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수의 beyond IT] 기계와의 전쟁

윤종수입력 :2005/11/16 05:27    수정: 2011/03/11 11:39

윤종수(서울고등법원판사)

CD는 구경도 못했고, CT(Cassette Tape)도 흔하지 않던 시절, 허접한 CT 레코더로 밤을 세워가며 라디오 음악방송을 녹음하던 때가 있었다. 그 당시 형편으로는 공 테이프를 사기가 부담스러워 방에서 굴러다니는, 주로 부모님이 듣던 가요테이프를 슬쩍 이용했는데, 어떤 CT는 아무리 녹음버튼을 눌러도 요지부동이어서 혼자 열 받아 씩씩거리곤 하였다.

공 테이프를 몇 번 사봤으면 알 수 있었겠지만 당시로는 CT의 한구석에 있는 탭을 부러뜨리면 녹음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지금 생각해도 왜 굳이 탭을 부러뜨리도록 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슬라이드로 구멍을 막았다 열었다 하면 될 것을. 혹시 나 같은 무지한 소비자들로 하여금 계속 새 제품을 구입하게 하려 했던 음모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끈질긴 비교 관찰과 연구(?)로 부러진 탭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궁리 끝에 구멍을 틀어막은 다음 녹음을 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우습지만 당시에는 녹음을 하게 된 것 보다 저항하는 기계를 정복했다는 승리의 쾌감으로 한껏 뿌듯해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비록 가죽점퍼 입은 터미네이터와의 싸움은 아니었지만 ‘기계’로부터 승리를 얻어 자신감을 갖게 된 꼬마는 그 후에도 수많은 기계들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물론 결과는 아주 약간의 승리 외에는 대부분 참혹한 좌절감으로 끝났지만.

새롭게 무장한 디지털 매체와의 전쟁

CT는 어학용 테이프에나 쓰이고, CD도 흔해빠진 요즈음, 그 꼬마는 이미 전선에서 물러난지 오래지만, 인간과 기계와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이전과는 사뭇 달라 보인다. 예전의 전쟁이 시원치 않은 것들을 멋지게 바꿔버리는 modification을 목표로 하였다면, 현재의 전쟁은 뛰어난 것들을 무력화시키는 circumvention 내지는 hacking이 대표적인 모습이며, 그 수준도 CT의 탭 구멍을 매우는 정도로는 어림도 없는 고난도의 전술을 요하고 있다.

특히 저작물을 위하여 새롭게 등장한 디지털 매체들은 그 안에 담겨진 저작물을 원하지 않는 이용이나 침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고도의 기술적 장치로 무장하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어김없이 이와 한판 붙어보려는 전사들을 불러 모았고, 저작물의 잠재적 침해자들은 전사들의 뒤에서 깃발이 올라가기만을 기다리다 성문이 열리면 우르르 몰려가 무장 해제된 전리품을 챙겼다. 저작권자들 입장에서는 저작물 자체에 대한 공격은 이미 오랜 역사를 지닌 경험이었으므로 새로울 게 없었지만, 보호장치에 대한 낯선 전사들의 공격은 그들을 무척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스스로 전리품을 얻고자 보호장치를 공격한 전사들에 대해서는 전리품, 즉 저작물 자체의 침해행위로 반격이 가능하였지만, 승리의 쾌감이든 무엇이든 간에 이와는 다른 의도로 보호 장치들만을 무장해제 시켰던 전사들에 대해서는 저작물에 대한 침해행위와 직접적인 연관을 짓기 곤란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통 개개 장치의 소유권은 이미 이를 구입한 그들에게 있었으므로 무장해제당한 보호장치 자체의 피해를 상정할 수도 없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직접 무장해제에 나서지 않은 채 무장해제 방법만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그 결과는 오히려 이에 자극받은 엄청난 후속 침해자들에 의한 전리품 약탈이라는 참기 힘든 결과이었으므로 저작권자들은 이에 대한 대책으로 보호장치 자체에 대한 공격을 금하는 방법을 강구하게 된다. 이것이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는 “기술적 보호조치”의 도입이다.

