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만큼 급변하는 산업도 없다. 그 틈에서 IT회사 CEO는 찰나의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을 맞는다. 현재 세계 IT업계를 쥐락펴락하는 유명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순간의 선택으로 회사가 한 뼘 성장한 사례도 있었지만, 뼈아픈 결말을 맞은 사례도 많았다. IT업계에 파괴력있었던 기업의 결정은 주로 인수합병과 수장 교체 등이었다. 수많은 M&A가 있었고, 무수한 인물들이 CEO자리에 임명되고, 또 쫓겨났다.
최근 구글의 모토로라 인수 발표 후 앤디 루빈이 안드로이드 운영체제(OS)를 삼성전자에 매입제안을 했다가 퇴짜를 맞았다는 뒷얘기가 업계를 떠들석하게 했다. SW파워와 기업의 숨은 가치를 몰라본 삼성전자의 어수룩함 때문에 한국의 IT산업 전체가 흔들리게 됐다는 비난마저 쏟아졌다.
혹자는 퀄컴의 휴대폰 특허를 떠올리며 한국기업이 인수합병 등에 서투른 것을 뼈아프다고 아쉬워한다. 하지만 삼성전자가 퀄컴을 샀다고, 또 안드로이드 OS를 샀다고 해서 지금의 퀄컴이나 구글만큼 성공할 수 있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진정 산업의 발전을 위한다면 오히려 여러 가능성을 따지지 않은 섣부른 선택을 비난해야 한다. 가령, 산업은행이 2008년 리먼브라더스 인수했다면, 한국은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의 직격탄을 맞았을 것이다.
미국 지디넷은 최근 지난 IT의 역사 중 대참사를 초래한 IT기업 최악의 선택들을 정리했다. IBM, MS, HP, 애플 등 낯익은 이름이 많이 보인다. 세계 IT를 주무르는 이 기업들도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파산 일보직전까지 갔음을 알게 된다.
■IBM, 마이크로소프트(MS) 우습게 보더니
1970년 말 IBM은 전설의 PC 5150을 생산했다. 5150은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로서 얼마전 30주년을 맞았다.
5150을 위해 IBM은 운영체제(OS)를 필요로 했다. 당시 오직 한 회사가 OS를 갖고 있었는데, 디지털 리서치란 회사의 CP/M이다. 이 OS는 애플2 초기모델에서 잠시 운영되기도 했다. 오스본(Osborne)과 케이프로(Kaypro) 등의 컴퓨터 업체도 디지털리서치의 OS를 사용했다.
1980년 존 오펠 IBM 회장은 디지털리서치의 설립자이자 CEO인 개리 킬달에게 접촉을 시도한다. 존 오펠 회장은 5150와 차기 제품들에 대한 CP/M의 라이선스를 요구했다. 협상은 실패했고 IBM은 다른 회사를 찾아나섰다.
그러던 중 IBM 눈에 들어온 것이 빌 게이츠, 스티브 발머, 폴 앨런의 마이크로소프트(MS)였다. 그들은 시애틀에 회사를 설립해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을 시도하고 있었다. MS가 개발한 소프트웨어는 x86 기반의 OS이자, CP/M을 베낀 86-DOS였다.
MS는 IBM과 협상에 나서 전례없는 비독점 라이선스 권리를 따냈다. IBM이 MS의 DOS 운영체제를 독점하지 못하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MS는 이를 계기로 PC시장 석권을 향한 발판을 마련한 셈이었다.
MS의 DOS는 수백만개의 라이선스를 팔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MS는 이후 윈도 OS와 오피스제품을 내놓으면서 IT업계 최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디지털리서치는 MS와 유사한 라이선스 모델을 얻어냈을 지 모른다. IBM 역시 디지털리서치와 MS를 경쟁시켜 MS-DOS에 대한 더 강력한 권리를 획득했을지 모른다. IBM은 디지털리서치나 MS를 인수할 수도 있었다.
■아담 오스본의 성급했던 차세대 모델 사전공개
1982년이었다. 영국 컴퓨터공학박사 아담 오스본은 시장에서 성공가도를 달리던 오스본1 모델의 다음 버전인 이그지큐티브 모델 OCC-2를 사전 공개했다. 1년 뒤 그는 또다시 OCC-2 크기를 줄인 모델인 빅센(VIXEN)을 사전 공개했다. 판매중인 제품을 성능면에서 크게 상회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아담 오스본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지만 ‘오스본 효과’란 말은 남았다. 어떤 회사가 다음 제품을 아직 판매할 단계가 아닌 시점에 차세대 제품을 미리 발표해 대기수요를 만들어내고 판매중인 제품의 구매중단을 유발하는 것을 말한다.
