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한국e스포츠협회의 재미없는 코미디에 박수를

일반입력 :2010/06/02 10:47    수정: 2010/06/03 11:16

한국e스포츠협회(회장 조기행, 이하 협회)와 12개 프로게임단은 지난달 31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블리자드엔터테인먼트(이하 블리자드)와 곰TV와의 계약 발표에 대해 입장을 밝혔다.

이날 기자간담회는 블리자드와 그래텍(곰TV)이 3년간 국내 e스포츠 파트너 계약을 체결한 이후 협회의 첫 공식적인 행보로 'e스포츠 게임단의 분열'이란 위기 의식 속에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또 일부 게임단이 협회와 다른 길을 갈 수 있다는 분위기가 감지되자 협회가 다시 한 번 협상 단일 창구를 공식화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날 발표 내용을 보면 협회는 블리자드의 무리한 요구 때문에 지적재산권(지재권) 협상 파행으로 이어졌다며 ▲게임제작사가 게임단과 방송사, 협회 등 유관기관의 경영까지 간섭하고 소유권을 과도하게 주장하는 것이 정당한지 ▲사실상 최대 수혜자이면서도 리그 초창기에는 침묵하다가 뒤늦게 지적재산권을 주장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협회와 게임단 대표가 공동으로 협상에 임한다면 응할 의향이 있는지 등을 따지고 물었다.

물론 협회는 협상 단일 창구로써 향후 블리자드와 그래텍(곰TV) 등에게 스타리그 및 중계권 관련한 대화 채널을 열어놓겠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최원제 협회 사무총장은 "협회와 게임단의 기본 입장은 블리자드와 대화를 통한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협상타결"이라며 "블리자드가 고압적인 태도와 욕심을 버리고 재협상에 임한다면 적극적인 지원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스타 리그 승부조작 사건 등으로 인해 게임단과 팬들의 신뢰를 잃은 협회는 이날 기자간담회를 통해 국내 e스포츠 시장에서 변하지 않는 주인으로 권한행사에 나설 뜻을 분명히 했다. 그동안 협회는 스타리그 관련 중계권을 판매해 왔으며 스타 리그 운영 및 선수관리 등에 직접적으로 관여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날 협회는 블리자드의 재산 중 하나인 게임콘텐츠를 공공재화할 수 있다고 밝혀 논란이 일고 있다.

협회 측이 주장한 내용을 보면 콘텐츠를 이용하고 이를 유통하는 것은 비즈니스 관계에서 진행되야함에도 아무런 협의 없이 블리자드의 대표 게임인 스타크래프트와 곧 출시 예정인 스타크래프트2를 공공재의 범주 안에 포함할 수 있다.

협회 측은 "스타크래프트가 이미 게임으로서 수명이 다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국내 e스포츠계의 노력을 통해 커왔고 스포츠 종목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는 만큼 공공재로 봐야 한다"고 입장을 전했다.

이는 유명 연예인이 해외에서 한류 바람을 일으켰을 때 이에 큰 도움을 준 미디어와 이해관계자가 연예인을 자유롭게 콘텐츠화해 유통하고 이를 공공재화할 수 있다는 것으로 확대 재해석이 될 수 있어 우려된다.

블리자드는 이에 대해 "어불성설(말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이란 입장을 밝히면서 "스타크래프트가 공공재라는 인식에 대해 전혀 동의할 수 없다. 블리자드가 개발한 사유재일 뿐"이라고 못을 박은 상태다.

또 스타2 출시를 앞두고 갑자기 중계권 등 지적재산권(지재권) 협상에 나섰다는 협회의 주장에 대해 블리자드는 "지난 2007년부터 스타크래프트 관련 지재권 협상을 시작한 것은 협회가 스타 리그 관련 e스포츠 중계권을 팔았기 때문"이라며 불편한 심기 심기를 드러냈다.

