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구코너]앨런 튜링… 비운의 컴퓨터 선구자

1954년 6월 7일 =독사과로 생을 마감한 천재

일반입력 :2011/06/01 08:38    수정: 2011/06/09 23:37

이재구 기자

암호를 풀지 못하면 영국민의 식량이 가라앉는다

“에니그마(수수께끼)를 풀어라.”

1939년 9월 4일 영국이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면서 2차대전 참전을 선언한 다음 날. 런던북쪽 64km 지점. 이른바 블레츨리(Bletchley) 파크의 괴짜 수재들에게 긴급 임무가 전달됐다.

이들은 영국전역에서 모여든 사람들로서 이집트학자, 십자말풀이 전문가, 체스챔피언 등이 다양한 재능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영국정부의 암호해독팀(GC&CS)이 독일군의 암호기계 이른바 ‘에니그마(Enigma)'의 비밀을 풀기 위해 영국정부가 국가 프로젝트를 위해 특별 선발한 두뇌그룹이었다.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은 사흘 전인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인류역사상 최악의 전쟁인 2차대전을 촉발시켰다. 폴란드의 함락은 몇 주일도 안 걸렸다.

이듬 해 영국군의 상황은 더 급박해졌다. 작전수행의 최대 골칫거리는 독일의 잠수함 U보트였다.

영국민은 독일군의 도버해협 봉쇄로 대서양건너 미국에서 오는 상선에 식량과 물자를 의존해야 했다.

하지만 미국 상선이 U보트에 의해 여지없이 격침되면서 영국은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미국은 1941년 12월7일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이 있기 전까지는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고 참전하지 않고 있었다.

“암호를 풀어내지 못하면 영국국민의 보급물자와 식량이 배와 함께 가라앉는다.”

영국군은 비장한 심정으로 블레츨리파크의 요원들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독일군은 당시 한창 기술발전의 절정에 오르고 있던 무선기술을 이용해 에니그마로 생성한 암호를 주고 받았다. 그리고 전쟁을 일으킨 히틀러와 동맹을 맺은 뭇솔리니의 이태리군 지역사령관들역시 에니그마를 사용하고 있었다.

■절대적 암호체계 에니그마가 깨지는 실마리

에니그마는 언뜻 보기에 타자기처럼 생겼지만 타이핑한 메시지가 전기기계 신호로 바뀐다는 점에서 타자기와 다른 기계였다. 이 기계는 자판, 스크램블러,램프보드 등 세 개의 원판 톱니바퀴와 반사경으로 이뤄져 있는데 이 톱니바퀴를 장착하는 순서에 따라 전혀 다른 암호체계를 만들 수 있었다.

또 톱니바퀴 둘레에 알파벳을 나열하는 방법에 따라서도 완전히 다른 암호가 나오는 데다 반사경을 이용해 두 알파벳을 바꾸면 무려 2,418,983,437,669,710,912,000개의 경우의 수가 발생할 수 있다는 그야말로 수수께끼같은 기계였다.

이후 독일은 톱니바퀴 수를 더욱 늘려 경우의 수를 더욱더 크게 만들었다. 독일군은 이 무수한 경우의 수 가운데 몇가지를 골라 암호책을 만들어 배포했다.

그날 그날 사용할 에니그마의 상태를 기록한 이 책의 유효기간은 한달에 불과했다. 암호해독 코드는 매일 바뀌었다.심지어 나중에는 여덟시간마다 바뀌기도 했다.

하지만 독일군은 이 에니그마암호 생성 체계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갖고 있었던 만큼 전세계에서 본국으로 보내는 비밀문서 전송이나 군작전용 통신에도 어김없이 이 암호체계를 사용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스틸로 슈미트라는 독일인이 이 완벽한 에니그마 해독에 대한 최초의 실마리를 제공하면서 철벽 코드체계는는 깨지기 시작한다.

“도대체 정부가 내게 해 준 게 뭐야?”