아담 오스본이 차기 모델을 미완성 단계에서 공개하자 소비자들은 PC 구매를 중단했다. 그는 케이프로나 IBM 등 경쟁사 제품을 고객들이 구매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OCC-2와 빅센을 사전공개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결과는 자기가 판 덫에 빠진 것이다.
그가 설립했던 오스본 컴퓨터는 1983년 파산해버렸다. 개인용 컴퓨터 시대를 풍미했던 오스본, 케이프로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HP, CPU 개발 포기와 인텔 아이태니엄
1980년대 말 HP는 그들의 PA-RISC 시스템 아키텍처가 엔터프라이즈급 서버를 통해 고성능 컴퓨팅 시대를 주도할 것이란 자신감에 차있었다. 비슷한 시점에 새로운 시스템 아키텍처인 VLIW 개발도 시작했다.
그런 1994년 HP의 루이스 E. 플랫 CEO는 서버용 CPU 개발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PA-RISC 개발이 중단됐고, HP 자체 파운드리 설비도 폐쇄됐다. 그리고 64비트 VLIW CPU 생산을 인텔과 파트너십으로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VLIW-64는 이후 IA-64로 알려지게 된다.
7년 후인 2001년 HP와 인텔은 10억달러 규모의 '아이테니엄' R&D 투자를 결정했다. 별명은 아이태닉. 싸고, 고성능 서버에 적합하지 않은 인텔 x86 칩과 비교하기 위한 이름이었다. IA-64도 x86 명령어 수행 시 생겼던 끔직한 속도저하를 개선했다.
그러나 AMD와 인텔은 x86 64비트 시스템을 개발했다. x86 칩을 대량으로 클러스터한 고성능 컴퓨터(HPC)를 위해 만들어진 64비트 x86 칩은 훨씬 적은 돈을 들이고도 IA-64의 성능을 뛰어넘게 했다.
HP가 인텔에게 CPU 개발을 일임한 것과 반대로 IBM과 썬마이크로시스템즈는 파워, 스팍 등의 자체 CPU 아키텍처 개발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HP는 IBM, 썬에게 하이엔드 서버 시장을 빼앗겼다.
IBM과 델도 인텔 아이태니엄을 채택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델은 이후 알바트로스란 제품에 몸을 맡겼다 .
HP는 2002년 컴팩을 합병했다. 컴팩은 HP와 합병되기 4년전 DEC란 회사를 인수했었다. DEC는 64비트 알파 RISC칩과 윈도 NT, 디지털 유닉스 서버 등 HPC시장을 공략할 기술과 역량을 갖고 있었다.
HP는 컴팩을 하나로 합친 후 DEC의 기술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HP는 계속 IA-64에 애정을 쏟았다. IA-64는 이후 단계적인 써드파티의 철수에 힘을 잃어갔다.
HP는 지금 아이테니엄 기반 서버를 판매하는 유일한 회사다. 그러나 MS와 레드햇은 이미 아이태니엄 SW개발을 중단했다. 오라클은 지난 3월 아이태니엄 차세대 버전부터 SW개발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HP 칼리 피오리나 CEO와 컴팩 인수
2000년 중반 HP는 지옥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러던 2002년 칼리 피오리나 CEO는 컴팩을 250억달러에 인수했다.
많은 대주주들은 이 합병을 반대했다. 월터 휴렛을 대표로 HP 창업주 가족들은 위임장에 대한 법정공방을 벌였다. 컴팩이 훌륭한 PC제조업체지만 HP의 제품과 상당부분 중복된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미 HP 내부에서 낮은 마진의 PC사업을 떼어내자는 논의가 벌어지고 있던 상황에서 이뤄진 HP와 컴팩의 합병은 갈등의 연속이었다.
칼리 피오리나는 컴팩 인수 후 PC사업과 관련한 일련의 논란을 계속 일으켰다. 실적이 부진하자 컴팩 출신들에게 책임을 넘겼다. 냉정하고 오만한 이미지로 비쳤던 칼리 피오리나는 주가가 70달러에서 19달러로 폭락하는 상황을 맞은 2005년 결국 사임했다.
HP의 컴팩 인수는 이 회사의 문화를 바꾼 계기였다. 온화한 기업이란 이미지였던 HP는 컴팩 인수 후 정리해고와 인수기업 출신 인사를 홀대하는 회사로 통하게 됐다.
