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실리콘밸리의 한 개발자 B씨를 만나서 소프트웨어 개발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눴다. 과거에 같이 일했던 친구인데 미국에서 태어난 중국인으로 미국 대학을 나와 실리콘밸리에서 20여년간 개발자로 일을 했으며 10여년간은 몇몇 회사에서 CTO로 있었던 친구다.
B씨는 최근에 한국 소프트웨어 회사(가칭 A사)와 많은 교류를 한 모양이다. 한국 회사에 자사 기술을 전수하기 위해서 실리콘밸리와 한국을 오가며 수개월간 한국 개발자들과 같이 개발을 해왔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A사에 대해서 느낀 점을 필자에게 얘기를 해줬는데 A사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여러 회사에 공통적으로 해당하는 내용이 있어 소개할까 한다.
B씨는 일단 처음에 A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했다. 그런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규모가 꽤 큰 서비스인데 시스템에 버그가 너무 많고 문제가 자주 발생한 것이다.
직원들의 야근도 너무 잦았다. 또 스크럼을 도입해 개발한다고 하는데 제대로 효과를 보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런만큼 B씨는 A사가 스크럼이든 설계든 개발 절차에 담긴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형식만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에 나는 B씨에게 “설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했다. B씨는 “설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콤포넌트를 잘 나누는 것”이라는 당연한 얘기를 했다.
B씨는 계속 얘기를 했다. 설계에 UML을 사용했는데 보통 UML은 필요가 없다. 우리는 대부분 칠판에 설계를 하다가 고치기를 반복한 후 사진을 찍어서 문서에 포함한다. 툴을 이용해서 다시 그리는 것은 시간 낭비다. 마지막 버전을 툴로 그리기도 하는데 정해진 툴도 없다. UML을 이용해서 쓸모도 없는 다이어그램을 잔뜩 만든 문서는 개발에 도움이 안되고 오히려 방해가 된다. 툴을 이용하면 칠판보다 고치기가 어렵고 다이어그램을 많이 그릴수록 고치는데 시간이 많이 들어가 바로 고칠 수가 없다. 또 A사 설계는 콤포넌트가 명확히 구분되어 있지 않아서 나눠서 협업하기 어려웠고 반대로 설계 내용은 너무 상세해서 오히려 비효율적이었다.
나도 동감을 했다. 개발자가 알아서 할 부분까지 설계를 할 필요는 없다. 겉보기에는 A사의 설계서가 실리콘밸리의 한 개발자가 칠판에 끄적거린 설계서보다 멋져 보이고 전문적인 것 같지만 실전에선 훨씬 비효율적이다.
설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소프트웨어 성격에 따라 다르지만 설계 원리와 진의를 모르고 많은 다이어그램과 상세한 설계서는 식제 개발을 할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많은 회사들이 UML 등을 이용해 완벽한 설계서를 만들려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시도가 성공적이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B씨가 A사에 대해 또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애자일(Agile)을 적용한 방식이다.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은 거의 대부분 애자일 개발 방법론을 적용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애자일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과거부터 해오던 방식과 비슷하다. XP를 도입한 회사도 있고 스크럼을 쓰는 회사도 있는데 회사마다 필요한 것을 활용하고 있다. B씨 회사는 XP의 페어 프로그래밍(Pair programming)과 TDD를 사용중이다.
과거 프로젝트에서는SRS를 썼는데 지금은 TDD로 바꿨다. 테스트는 거의 자동화 되어 있고 별도 테스터가 없어도 시스템에 버그는 거의 없다. A사의 경우 컨설팅을 받아 애자일을 적용했는데 들어보면 별로 애자일스럽지 않아 보인다. 마케팅적으로 요구사항이 신속히 바뀔 뿐인 것 같다.
시스템이 복잡하여 야근도 잦은 것 같다. 또 개발자의 자유도도 낮아 보인다. 쓸데없는 문서도 많이 만들어야 하고 테스트도 오래 걸린다. 그러다 보니 시스템에는 항상 버그가 잔뜩 있다.
이상한 점은 또 있다. 비싼 툴을 너무 많이 쓴다는 것이다. 그 친구는 실리콘밸리에서 주로 스타트업 에 많이 다녔는데, 한국 회사처럼 툴을 그렇게 많이 사용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지금 다니는 회사는 서브버전(Subversion)과 트랙(Trac)만 쓰고 있는데 회사를 지금 시작했다면 Git를 선택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굳이 지금 서브버전을 Git로 바꿀 생각은 없다.
나머지 필요한 툴은 간단한 스크립트로 만들어서 쓰고 있다. 그에 비해 A사를 비롯해서 많은 한국 회사들은 일단 툴을 많이 사용한다. 비싼 툴을 사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회사 역량에 비해서 툴을 과도하게 사용하는 것은 그렇게 효율적이지 않다. 툴은 하나를 쓰더라도 제대로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A사는 직원들에게 노트북을 지급했다고 하는데 직원들이 노트북을 집에 가져가서 일을 하지 않는 점이 이상하다. 실리콘밸리에서 스타트업에 다니는 개발자들은 거의 노트북을 집에 가져가서 장소를 구분하지 않고 일을 한다. 개발자마다 다르지만 그 친구는 늦게 출근하고 일찍 퇴근하지만 노트북을 가지고 다니면서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하루에 10시간 이상 일을 한다고 한다.
A사는 야근도 꽤 많이 하지만 집에 가서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해 보였다. 한국의 모든 개발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재택근무가 일상화된 실리콘밸리와 한국은 좀 다른 것 같다.
물론 한 개인이 한 회사를 보고 느낀 점을 얘기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모든 회사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B씨와 나눈 얘기들에서 생각해 볼 요소는 많다. 국내 여러 기업이 실리콘밸리의 개발문화와 개발방식을 적용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대부분 원리와 의미는 파악하지 못하고 수박 겉핧기 식으로 형식만 흉내를 내고 있다.
설계는 하지만 설계를 왜 하는지를 잘 모르고 애자일을 적용하면서 그 원리를 모르고 남들은 어떻게 하는지 보고 흉내를 내는 것이다. 원리는 같지만 회사마다 적용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남들을 보고 흉내 내거나 인터넷이나 책을 보고 적용하면 이런 현상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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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 흉내에서 벗어나려면 무엇을 하나 하더라도 그 진의를 파악하는데 노력해야 한다. 주변에서 흔히 "남들은 어떻게 하나요?", "템플릿(Template)을 가져다 주면 해볼께요.", "샘플을 보여주세요."와 같은 얘기를 한다. 남들이 만들어 놓은 설계서 샘플을 가져다가 흉내를 내면 자칫 아니 한만 못한 경우도 많다. 샘플이 득보다는 독이 되는 경우가 많다.
샘플보다는 이걸 왜 하는지 원리를 파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스스로 진의를 파악하기 어렵다면 주변에 멘토가 될만한 사람에게 물어보고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