19381년 한스는 렉스라는 암호명의 프랑스 비밀요원과 벨기에 베르비에의 그랜드 호텔에서 만난다.

그리고 1만마르크(오늘날의 3천만원 정도)를 받는 조건으로 ‘암호기계 에니그마 지침서’와 ‘암호기계 에니그마 암호해독법’이란 서류를 넘겨 버렸다.

독일장교로 임관돼 1차대전에 참전했다가 자질 부족으로 군을 쫓겨난 그였다. 그는 승승장구하면서 독일 비밀통신조직인 통신군단을 지휘하던 형 휘하의 에니그마부대 서류를 빼내 조국과 형에게 복수를 하고자 했다.

1918년 독일의 발명가 아르투르 쉬르비우스와 그의 친구 리하르트 리터가 개발한 암호기술 에니그마는 이렇게 프랑스측으로 넘어갔고 여기서 이웃 폴란드로 건네졌다.

폴란드 암호해독반의 마리안 레예프스키가 1년만에 이 암호를 풀었고 해독기계 봄베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1938년 들어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폴란드의 독일군 암호 엿보기는 독일군이 암호보안을 강화하자 멈춰버렸다.

독일침공은 목전에 있었고 보안이 강화된 암호풀기는 막혀 버렸다.

“이럴 수가!”

1939년 6월 30일 바르샤바로 긴급히 초청받은 프랑스와 영국의 고위암호해독전문가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폴란드 측은 에니그마를 해독하다가 멈춘 사실, 봄베를 만들어 그간 독일군을 도청한 사실을 알리면서 이와 함께 봄베의 청사진과 에니그마 복제품을 넘겨주기로 했다.

그것만 해도 전세계 암호해독 기술수준을 10년은 앞선 것이었다.

1939년 8월16일. 폴란드 정부는 항구에 있는 독일 첩보원의 눈을 속이기 위해 폴란드 여배우 부부의 짐속에 에니그마 복제품을 몰래 실어 런던으로 옮겼다. 2주일 후인 9월 1일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했고 제2차세계대전은 시작됐다.

■앨런튜링, 보안이 강화된 에니그마를 깨다

블레츨리파크의 멤버들은 폴란드에서 건너온 에니그마를 바탕으로 ‘울트라(Ultra)’라는 암호해독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그렇다 독일군들은 매일 새벽 6시 조금 지나면 일기예보를 암호화해 송신한다. 따라서 오전 6시5분에 도청된 암호문에 날씨라는 독일어 ‘wetter’란 단어가 들어있을 확률은 100%에 가까울 것이다.”

울트라 멤버중 한명이 보안이 강화된 에니그마 암호를 풀 궁리를 하던 중 차츰 실마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이듬 해인 1940년 3월 18일. 에니그마 메커니즘을 부분적으로 모방한 새로운 기계가 소개됐다. 폴란드의 암호해독가 레예프스키가 만든 이전 기계처럼 '봄베(Bombe)'로 이름 붙여졌다. 하지만 기능에서 달라졌다. 시간당 1만7천576가지의 가능한 암호조합을 20분 안에 잡아 낼 수 있었다.

사람 키 높이의 커다란 냉장고를 연상시키는 무게 1톤짜리의 이 기기는 108개의 드럼과 톱니바퀴․펀치테이프․전기회로 등으로 이뤄졌다.

이제 조금 시간이 걸리기는 해도 독일 잠수함 U보트의 이동상황을 파악해 사전에 대비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듬 해 2호기가 설치되면서 그 해에만 178개의 독일 암호 메시지를 해독해 냈다.

‘울트라’프로젝트 성공의 주역은 26세의 앳띤 청년이었다. 그의 이름은 앨런 튜링이었다.

그는 이미 4년 전 22세의 나이로 독일의 저명 수학자 다비드 힐베르트가 낸 20세기 수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이른바 '결정문제(Entscheidungs problem)'를 만나면서 이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내 놓고 있는지도 몰랐다.