■스티브 발머의 MS, 윈도 비스타 대실패
MS 윈도 비스타를 향한 비난은 신음, 울부짖음, 혐오 등이다.
MS는 비스타 출시 후 XP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2001년 출시된 XP의 다음 버전은 롱호른이란 코드네임으로 불렸다. 그 기능 리스트는 더 길었고 더 야심적이었다. 2003년 롱호른은 화려한 팡파르 소리를 들으며 MS의 전문개발자컨퍼런스에서 공개됐다.
이 계획은 2004년 8월 버려졌다. 계획은 덜 알려진 '롱호른 리셋'이란 이름으로 명맥을 잇는듯 했지만, 이듬해 2005년 9월 윈도사업부 수장이었던 짐 올친은 공식적으로 실패라고 인정했다.
윈도 비스타의 당초 디자인은 훌륭했다. 윈도의 보안모델을 개선했고, 데스크톱 OS로서 64비트를 펼치는 역할로 소개됐다. 네트워킹 성능과, 사용자 인터페이스도 정제됐다. 검색능력도 한층 업그레이드됐다. 불행하게도 윈도 비스타는 다루기 힘들었고, 엉터리였던 프로젝트로 남았다. 구상은 좋았지만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던 것이다.
2006년 11월 윈도 비스타가 제조업체들에게 공급됐다. 2007년 본격적으로 윈도 비스타를 탑재한 PC가 판매됐다. 시장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냈다. 더 많은 시스템 리소스를 요구했고, 몇몇 대중적인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와 호환되지도 않았다. UAC와 보안위험성 시비에도 휘말렸다.
서비스팩을 통해 비스타로 불거진 여러 문제점들이 개선됐지만, MS는 느려터진 경마차란 평판을 받고 말았다. 확실히 윈도 비스타를 위해 만들어진 구상은 세련됐다. 비스타의 후계자인 윈도7은 비스타보다 나은 평가를 얻었다.
비스타에 MS가 얼마나 많은 매몰비용을 들였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비스타는 이 회사의 명성에 해를 끼쳤고, 수십억달러에 해당하는 업그레이드 비용과 애플 맥플랫폼의 사용자 이탈을 초래했다.
■애플, 스티브 잡스를 쫓아내다
스티브 잡스는 1976년 스티브 위즈니악, 로널드 웨인과 함께 애플을 설립했다. 그러나 스티브 잡스는 워즈니악이 만든 '애플2’로 명성을 얻었다. 1984년 애플은 잡스 주도로 매킨토시를 출시하면서 라인업을 완전히 바꿨다. 매킨토시는 열정적인 마니아 층의 지지를 얻었지만 상업적인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스티브 잡스는 펩시콜라의 부사장이었던 존 스컬리를 고용했다. 반면, 스티브 잡스는 카리스마 있고 활동적인 고용인이었다. 매킨토시 사업부는 그의 직속 관할이었다. 그는 또한 산만했다. 신경질적인 성격 탓에 매킨토시팀과 스티브 잡스는 불협화음을 냈다. 결정적인 것은 애플이 마케팅방식에 대한 두사람의 견해차였다. 이사회와도 계속 갈등을 일으켰다.
결국 애플 이사회는 스티브 잡스를 퇴출하기에 이른다. 이사회는 IBM, 컴팩 등의 회사와 경쟁에서 밀렸다는 점을 들어 잡스를 퇴출했다.
잡스가 퇴출된 후 12년간 애플은 파산 직전까지 갔다. 1990년대 중반 애플은 매킨토시 OS의 전면적인 교체를 단행할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1996년 애플은 스티브잡스가 설립한 넥스트(NeXT)를 인수한다. 이 회사는 맥 OS X와 iOS의 토대가 된 기술을 갖고 있었다. 당시 애플의 CEO였던 질 아멜리오는 1997년 그의 사무실에서 쫓겨났고, 스티브 잡스는 회장이자 CEO로서 애플에 재입성했다. 이후 10년 이상 애플을 이끈 잡스는 아이팟, 아이폰, 아이튠스, 아이패드 등으로 IT산업 전체를 뒤흔들다가 최근 사임했다.
■SCO 딜 맥브라이드의 리눅스 붕괴작전
2003년이었다. SCO그룹은 IBM이 리눅스에 유닉스 코드를 삽입, SCO의 지적재산권을 침해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SCO는 리눅스 판매업자 칼데라시스템즈에 주식을 공개해 산타크루즈 오퍼레이션으로부터 유닉스 사업을 취득했다.
