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파도 속에 흔들리는 방송

윤종수입력 :2007/04/27 13:43    수정: 2011/03/11 11:47

윤종수(서울북부지원 판사)

요즘 라디오 방송을 듣는 거의 유일한 시간은 차를 운전할 때이다. 비주얼이 판치는 이 시절에 나름대로 독자적인 생존영역이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팝송을 듣기 위해 라디오를 부둥켜안고 살았던 어릴 적 시절에 비하면 참으로 소홀한 대접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내 청춘을 바쳤을 정도로 심취했었지만 그때는 그 한곡의 노래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이해가 담겨있었는지는 상상도 못했다. 그냥 가수가 전부인지 알았다. 그러나 한곡의 노래가 방송을 타서 우리 귀에 들리기까지는 많은 이들이 관여하게 된다. 우선 작사자와 작곡자가 있다. 그 다음 그렇게 만들어진 노래를 부른 가수와 반주를 담당한 연주자들이 등장한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가수의 노래와 연주자들의 연주를 녹음하여 음반에 수록한 음반제작자들이 있고, 마지막으로 그 음반에 수록된 노래를 방송으로 내보낸 방송사업자가 있다. 제일 간단한 예를 들어도 이 정도이다.

이해관계인들의 복잡한 사연들

가볍게 흘려버리는 한곡의 노래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관여하였고 그들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다는 사실은 놀랍기까지 한데, 더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그들 중 저작권자로 인정된 사람들은 작곡자와 작사자뿐이라는 점이다. 그럼 작곡자와 작사자를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해관계인들은 아무런 법적 권리가 없다는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권리가 무엇이고, 어떤 이유로 권리가 인정되었으며, 현재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의미 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가수나 연주자, 즉 실연자는 저작물의 전통적인 전달자이다. 음악이라는 저작물은 연주자와 가수에 의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표현되고 전해질 수 있었고, 희곡은 배우라는 실연자에 의하여 실현될 수 있었다. 애초에 그들에게는 권리가 부여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냥 계약에 의해서 그들의 이익이 확보되었기 때문이다. 음악을 연주하고 연극을 공연하려면 언제나 실연자들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그때마다 계약을 체결하여 이익을 얻으면 되었고 또한 실연은 세상에 나타나는 순간 없어져버리기 때문에 따로 권리로서 보호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축음기가 발명되어 음이 녹음되고 필름이 발명되어 영화라는 것이 등장하면서 실연자들은 실업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일부 실연자들의 실연을 저장하고 나면 더 이상 실연자들의 관여 없이도 저작물의 감상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방송이라는 것이 생기면서 그들의 처지는 더 어렵게 되었다. 결국 그러한 새로운 매체의 활용에 대한 그들의 이익을 법적으로 보호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이에 반해서 음반제작자와 방송사업자는 기술의 발전에 따라 새롭게 등장하게 된 저작물의 전달자이다. 1회성에 그치는 실연자의 라이브 퍼포먼스에 비하여 시간적, 공간적 한계를 극복한 저작물의 전달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문화의 확산과 향유를 촉진시킨 크나큰 공헌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어려움이 있었으니 기술은 그들의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 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이 만들어낸 성과를 쉽게 복제하거나 그들의 투자에 무임승차하여 이익을 빼앗는데도 기여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과 같은 새로운 전달자들이 계속 활동할 수 있게 하려면 그들이 투자한 시간과 자본에 대한 대가를 보장해 줄 필요가 있었다. 결국 그들에게도 법적인 보호가 필요해진 것이다.

저작인접권의 진실

이렇게 해서 등장한 것이 저작인접권(Neighboring Right)이다. 새로운 저작물을 창작한 것은 아니므로 저작권을 부여할 수는 없지만 저작물의 표현과 전달에 기여한 자들에게 저작권에 인접한 권리라는 의미의 저작인접권을 인정해 준 것이다. 현행법도 실연자, 음반제작자, 방송사업자를 저작인접권자로 보호하고 있고 그들에게 어떠한 권리가 부여되는지 각각 따로 규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저작인접권의 유래와 목적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두 가지 본질적인 속성을 짐작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산업적 속성이다.

이는 특히 음반제작자와 방송사업자에서 두드러지는데, 애초부터 저작인접권은 그들의 산업적 자본에 대한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서 등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작권이 문화적 영역을 넘어 산업적 특성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저작권 영역에서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음반제작자와 방송사업자 같은 저작인접권자이다. 여기에 여타 기업을 능가하는 수익을 자랑하는 스타라는 실연자 계층이 등장하면서 역시 실연자라는 저작인접권자도 저작권 산업에서 전면에 나타나고 있다. 요즘의 저작권 분야에서 생기는 대다수의 법적 분쟁사례의 당사자가 저작권자가 아닌 저작인접권자들인 이유도 여기에 있고, 현대 저작권법의 주인공이 결코 저작권자가 아니며 저작인접권자들이 저작권의 산업적 특성을 강화하고 있다는 지적도 이런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두 번째는 기술적 속성이다.

