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진은 영원?…설국열차 속 숨은 과학

일반입력 :2013/10/28 15:25    수정: 2013/10/28 16:20

정윤희 기자

얼어붙고 눈으로 뒤덮인 세상에서 달리는 기차에 올라탄 사람들만이 유일하게 남은 인류다. 온난화를 조절하기 위해 살포한 화학약품이 오히려 빙하기의 원인이 됐다. 생존자들을 태운 기차는 무한동력엔진을 이용해 달린다.

올해 여름 극장가를 뜨겁게 달군 영화 설국열차에는 매력적인 SF, 과학 소재들이 넘친다. 온난화, 인류 멸망, 무한동력엔진, CW-7…. 그러나 짧은 러닝타임 안에 방대한 상상력을 채워 넣다 보니 풀리지 않는 의문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설국열차의 해외 개봉을 앞두고 때마침 봉준호 감독과 함께 영화의 ‘가려운 부분’을 긁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지난 26일 국립과천과학관에서는 봉준호 감독이 직접 말하는 ‘설국열차로 보는 인류의 미래’를 주제로 과학토크콘서트가 열렸다. 이날 콘서트에는 봉 감독과 함께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원종우 과학과 사람들 대표, 설국열차 속 과학자문을 맡은 김보영 SF작가가 함께 자리해 이야기를 나눴다.

예약제로 진행된 이날 과학토크콘서트는 설국열차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반영하듯 100여장이 넘는 티켓이 모두 매진됐다. 심지어 좌석이 부족해 계단에 앉아서 이야기를 듣는 참관객들도 있었다. 행사 자체도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기면서까지 진행됐다.

대화는 설국열차의 SF적 의미에 대한 화두로 시작됐다. 설국열차의 국내 개봉 후 과학, SF적 접근보다는 사회문화적 해석에 관심이 집중됐다는 얘기다. 실제로 영화 속 과학보다는 머리칸과 꼬리칸, 길리엄과 윌포드 등 영화 속 배경과 캐릭터를 두고 계층간의 대치 등 현실 사회와 연결시킨 갖가지 해설이 쏟아졌다.

이에 대해 봉 감독은 “(설국열차를) SF영화로 보기보다는 민감한 정치적 이슈를 보수, 진보 등에서 편한대로 적용하거나 기독교, 불교 등 종교적인 해석을 내놓으시는 분들도 많았다”며 “곳곳에서 다양한 용도로 영화가 쓰이니까 기분이 좋았고 그것조차도 SF의 매력이 아닐까 한다”고 말했다.

처음 설국열차 원작 만화와 만났던 당시 그가 매혹된 것은 ‘기차’ 그 자체다. 봉 감독은 이를 두고 ‘남자들의 기차에 대한 로망’이라며 웃었다. 여기에 SF의 단골소재 ‘인류 멸망’까지. 매혹될 수밖에 없는 조합이다.

“서점에서 표지를 봤을 때 ‘아, 기차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인가 봐’하고 책장을 펼쳤죠. 근데 막상 첫 장을 펼쳤더니 지구가 멸망한 거예요. ‘종말 이후의 생존자들이 달리는 기차에 타고 있다’ 뭔가 황당하면서도 더 매혹적이었죠.”

■CW-7과 빙하기, 그 속의 유머코드

“더워서 에어컨을 틀었는데 얼어 죽은 케이스라고 할까요? 제 딴에는 과학적 유머였습니다.”

설국열차는 인위적 빙하기로 인한 인류 멸망 이후를 그렸다.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 각국이 살포한 CW-7이 오히려 기온을 급속히 낮춰 빙하기를 불러왔다는 설정이다. 이 부분은 3차 대전으로 인한 인류의 멸망을 그린 원작 만화와 다른 부분이기도 하다.

봉 감독은 “좀 더 현실적으로 우리가 신문에서 흔히 접하는 것을 인류 멸망과 연결시키고 싶었다”며 “그러다보니 온난화 생각을 했고, 이를 막으려고 인위적인 약물을 살포했다가 시원하게 얼어붙어버린 설정을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CW-7에 대한 설명도 이어졌다. 그는 CW-7이 무엇의 약자냐고 묻는 질문에 “CW-7이 제작자인 박찬욱(CW) 감독의 약자라는 설도 있었는데 저는 콜드웨더(cold weather)를 생각했다”며 “사실 저희도 잘 모른다”고 대답해 웃음을 자아냈다.

이어 “영화 도입부에 제일 처음 CW-7을 살포하는 공항에서 리포터가 환경 단체들의 반대에도 몇 개국에 살포한다는 식의 생중계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며 “교토의정서도 참가하는 나라, 불참하는 나라가 있었듯, 영화 속 CW-7 역시 찬반 세력이 있는 것으로 설정했다”고 덧붙였다.