그 후 리눅스 사업을 해체해 IBM이 독점적 유닉스 기술을 오픈 소스 리눅스에 부적절하게 사용해 유닉스에 대한 라이선스 계약을 위반했다고 주장하며 IBM과 노벨, 레드햇 등의 리눅스 진영을 제소한 것이다.
2007년 SCO가 제기한 저작권이 노벨에게 있다는 판결이 났다. 노벨은 SCO가 썬과 MS에 대한 유닉스 라이선스를 나눠야한다는 내용의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에 휘말렸던 IBM, 노벨, 레드햇은 SCO에 공동으로 역공을 폈다.
SCO는 2007년 파산신청을 했다. 유니시스에 유닉스 자산 대부분도 매각했다. SCO는 파산을 피하면서 유닉스 소송을 지속하기 위해 자산 매각 대상을 물색했다. IBM과 노벨은 SCO 자산의 압류를 추진했다.
유닉스 저작권 소송도 벌였던 SCO는 지난해 결국 최종 판결에서 패배했다. 회사를 살릴 것으로 기대했던 마지막 희망은 그렇게 사라졌다.
■역사상 최악의 M&A, AOL과 타임워너
인터넷과 웹이 발흥하면서 브로드밴드 산업은 1990년대 후반까지 황금기였다.
1983년 퀀텀컴퓨터서비스로 문을 연 AOL은 인터넷 시대를 대표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디지털 미디어 콘텐츠를 보유한 만큼 웹 시대의 알짜배기 회사로 보였다.
2000년 1월 AOL의 스티브 케이스 회장과 미디어재벌 타임워너의 제럴드 레빈 회장은 AOL과 타임워너의 합병을 발표했다. AOL은 1천820억달러 규모의 주식과 부채를 포함해 1천820억달러에 타임워너를 인수했다,
이 결합은 시가총액 3천500억달러규모 회사를 탄생시켰다. 연매출 300억달러의 대기업이 탄생할 듯한 분위기였다.
2000년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의 닷컴 거품이 꺼졌다. 주가폭락이 이어졌고, 파산기업이 속출했으며, 야반도주가 다반사였다.
AOL은 2002년 1천억달러의 적자를 기록한다. 2005년 2천억달러에 달하던 주식가치는 사라졌고 시가총액은 750억달러로 쪼그라들었다.
AOL의 타임워너 인수가 역사상 최악의 M&A로 불리는 것은 실적 부진에 국한된 결론이 아니다. 인수 당시 900억달러 규모였던 타임워너를 2배이상으로 고평가한 것이 AOL이 승자의 저주에 빠진 이유였다.
합병 10년을 맞은 2010년 1월 제리 레빈 전 타임워너 최고경영책임자(CEO)는 무모한 합병이었다는 점을 시인했다. 당시 회사 주식의 가치가 과대포장됐었다는 것이었다.
지난해 12월 AOL은 결국 타임워너를 분사했다.
■야후의 제리 양, MS 인수제안 거절
야후는 1990년대 최초의 검색엔진 회사로서 빠르게 성장했다. 금융권 뉴스, 웹/이미 호스팅(플리커) 같은 소규모 웹서비스 기업들 꾸준히 인수하며 자신의 서비스에 붙였다.
야후의 성공가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구글, 페이스북과 같은 새로운 강자가 시장에 등장하자 야후는 급속도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힘든 시간을 보내던 중 MS가 야후에게 인수를 제안했다. 인수제안금액은 47조원에 이르는 엄청난 액수였다. 공동창업자이자 CEO였던 제리 양은 정식으로 인수제안을 거절했다. 공식적인 거절 이유는 야후를 과소평가했다는 것이었다.
수주에 걸쳐 인수합병 논의가 진행됐지만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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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후의 주주였던 칼 아이칸은 마지막으로 SW 거인을 협상 테이블로 다시 끌어다 앉히기 위한 마지막 시도를 진행했다. 이사회를 통해 제리 양 사임을 압박했다. 그러나 스티브 발머 MS CEO는 이미 극도로 분노해 있었고, 야후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버렸다. MS는 자체적인 검색엔진을 개발해 빙과 윈도라이브라는 자체 상품을 내놔버렸다.
2011년 야후의 시장가치는 17조8천억원이다. 3년만에 가치가 절반 이하로 줄어든 것이다. 2009년 제리 양은 야후 CEO에서 물러나 캐롤 바츠를 CEO에 임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캐롤 바츠의 야후는 2009년 검색엔진으로 MS의 빙을 채택하는 10년 계약을 체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