힐베르트의 문제는 독창력이 요구될 뿐만 아니라 고된 단순작업도 함께 수반해야 풀 수 있었다. 끝없는 반복계산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튜링은 과거 선구적 수학자들처럼 반복 계산작업은 인간에게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시킬 뿐이며 이는 기계의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기계가 따라할 수 있는 명료한 지침서가 있다면 어떤 수학적 문제도 풀 수 있는 기계를 설계할 수 있을 거야!“

앨런 튜링은 ‘튜링기계’라고 불리는 만능기계(Universal Machine)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는 이 '가상의 기계'를 이용해 힐베르트의 문제가 제시하는 참과 거짓을 증명할 해법을 내놓으며 실력을 인정받았던 청년이었다.

그리고 그 성과는 절체절명의 위기속에 빠진 영국을 구할 성과물을 내놓기에 이른 셈이 됐다.

튜링은 연이어 케임브리지대학의 맥스웰 뉴먼교수와 설계한 새 기계 히드 로빈슨(Heath Robinson)으로 독일군의 암호 해독에 속도를 더했다. 당시의 전기기계가 사용했던 전화교환기보다 1천배가 빠른 논리적인 연상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었다.

초당 1천자씩 들어오는 문자를 동기화해 롤(roll)방식의 종이테이프에 찍어낼 수 있도록 한 영국우체국 교환기 엔지니어 토미 플라워(Tommy Flowers)도 기쁨을 함께 했다.

■프로젝트 피시와 컬로서스의 등장

“독일군이 암호를 바꾸었습니다. 튜링박사가 독일군 암호 텔레타이프를 해독해 주시오.”

1943년 영국 국방부는 그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했다.

독일 해군이 에니그마 암호체계를 바꿔버리면서 기존 암호 해독기는 무용지물이 됐다.

독일의 새로운 암호체계는 ‘피쉬(Fish)'로 불렸다. 특히 히틀러가 간부들간의 통신에만 사용됐던 것으로서 이 암호 해독문제가 연합군에게 시급한 문제로 부상하고 있었다.

피쉬의 암호는 알파벳을 5자리의 2진수로 코드화한 후 비트조작을 해 암호화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에니그마를 풀던 봄베와는 완전히 다른 구조의 암호해독기가 필요했다.게다가 영국공군은 대잠수함 작전을 할 만한 충분한 성능의 레이더를 갖추지 못해 조바심하고 있던 참이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공군기들로부터 진주만 공습을 받고 나서야 참전을 선언한 미국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독일 U보트들은 이제 ‘두 번째 해피타임’이라고 알려진 시기를 맞아 연합군 배들을 마음껏 침몰시키면서 활개치고 다니고 있었다. U보드를 막으려면 한시가 급했다.

“드디어…… 풀었다!”

1943년 12월 정부의 전폭적 지지 속에 1년여 만에 새 암호 해독기를 만든 블레츨리 팀은 환호했다. 진공관으로 작동되는 전자식 암호해독기 ‘컬로서스 마크 I(Colossus Mark I)이 마침내 가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컬로서스는 거의 매일 사람이 힘들게 구성을 바꿔줘야 하는 기기였다. 독일군이 메시지 전송 방식의 세부사항을 정기적으로 교체하는데 맞춰 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컬로서스는 10자리 수의 덧셈과 뺄셈은 물론 0.2밀리초 내에, 곱셈은 3밀리초 이내에, 나눗셈과 곱셈은 20밀리초 이내에 풀어낼 수 있었다.

이로써 영국군은 독일군 텔레타이프 암호의 90% 가량을 해독할 수 있었다. 1주일 걸리던 것을 몇시간 만에 해독해 낼 수 있었다.

오늘 날 암호해독을 위해 출발한 컬로서스는 최초의 프로그래밍 가능한 컴퓨팅기계라는 의미와 함께 인류 역사의 향방을 단시간에 좌우한 최초의 컴퓨터라는 의미까지 부여받고 있다.