실연자와 나머지 음반제작자 및 방송사업자는 기술과의 관련이 전혀 다른 측면에서 고려된 것이기는 하지만 어찌되었든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변화된 환경 하에서 그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등장한 것이므로 저작인접권은 기술의 발전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고 기술의 변화에 아주 민감한 반응을 한다. 물론 저작권자체도 기술이나 과학의 발전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아온 것은 사실이나 저작인접권에서 그 관계가 가장 밀접하게 드러난다. 디지털 시대에 들어와 실연자나 음반제작자의 권리가 확대되는 경향도 그 맥락이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에 따른 급격한 변화는 방송사업자 영역에서 특히 미묘하고 복합적이다.

저작인접권의 보호에 대한 국제협약인 로마협약이 1961년 체결된 후 인터넷과 디지털기술의 발전에 따른 환경의 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좀 더 업그레이드 된 국제적 기준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짐에 따라 실연자와 음반제작자에 대하여 WPPT라는 새로운 조약이 1996년에 체결되었다. 그런데 방송사업자 보호조약은 아직 결실을 보지 못하고 10년 가까이 계속 회의만 하고 있는 실정이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WIPO(세계지적재산권기구)는 지난 1월에 열린 SCCR(저작권 및 저작인접권 상설회의)의 특별회의에 이어 6월에 다시 특별회의를 개최하여 올해 안에 기필코 새로운 방송사업자 보호조약을 마무리하려고 하고 있다. 그 성공여부도 관심꺼리이지만 문제는 조약의 내용이다. 애초에 새로운 방송사업자 보호조약을 체결하려던 목적은 아날로그 시대의 산물인 로마협약의 업그레이드였다. 새롭게 등장한 웹캐스팅 등의 매체를 방송에 확실하게 포섭하여 보호받으려고 하였고 방송의 복제물을 콘텐츠로서 추가적으로 배포하거나 활용할 수 있는 권리를 얻으려했다. 그러나 각 나라마다 보급정도나 사정이 너무나 달랐던 웹캐스팅은 워낙 이해관계가 엇갈려 이번 조약에서는 제외되었다.

방송, 어디에 서야하나

문제는 방송사업자의 권리의 확대부분인데 사실 방송사업자가 이러한 권리의 확대를 들고 나온 것은 기술의 변화에 다른 위기감 때문이다. 전통적인 방송사업자의 수익모델은 광고였다. 즉 방송에 광고를 붙여 수입을 얻었을 뿐이고 방송의 결과물에 대한 활용은 어찌보면 관심 밖이었다. 따라서 제3자가 방송신호를 가로채어 동시에 방송을 송출하는 경우나 녹음이나 녹화 후 다시 재방송 하는 것을 제어함으로써 그들의 방송신호에 무임승차하는 제3자의 행위를 막고자 한 것이다. 현행법도 방송사업자의 권리는 동시방송중계권과 복제권에 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인터넷의 등장과 새로운 매체의 출현은 방송 산업의 위축을 가져왔다. 일반인들의 방송에 대한 의존도가 떨어지고 주 수입원이었던 광고도 다른 매체들에 빼앗기기 시작하면서, 추가적인 콘텐츠의 활용에 의한 수익이 필요해진 것이다. 그래서 특히 TV 방송사업자로부터 방송을 고정한 콘텐츠의 배포나 이를 공중에게 전달하는 행위에 대한 권리주장이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방송사업자의 의도가 성공하기에는 두 가지 큰 걸림돌이 있음이 드러났다. 우선 방송의 보호는 방송에 실린 콘텐츠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콘텐츠를 실어나르는 신호, 즉 signal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본질론이다. 즉 애초에 방송사업자를 보호하려고 했던 이유는 방송신호에 대한 해적행위와 무임승차를 막아 방송사업자가 방송을 위한 시설에 투자하였던 자본을 회수할 수 있도록 한 것이므로 방송신호를 가로채거나 이를 고정하는 행위만 막으면 되지 그 후에 방송물을 콘텐츠로 활용하는 권리를 저작권과 별도로 인정하는 것은 범위를 벗어난다는 논리이다. 나머지 하나는 다른 권리자들과의 이해충돌이다. 실연자나 음반제작자의 경우는 저작권자나 다른 권리자들과 충돌할 여지가 별로 없다. 즉 저작물과 그들의 결과물인 실연, 음반은 완전히 구별되고 오히려 상호보완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송의 결과물은 기존의 저작물과 잘 구별되지 않는다. 영화와 영화방송의 녹화물, 음반과 음악방송의 녹음을 비교해보면 잘 알 수 있다. 따라서 방송사업자의 방송물의 사후적인 활용은 다른 권리자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때문인지 몰라도 계속 논의되어 오던 방송사업자 권리의 확대 주장이 작년 후반기를 기점으로 급격히 힘을 잃는 현상이 생기고 있다. 권리의 확대에 적극적이던 몇몇 국가도 입장에 변화가 생겼다는 이야기까지 들린다. 이것이 인터넷 시대의 매체환경의 변화에 따라 흔들리는 방송의 위상을 반영한 것인지 속단할 수는 없지만 너무나 급격해서 드라마틱하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출근길에 듣는 라디오방송이 마냥 가볍게만 들리지 않는 건 이 때문일까. 잠시 감상에 젖어 본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