기술적 보호조치

기술적 보호조치의 개념은 WIPO 저작권조약 및 WIPO 실연·음반조약에 포함된 후 미국의 이른바 DMCA(디지털 밀레니엄 저작권법)의 핵심적 규정으로 도입되면서 본격적으로 저작권법의 영역에 등장하게 된다. ‘보호장치’로서의 기술적 보호조치로는, 우선 복사방지장치 같은 권한 없는 저작물의 복제, 전송 등의 저작권 침해행위를 막는 장치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끼는 저작권자들을 위하여 일정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이용자들을 아예 저작물에 접근도 하지 못하게 하는 장치가 추가되었다. 따라서 기술적 보호조치는 ‘권리의 침해를 통제하는 장치’와 ‘접근을 통제하는 장치’로 분류된다.

이러한 기술적 보호조치에 대한 공격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보호장치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 이를 무력화 시키는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무력화 기능을 가진 도구 내지 기술을 만들거나 이를 퍼뜨리는 간접적인 공격이다. 기술적 보호조치제도의 주된 목적은 그중 후자, 즉 저작권 자체에 대한 침해와 연결 짓기 가장 힘들었던 간접적인 공격을 진압하는데 있다. 미국의 DMCA는 기술적 보호조치로서 접근통제장치와 권리침해통제장치 모두를 대상으로 함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단 접근통제장치에 대해서는 이를 무력화 시키는 도구의 제작이나 거래 등 간접적인 행위를 금지할 뿐만 아니라 무력화 행위 그 자체도 금지하고 있음에 반하여 권리침해통제장치에 대하여는 무력화 도구의 제작이나 거래만 금지하고 있는데, 이는 직접적인 무력화 행위는 저작물에 대한 침해로 포섭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DMCA가 적용된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DVD의 복제방지장치의 무력화기술인 DeCSS를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행위에 대하여 기술적 보호조치 위반을 적용하였던 케이스이다.

저작권법과 컴퓨터프로그램보호법에 도입된 기술적 보호조치

우리나라는 저작권법과 그 특별법이라 할 수 있는 컴퓨터프로그램보호법에서 각 2003년과 2000년에 기술적 보호조치를 도입하였다.

컴퓨터프로그램보호법은 기술적 보호조치를 “프로그램에 관한 식별번호·고유번호 입력, 암호화 기타 이 법에 의한 권리를 효과적으로 보호하는 핵심기술 또는 장치 등을 통하여 프로그램저작권을 보호하는 조치”라고 규정하고 “정당한 권원 없이 기술적 보호조치를 회피, 제거, 손괴 등의 방법으로 무력화”하는 것과 “상당히 기술적 보호조치를 무력화하는 기기·장치·부품 등의 제조·수입, 공중에 양도·대여 또는 유통과 기술적 보호조치를 무력화하는 프로그램의 전송·배포, 기술적 보호조치를 무력화하는 기술의 제공”을 금하고 있다.

저작권법은 기술적 보호조치를 “저작권 그 밖에 이 법에 의하여 보호되는 권리에 대한 침해 행위를 효과적으로 방지하기 위하여 그 권리자나 권리자의 동의를 얻은 자가 적용하는 기술적 조치”라고 규정하고, “정당한 권리 없이 저작권 그 밖에 이 법에 의하여 보호되는 권리의 기술적 보호조치를 제거·변경·우회하는 등 무력화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기술·서비스·제품·장치 또는 그 주요부품을 제공·제조·수입·양도·대여 또는 전송하는 행위는 저작권 그 밖에 이 법에 의하여 보호되는 권리의 침해로 본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결국 두 법은 모두 권리침해통제장치를 보호대상으로 하여, 그에 대한 무력화 도구의 제작이나 거래 등 간접적인 공격을 금하고 있다. 그러나 컴퓨터프로그램보호법은 더 나아가 직접적인 무력화 행위도 금지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저작권침해행위에 대한 규율과 중복되는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

한편 두 법이 보호대상으로 접근통제장치도 포함하고 있는지는 명확한 것은 아니나 규정내용으로 볼 때 접근통제장치에 대한 무력화 금지는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 유력하다. 사실 저작물 자체에 대한 접근을 금지시키는 접근통제장치는 저작권의 보호차원을 넘는 저작물에 대한 과도한 통제권의 유보라는 측면에서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가령 요금을 내지 않은 사람의 유료콘텐츠에 대한 접근을 막는 것은 그렇다 치고, region code 1번의 DVD를 정당하게 구입하였음에도 가지고 있는 DVD 플레이어가 code 3번이라는 이유로 이를 전혀 재생할 수도 없다면 권리자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보호조치에 대한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국내의 경우 기술적 보호조치와 관련된 판결은 아직까지는 드물다. 기술적 보호조치의 전형으로 볼 수 있는 컴퓨터프로그램의 시리얼 넘버를 홈페이지에 게재한 행위를 기소한 사건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컴퓨터프로그램보호법에 기술적 보호조치가 시행되기 전이어서 기술적 보호조치규정 위반 대신 프로그램저작권 침해로 기소되었으나 시리얼넘버는 그 자체로 프로그램저작물이 아니라는 이유로 저작권 침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대법원 2002. 6. 28. 선고 2001도2900 판결)된 바 있다.