기계의 성능개선에 박차를 가한 튜링은 1944년6월 개량된 컬로서스 마크II를 내놓았다. 2천400개의 진공관에다 800개의 전자기식 릴레이를 덧붙여 설계한 이 컴퓨터는 더욱더 빨라졌다.

이로써 연합군은 2차대전의 결정적 승기를 잡게 될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대비할 수 있었다. 노르망디해안에 배치된 독일군 해안포대 위치까지 지도까지 만들어 낼 정도였다.

“아이젠하워의 독일 대공격을 위한 장소로 노르망디가 결정된 것은 블레츨리팀의 정보에 근거해 결정된 것이었습니다.”

2010년 2월2일 BBC와의 인터뷰에서 블레츨리의 유일한 생존자 제리 로버츠가 증언했다.

독일은 연합군 상륙지점을 칼레해안으로 예상하고 병력을 그곳으로 집중시켰다. 독일군은 여전히 블레츨리팀의 존재를 모른 채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에니그마와 텔레타이프로 모든 비밀 문건을 작성하고 있었다.

■극비였던 인류사를 바꾼 컴퓨터팀의 역할

“블레츨리팀의 활동을 비밀로 부치시오.”

처칠수상은 2차대전 중 블레츨리팀의 활약과 에니그마, 그리고 컬로서스의 존재에 대해 극비사항으로 묶어 놓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와함께 영국은 2차대전 후 독일로부터 수거한 수천대의 에니그마를 영연방 국가에 배포했다. 영국에게서 받은 이 암호제조기가 해독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이들 국가의 비밀통신 내용은 영국에 오랫동안 그대로 흘러들어갔다.

그 비밀 속 블레츨리 파크 팀의 이야기는 1974년 여름에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울트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윈터보덤 대위가 영연방국가들이 더 이상 에니그마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며 정부에 비밀 공개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그는 결국 1974년 여름 ‘울트라 시크릿(Ultra Secret)’이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는 블레츨리 암호해독 요원들의 공로가 공개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됐다.

블레츨리 파크 팀의 존재를 되도록 늦게 공개한 데에는 또 다른 배경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블레츨리팀은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해 독일군이 인구20만의 코벤트리시를 공습할 것이라고 보고했지만 처칠은 손을 쓰지 않았다. 처칠수상은 세계대전 승리라는 대의를 위해 자국민 수백명의 사망대신 암호해독반의 기밀 보호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

컬로서스도 1974년에서야 존재를 드러낸 최초의 ‘프로그래밍 가능한 컴퓨터’였다.

■50년을 앞서다

전쟁이 끝난 후 튜링은 영국국립물리학연구소(NPL)에 무한히 변동 가능한 기계, 즉 자신의 만능기계에 대한 연구를 지원해 달라는 요청을 넣었다.

“하나의 기계에 추가 부품을 더하지 않고 프로그램만 바꿔서 다양한 종류의 온갖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튜링은 당시 영국 최고의 과학행정가인 찰스 다윈 경에게 설명했다.

“어떻게 특별한 목적이 아닌 기계를 만들 수 있는가?”

불행히도 다윈 경은 그의 설명에 대해 반박만 할 뿐 그를 지원해 줄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매번 새로 하드웨어를 만들 필요가 없는 기기를 만들겠다는 튜링의 아이디어는 그렇게 허공으로 사라졌다. 누구나 다 50년 이후에나 이뤄질 일을 튜링처럼 생각해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컬로서스로도 성이 차지 않았다. 청년 앨런 튜링의 머릿속엔 자신이 1937년 런던 수학학회보에 제출한 논문에서 제안한 ‘만능기계(Universal Machine)'가 떠올랐다.사실 당시 그가 생각한 것은 단순했다. 당시의 타자기로 스캐닝하고, 읽고, 무한한 테이프에 실린 명령어 장치를 이용한 기계를 만들어 다양한 기능을 수행시키는 것이었다. 그건 기계장치에 계산순서를 미리 입력하면 컴퓨터가 실행될 때 그 내용을 순서대로 처리하는 프로그램 내장방식의 그야말로 만능기계였다.