영화 속 CW-7 살포 장면은 어떻게 촬영됐을까. 봉 감독은 “체코에 위치한 스튜디오에서 몇 달간 계속 촬영했는데, 이 곳이 프라하 공항과 가까웠다”며 “가끔 스튜디오에서 나가 연료를 분사하며 지나가는 비행기를 보다가 B카메라 기사에게 그 장면을 찍어달라고 부탁했고, 그것을 컴퓨터그래픽(CG)으로 복사해 3대의 비행기로 늘린 것”이라고 말했다.

■“영원한 엔진, 사실은…”

영화 설정의 핵심은 영원히 달리는 기차다.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영원한 엔진’으로 윌포드와 함께 찬양받는 대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정말로 무한동력엔진이 가능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그토록 찬양받던 ‘영원한 엔진’은 핵연료를 이용해 움직이는 것으로 수명이 20~30년 정도일 뿐 사실은 영원하지 않다는 설명이다. “영원하다고 외쳐대던 엔진은 사실 언젠가는 멈추고 멸종될 운명인거죠. 오히려 완전 멸망해버린 줄 알았던 기차 바깥의 세계, 자연의 세계가 더 영원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기차의 모티브로 ‘핵잠수함’을 들었다. 미국에서 지난 1970년대 만들어진 핵잠수함의 경우 원자로가 내부에 탑재돼있어 20년 이상 연료를 충전하지 않고 항해한다는 설명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기차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윌포드가 있는 엔진실의 디자인도 사실은 핵발전소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며 “핵융합봉 같은 것이 들어왔다 나가기도 하는 등 핵연료를 가지고 달리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봉 감독이 또 하나 중요시 한 것은 기차가 1년에 전 세계를 한 바퀴 돈다는 설정이다. 이 역시 원작 만화에는 없는 내용이기도 하다. 총 43만8천km, 시속 50km로 달리는 기차가 1년에 한 바퀴, 순환코스를 돌게 함으로써 기차 자체가 시계가 되고 달력이 되게 만들었다는 얘기다.

“이런 식으로 기차가 5분 후에 어디 있게 되는지 알 수 있게 하는 거죠. 예카테리나 브릿지를 지날 때 새해가 되는 식으로요. 순환코스를 만들기 위해서 조감독들에게 미션을 냈어요. 지구 한 바퀴를 돌기 위해서는 어떻게 가야할지 코스를 짜게 한거죠. 부산, 대전을 지나가도 되는데 다만 사람들이 올라탔던 곳은 런던으로 하는 식의 설정만 던져주고 만들게 했습니다.”

기차 칸을 구현하면서 아쉬웠던 점도 거론했다. 만들고 싶었던 칸이 많았는데 여러 가지 제작 여건 상 26칸을 선별해 배열할 수밖에 없었다.

“기차칸의 배열 자체가 스토리의 배열입니다. 기차를 관통하는 이야기이니만큼 어떻게 배열하는가가 장면의 순서가 돼버리는 거죠. 엄격하게 선별할 수밖에 없었어요. 사실은 극장칸에서 사람들이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고 있는 장면도 만들고 싶었고, 동물원칸도 만들고 싶었고, 여러 가지 해보고 싶었던 것이 많았어요.”

■설국열차 속 과학과 SF, 그 타협점은?

그렇다면 SF와 판타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실제로 봉 감독은 설국열차와 과학 사이의 타협점도 상당한 고민거리였다고 토로했다. SF는 최소한의 과학적 근거가 있어야 하다 보니 이것저것 신경을 쓰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상상력이 위축되는 것 역시 부담스러웠다는 얘기다.

그렇게 김보영 SF작가를 만났다. 설국열차에 과학 자문을 한 김 작가는 “현실의 과학도 고려해야겠지만, 우선 SF적 현실을 상정한 후 과학의 내적 논리가 진행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스토리를 끌어나가기 위한 일종의 ‘판타지적 전제’가 우선 필요하고 그 안에서 과학적 내적 논리가 전개돼야 한다는 설명이다.

단적인 예로 ‘스타워즈’를 보자. 만약 과학자들에게 자문을 맡겼다면 광선검이 가능하냐 불가능하냐만 놓고 한참 고민한 후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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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 감독 역시 “사실 설국열차에서도 인류가 어딘가에 생존을 해야 한다면 지하 벙커를 파거나 배를 만들거나 하는 것이 낫지 굳이 기차에 타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방법 아니겠느냐”며 웃었다.

“이것을 돌파하기 위해 기차를 만든 윌포드가 흔히 말하는 ‘철덕’, 기차 오타쿠라는 억지 설정을 한거죠. 과학적으로는 말도 안 될 수 있지만 달리는 기차에 생존자가 있다는 전제가 없었다면 영화나 원작 만화가 출발을 못했을 겁니다. 창작자로서 좀 뻔뻔스럽게 돌파한 부분이기도 하죠. 영화 개봉 후 KTX 관계자분들이 빙하기의 철도 관제 등을 어떻게 하느냐는 글을 올리셨더라고요. 그런 분들께는 죄송할 따름입니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