본격적으로 기술적 보호조치를 다룬 최초의 케이스는 Sony Playstation 게임기의 모드칩을 장착하여준 행위를 기술적 보호조치를 무력화한 것이라 하여 컴퓨터프로그램보호법 위반 등으로 기소된 사건으로, 제1, 2심 모두 유죄를 선고하였고 현재 대법원에 상고되어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위 모드칩은 게임기의 지역코드와 복제 CD의 구동을 막는 액세스 코드를 무력화시키는 것으로, 국내법에 접근통제장치의 무력화 금지조항이 포함되는지 여부와 만약 접근통제장치는 보호대상에서 제외된다면 복제 CD의 재생을 막는 새로운 기술인 액세스 코드가 단순한 접근통제장치로서 뿐만 아니라 복제방지장치로서 해석되어 이를 규율할 수 있는지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판단이 있을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접근통제장치를 보호대상으로 하고 있는 미국에서는 이와 유사한 모드칩(게임기의 성능개선과 지역코드회피기능)에 대해서 DMCA 위반을 인정한 바 있다.

기술에 의한 보호막, 묘약인가 독약인가

기술의 발달은 항상 인간에게 양날을 가진 칼을 쥐어주었다. 인터넷의 급격한 부흥은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하였던 커뮤니케이션의 확대를 가능하게 하였지만, 반면 간단한 몇 가지 조작만으로 연결의 끈을 순식간에 차단해버리는 기술 또한 가져다주었다.

디지털시대의 도래와 새로운 매체의 출현은 인류문화의 전파와 지적재산의 확대를 가져다주었지만, 한편 무차별적인 접근차단과 과도한 보호라는 더 심각한 문제를 동시에 야기하였다. DVD는 디지털포맷 자체로서의 복사뿐만 아니라 아날로그 영상출력의 녹화도 불가능하게 되었고, CD를 뒤이을 DVD-Audio나 SACD의 경우 복사가 전혀 불가능하게 되어 CD와 달리 나만의 디스크를 만드는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으며, MP3 파일은 돈을 주고 구입하였음에도 특정기기에서만 플레이 되고, HDTV 방송은 현재는 셋탑 내에 내장된 PVR이나 I-Link를 통한 D-VHS로 디지털 녹화가 가능하나 앞으로의 추세로 비추어 볼 때 최소한 일본 위성방송 등에서 채택하고 있는 한번만 녹화가 가능한 one-time recording이 도입될 것이 예상되므로, 아무리 사용자가 저작권법에서 규정하는 저작권의 효력이 미치지 않는 사적이용에 해당하는 이용을 하려해도 실질적으로 이를 이용할 방법이 없다.

물론 저작권법이 기술적 보호조치를 저작권과 연계시킴으로서 저작권을 위반하는 경우로 볼 수 없는 한 저작물에 대한 기술적 보호조치의 무력화는 위법이 되지 않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사실상 일반 이용자가 기술적으로 이를 해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한 문제는 기술적 보호조치가 저작권이 인정되지 않는 저작물에 적용되는 경우 이는 실질적으로 법이 인정하지 않는 새로운 권리를 창조하게 되는 셈이어서 더 심각하다 할 것이다.

결국 기술적 보호조치가 소모적인 위법행위를 잠재울 수 있는 묘약인지 아니면 인류문화 발전에 독이든 사과가 될 건지는 이를 둘러싼 인간들에게 달려있을 뿐이다. 기계와의 전쟁이 가치판단에서 자유로운 스릴 넘치는 오락이 아닌, 그 뒤에 숨은 인간과의 전쟁이며 대립되는 이해관계의 처절한 투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멋모르고 승리의 쾌감을 뒤쫓다 그 전장에서 물러난 꼬마는 그래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