또 프로그램만 바꾸면 계산기로도, 스프레드시트로도, 그리고 워드프로세서로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기계의 개념이었다.

바로 현대적 컴퓨터였다. 이 개념은 후일 폰 노이만에 의해 그대로 에니악(ENIAC)으로 이어졌다.

이후 스페리 랜드의 유니백, IBM의 시스템360, DEC의 PDP-8, 애플컴퓨터, IBM PC 등으로 그의 만능기계 개념은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부품과 IT의 발전 흐름을 타고 오늘날 보다 진보된 형태로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컴퓨터'란 형태로 나타난 것일 뿐이었다.

오늘날 그의 신기한 수학적 로직에 대한 성과를 이해할 일반인은 드물다. 하지만 그가 사용한 아이디어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튜링과 다윈경의 대화 이후 약 50년. 인류는 컴퓨터라는 하나의 하드웨어로 인터넷서핑․메신저․이메일․영화감상․블로깅․워딩․계산 등을 모두 처리할 수 있게 됐다.

튜링은 이후 인공지능과 자기인식의 속성에 대한 논문 몇 편을 발표했는데 이조차도 그의 사후 현대인지과학과 컴퓨터 과학의 토대로 인정받게 된다.

■수학천재와 두 번의 커밍아웃

인도 오릿사지역에서 대영제국의 공무원을 하던 그의 아버지는 어린 시절 그와 형을 친구네 집에 맡겼다. 튜링기계로 불리는 만능기계를 최초로 고안한 이 소년은 고독한 천재로 자라났다.

1929년, 튜링의 어머니는 뒤늦게 수학천재인 열일곱 살 아들의 이상한 취향에 조바심을 갖게 됐다. 아들은 나이가 좀 많은 크리스토퍼 모콤이란 남자 동급생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어머니, 저는 모콤과 함께 해낼 일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이제 나만 혼자 남아 그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함께 수학적․과학적 역량을 길러가고자 생각했던 아들의 친구가 갑자기 결핵으로 사망하자 보내온 아들의 편지에는 낙담이 배어 있었다. 튜링의 종교적 신념은 산산조각 났고 그는 무신론자가 됐다.

그는 인간의 두뇌에서 발생하는 작용을 포함해 모든 현상을 의구심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그에게도 40년대 말 블레츨리 파크에서 일할 때 남녀의 사랑 비슷한 것이 왔다.

조앤 클라크라는 케임브리지 수학과 출신의 여학생이 블레츠키파크의 그의 부서로 파견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그녀에게 털어놓았음에도 조앤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들 사이에는 연인 비슷한 감정이 자라났다.

하지만 블레츠키파크의 잔디밭에 나란히 누워 데이지 꽃을 꺾어 가며 꽃의 수학적 형상을 얘기하고 야간교대근무를 마치고 새벽 체스를 하던 그녀와의 만남은 결국 깨져 버렸다. 동성애자와 결혼하는 것이 현명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가 떠난 것이다.

■사과를 베어 문 백설공주처럼

케임브리지대나 맨체스터에서 자신과 함께 연구할 지적 동반자도 찾지 못한데다 사랑할 사람도 사라져버린 앨런 튜링의 몸과 마음은 망가져만 갔다. 조앤과의 결별 후 진실한 사랑을 체념한 그는 가끔씩 '우연한 만남'으로 외로움을 달랬다.

고독했지만 재능을 보이던 장거리 마라톤 등으로 잘 버티던 그에게 1952년 1월 운명적인 일이 생겼다. 아놀드 머큐리란 19세 된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 것이 발단이 됐다.

그가 공범에게 튜링의 집 위치를 알려주어 집을 털어간 것이었다. 튜링은 분개했고 경찰에 신고했지만 수사과정에서 자신의 동성애적 취향도 탄로날 수 밖에 없었다.

