트는 지난 2013년 6월 소니 지분 6.5%를 확보한 후 소니엔터테인먼트 분사를 요구했다. 이후 지분을 9.4%까지 확대하며 투자자 심리를 부추겼다. 8월 이사회가 만장일치로 분사를 거부하면서 주가도 급락했지만 서드포인트는 이미 주식을 매도한 후였다.
삼성물산 합병 작업에 제동을 걸고 나선 엘리엇 역시 전형적인 행동주의 투자자의 행태를 취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아르헨티나 채무불이행(디폴트) 사태를 일으킨 것으로 악명이 높다. 글로벌 IT 업계에서도 EMC, 리버베드테크놀로지, 컴퓨웨어, 시트릭스 등 굴지의 기업들이 엘리엇의 먹잇감이 된 사례가 적지 않다.
엘리엇은 지난 7월에는 글로벌 1위 스토리지 업체인 EMC 지분 2%를 취득한 후 EMC가 80%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VM웨어 분사를 요구했다. 앞서 지난 2013년에는 네트워크 장비엄체인 리버베드의 지분을 확보한 뒤 경영진을 압박해 수차례 인수 제안을 하면서 회사를 흔들었다.
리버베드는 결국 사모펀드인 토마브라보 측에 회사를 매각했다. 포브스에 따르면 리버베드 이전에도 노벨, 블루코트시스템, 컴퓨웨어 같은 업체들이 같은 방식으로 엘리엇과 토마브라보의 협공에 회사를 매각했다. 가장 최근에는 가상화 및 네트워크 업체인 시트릭스 지분 7.1%를 확보한 뒤 경영진과 이사회를 상대로 자사주 매입을 요구하고 나서기도 했다.
■기업 장기 성장에 기여한다? 방해다?
하지만 행동주의 투자자들이 내세우는 명분처럼 기업의 장기 성장에 기여하는 정의의 사도인지, 아니면 기업을 파산 위기로 몰아넣는 저승사자인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무엇보다 경영진 교체, 배당 확대, 자사주 매입 등 주주이익만을 위한 무리한 요구로 기업의 미래성장을 방해한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한편으로는 행동주의 투자 이후 해당 기업의 수익성이 평균적으로 크게 향상된다는 연구결과도 반론으로 제시된다.
김예구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주주행동주의는 기업이 미래 성장을 위해 활용해야 할 자원을 주주에게 부여함으로써, 주주의 단기적 이익을 위해 기업의 장기적 성장을 희생한다는 비판이 있다”면서 “주주행동주의 투자 후 해당 기업의 채권투자자는 수익률 하락을 경험하기 때문에 주주행동주의는 기업가치의 창출이 아닌, 채권투자자로부터 주주로의 가치 이전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고 말했다.
실제 지난 19일 엘리엇이 삼성물산을 상대로 낸 주식처분금지 등 가처분 소송 심문기일에서 삼성물산 측 법률대리인은 김앤장은 “엘리엇은 지난 3일 주주제안서를 내 주식자산 일부 등 전부를 현 주주에 현물배당하자고 했는데 이는 주식자산을 다 빼서 삼성물산을 껍데기로 만들자는 것과 다름없다”면서 “엘리엇은 회사의 지속적 성장이나 발전은 고려하지 않고 당장 자산을 처분해서 단기 이익을 취하자는 것”이라고 엘리엇의 의도를 공격하기도 했다.
이같은 시각에 대한 반론도 있다. 기업지배구조 권위자인 루시언 베브척 하버드 로스쿨 교수는 “주주행동주의는 기업의 감춰진 비효율성을 발견해 기업의 장기 성장에 기여한다는 것이 실증적으로 증명되었기 때문에, 행동주의 투자가 근시안적이라는 생각은 근거 없는 믿음에 불과하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엘리엇 역시 이번 문제제기에 앞서 오랜 기간 치밀하게 준비한 정황이 속속 드러나면서 향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추진 과정과 또 합병 성사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특히 추가 지분 매입을 통해 임시주주총회를 열어 이사해임, 중간 배당, 자산양수도 등을 요구하면서 경영 간섭에 나설 수 있다. 삼성물산이 파격적인 주주친화 정책을 내세우지 않는 이상 엘리엇이 소액주주에게 제시할 수 있는 당근이 더 많다는 분석이다.
윤태호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국내 경제에 미치는 삼성그룹의 영향력을 고려할 때 삼성의 우세함을 점치는 시각이 지배적이지만 엘리엇이 국가와 기업을 상대로 오랜 기간 승리했던 벌처(vulture fund)펀드라는 점을 고려할 때 삼성이 받아들이기 힘든 극단적인 요구를 할 가능성이 높다"면서 "엘리엇이 극단적으로 삼성물산의 배당을 70% 이상 요구한다거나 보유중인 삼성전자나 삼성SDS 계열사 지분을 매각해서 주주이익으로 환원하겠다는 의견을 낸다면 자신에게 유리한 정책을 제시하는 엘리엇에 찬성할 주주들도 상당해 보인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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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행동주의 투자자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목적의 정당성 여부에 대한 논쟁은 차치하고서라도 헤지펀드들의 기업 흔들기가 시작되면 어떤 방식으로든 자원의 소모와 집중력 약화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예상가능하다.
PWC는 행동주의 투자자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방법으로 "상시적으로 기업의 지배구조를 점검하는 동시에 행동주의 투자자들의 움직임을 모니터링하고 위험요소들을 평가해야한다"면서 "행동주의 펀드들이 이미 작업에 착수한 이후에는 객관적으로 그들의 생각을 고려하고 합의에 이를 수 있는 부분을 찾는 동시에 주주들에게 적극적으로 소통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