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가상현실, 1980년대 대중문화 만났다

[신간 소개] 레디 플레이어 원

일반입력 :2015/05/12 14:52    수정: 2015/05/12 15:09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1993년 개봉된 공상과학(SF) 영화 <데몰리션맨>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극중 여주인공인 레니나 힉슬리(산드라 블록)이 존 스파르탄(실베스타 스탤론)에게 ‘관계’를 갖자고 제안한다.

그러자 스파르탄은 옷을 벗고 입냄새를 확인한다. 하지만 힉슬리가 갖고 온 것은 헬멧 2개다. 미래 인간 힉슬리에겐 ‘섹스’마저도 사이버 가상경험으로 해결한다. 이처럼 영화나 소설 속 미래 사회의 단골 코드는 가상현실이다.

여기 미래 가상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 있다. 출간되기 전부터 이미 영화 판권이 팔렸으며, 헐리우드를 대표하는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가 메가폰을 잡기로 했을 정도로 화제를 모으는 소설. 바로 어니스트 클라인의 <레디 플레이어 원(Ready Player One)>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Ready Player One)>은 미국에서 출간될 때부터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아마존 SF&판타지 분야 '올해의 책(Book of the year)'에 선정된 것을 필두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반스앤노블 최고 SF소설, 허드슨 북셀러 베스트셀러 1위를 연이어 차지했다.

미국의 거대 영화사인 워너 브라더스 사가 곧바로 영화 판권을 사들이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제작과 감독을 맡기로 하면서 벌써부터 많은 팬들을 흥분시키고 있다.

이 소설에 왜 그토록 흥분을 할까? 재미와 문학성 두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이 소설의 구조를 한번 살펴보자. 2044년이란 미래 세계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가상현실인 오아시스(OASIS)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소설 속에선 오아시스가 상거래와 소셜 네트워킹 기능을 전부 흡수하면서 실제 세계를 대신하게 된다. 사람들은 온라인 속 새로운 자아를 통해 삶을 영위한다. 전형적인 미래 소설의 구조를 채택한 셈이다.

가상현실 오아시스 개발자인 제임스 할리데이(James Haliday)가 세상을 떠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오아시스 속에 감춰둔 이스터에그를 찾는 사람에게 자신의 유산을 상속하겠다는 할리데이의 유언이 공개되면서 흥미진진한 모험의 서막을 연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21세기 영상세대가 익숙한 퀘스트 게임의 서사구조를 채택하고 있다. 3개의 열쇠, 3개의 관문을 통과한 사람이 이스터에그를 얻을 수 있다는 설정은 게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다.

실제로 책 제목인 ‘레디 플레이어 원(Ready Player One)’은 게임을 시작할 때 처음 등장하는 문구다. 저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게임 ‘블랙 타이거’의 첫 문구를 그대로 따왔다고 밝히고 있다. 워너 브러더스나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 제작에 흔쾌히 동의한 것도 이런 서사 구조를 높이 산 때문이라고 해도 크게 그르진 않을 것 같다.

이 책의 재미가 단순히 흥미로운 서사 구조에만 있는 건 아니다. 저자는 유산 찾기 게임 중간 중간에 1980년대 대중문화 코드를 심어놓고 있다. 2044년을 살아가는 10대 소년 웨이드는 1980년대의 영화와 음악과 게임을 샅샅이 섭렵한 소년으로 나온다. 굳이 비유하자면 지금의 우리가 1930년대 블루스와 재즈를 즐기거나, 혹은 1960년대 인기를 끈 록음악에 심취하는 것과 비슷한 모양새다.

1980년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몇몇 문장을 한번 감상해보자.

“<던전 오브 다고라스>는 ‘왼쪽으로 돌아라’, ‘횃불을 잡아라’와 같은 명령어를 입력함으로써 아바타를 조종하는 게임이다. 미로처럼 복잡한 벡터 그래픽 통로를 헤매면서 점점 난이도가 높아지는 5단계로 들어가는 동안 거미와 스톤 자이언트, 외계인, 유령을 무찔러야 했다.” (157쪽)

“나는 1980년대에는 오락기 상판 귀퉁이에 동전을 올려놓아 다음 차례를 찜 하는 관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동전은 집으려고 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 뭔가 수상했다. ‘고장’이라고 적힌 쪽지를 떼서 옆에 있던 <갤러그> 오락기에 붙이고 나서 시작 화면을 쳐다 보았다.” (318쪽)

그런 점에서 <레디 플레이어 원(Ready Player One)>은 1980년대 대중 문화에 대한 향수와 미래에 대한 오타쿠적 상상력이 조합된 사이버스페이스 오디세이라고 해도 크게 그르진 않을 것 같다. 소설을 읽는 내내 게임을 하는 듯한 착각 속에 빠질 정도로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텔링 역시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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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 인용된 139개 영화와 드라마 정보를 정리해놓은 Ready Player One References를 참고하면서 읽어가면 좀 더 입체적인 독서가 가능할 것 같다.

(어니스트 클라인 지음/ 전정순 옮김, 에이콘 1만6천400원)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