동성애는 당시 영국에서 중대범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유명 작가인 오스카 와일드도 이미 50년 전 쯤에 동성애로 곤욕을 치른 적이 있지 않았던가?

영국의 한 타블로이드 신문에는 그에 대해 “엄청난 두뇌를 가진 피의자”로 보도됐다.

결국 그는 수감되거나 동성애 성향을 치료받기 위해 여성 호르몬을 맞는 처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1953년 4월 그에 대한 처방은 끝났지만 절망스럽게도 그의 가슴은 여자처럼 커져 버렸다.

1954년 6월 7일 영국 북부 맨체스터 윔슬로우의 비내리는 저녁. 튜링은 어린 시절의 연인 모콤이 죽은 후 그를 생각하면서 읊던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 나오는 대사를 읊었다.

독이 든 사과를 깨문 공주가 그 즉시 영원한 안식에 드는 대목이었다. 그러면서 튜링은 사과하나를 들어 실험에 사용하던 청산가리 용액을 주사기로 주사했다. 다음날 사람들이 숨진 그를 발견했을 때 그의 옆에 떨어진 사과에는 여러 번 베어 문 자국이 있었다.

1966년 이래 ACM이란 단체는 그의 이름을 따 수학계에 가장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에게 상을 수여하고 있다. 2009년 이후 수상자의 상금은 노벨상 상금을 60%이상 웃도는 25만 달러가 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해 존 그레이엄 커밍스란 인물은 영국정부에 앨런 튜링에 대한 사후 사면을 청원했고 고든 브라운 총리는 이를 받아들여 사후 55년 만에 그를 사면했다.

1999년 3월 29일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그를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인물 100인에 선정했다. 2007년 6월19일 블레츨리파크에서는 앨런 튜링을 기리는 동상제막식이 열렸다.

오늘날 우리가 폰 노이만식 컴퓨터로 부르는 컴퓨터가 앨런 튜링식 컴퓨터라는 사실은 그의 선구자적 위치를 새삼 일깨워 준다.

아이폰과 아이패드 등으로 세계 IT업계에서는 가장 잘 나가고 있다는 애플의 로고 '베어 문 사과'가 앨런 튜링의 사과를 상징한 것이란 얘기도 그럴 듯하게 회자되고 있다.

■현대컴퓨터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튜링

튜링은 영국 국립물리학연구소에 보낸 보고서를 통해 전자컴퓨터의 일반적 설계의 개념을 펼쳤다. 이어 노이만도 미육군에 보낸 보고서에서 똑같은 의견을 펼쳤다

4가지 기능이란 데이터와 명령을 주입하기 위한 입력, 데이터의 자취를 유지하기 위한 저장(메모리), 실제계산을 하기 위한 연산, 그리고 사용자에게 답을 보여주기 위한 출력이었다. 튜링은 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한 논리적 방법은 2진수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컴퓨터 계산이 스위치의 ‘켜짐(on)'과 ’꺼짐(오프)‘의 반복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켜짐‘에 ’1‘의 값을, ’꺼짐‘에 ’0‘의 값을 할당하기에 충분한 조건이고 두값을 가지고 모든 수학을 다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튜링은 또 노이만보다도 먼저 전자두뇌가 인간두뇌와 대등해질 수 있다는 주장을 내놓은 선구자였다.

관련기사

“언젠가 여자들이 컴퓨터와 함께 산책을 가서 서로 ‘내컴퓨터가 오늘 아침엔 정말 우스운 얘기를 해 줬어.”라는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던 인물이 그였다.1951년 출판된 그의 가장 유명한 논문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에서 약 50년후에는 컴퓨터가 인간의 방식으로 사람이나 다른 컴퓨터와 대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했다.

그의 예언은 체스챔피언을 이긴 IBM의 딥블루(1997)나 제퍼디 퀴즈쇼에서 인간 퀴즈챔피언을 간단히 물리친 인공지능컴퓨터 왓슨(2011)을 통해 서서히 이뤄지기 시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