협회와 블리자드가 체결한 NDA(기밀유지협약) 계약서 존재여부도 도마 위에 올랐다. 결과적으로 보면 일종에 해프닝으로 끝났다.

협회는 이날 블리자드와 NDA 계약 체결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간의 협상 내용을 공개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협회는 이달 초 블리자드와 어떤 내용으로 협상해왔는지를 공개한 바 있다. 그러나 기자감담회에 참석한 기자가 블리자드 측이 NDA 문건을 보관하고 있다는 소식을 협회 측에게 전하자 당혹스러운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이날 협회는 NDA계약서은 허구라고 밝혔지만 십여 분도 지나지 않아 "문건이 있는지는 현재 확인이 불가능하다. NDA계약을 했다면 마이크 모하임 블리자드 대표가 협상 결렬 소식을 일부 언론사에 흘린 것도 문제다"고 말을 바꿔 주장하는 등 그야말로 재미없는 한편의 코미디를 보여줬다.

업계는 이러한 발언에 대해 협회가 무리수를 둔 것으로 지적했다. 최근 협회가 블리자드와의 NDA 계약을 파기한 이후 일부 언론사에게 뭇매를 맞은 가운데, 이날 기자간담회를 통해 수습하려 했으나 오히려 역풍만 맞았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자의든 타이든 스스로의 무덤을 판 것과 다름 없다.

블리자드에 따르면 지난 2007년 제운호 전 협회 상근이사가 이와 관련된 계약을 맺었고 관련 문건 또한 존재한다. 문건 공개 여부에 대해서 블리자드는 아직 확답을 하지 않았으나 협회가 또다시 NDA문건이 없다고 주장을 펼칠 경우 이에 대한 입장을 최종 정리할 것으로 보인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협회가 블리자드와의 NDA계약 사실을 전혀 몰랐냐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내용이 사실이라면 협회가 NDA 계약 파기에 대한 사면권을 획득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다.

그러나 협회 측이 블리자드와의 NDA계약 체결을 알면서도 모른척했다는 쪽으로 무개추가 기울고 있다. 앞서 최원제 한국e스포츠협회 사무총장이 블리자드와의 NDA계약 여부를 우회적으로 밝혔기 때문이다.

최원제 총장은 지난달 3일 블리자드의 협상 중단 발표에 대해 "협회는 블리자드에서 협상에 대한 기밀유지협약을 요청했기에 그간 협상과정에서의 신의를 지키고자 입장표명을 유보해왔다"며 "그러나 블리자드 측에서 인터뷰를 통해 일방적으로 협상을 종료하겠다고 발언한 데다 그 이유에 대해서도 상당부분 진실을 왜곡했기에 이를 바로 잡고자 한다"며 협상 내용을 일부 공개했다. 

내용을 보면 '협상에 대한 기밀유지협약을 요청했기에 신의를 지키고자...'란 대목이 눈길을 끈다. 결국 협회는 블리자드와의 NDA 계약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무엇보다 협회가 기밀유지협약을 했음에도 이를 지키지 않은 채 향후 어떤 비즈니스를 할 수 있을지에도 물음표가 붙는다. 세부 내용을 공개하면 안 되지만 협회는 이를 무시, 실질적인 돈이 오고가는 비즈니스 생태계안에서 신뢰할 수 없는 조직으로 비춰질 가능성이 높다.

이날 협회가 발표한 내용은 블리자드, 그래텍 등과의 상생보다 무조건적인 타협뿐 없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협회는 블리자드와 그래텍 등의 양사와 계속적으로 협상할 것이라 밝혔지만 국내 e스포츠의 미래는 안개 속에 빠진 형국이다.

블리자드와 그래텍은 국내 e스포츠 글로벌화와 상생으로 화두를 던졌지만, 협회는 기존 기득권자로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진흙탕 싸움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협회가 지난 수년간 e스포츠 시장을 이끈 점은 인정하지만 '블리자드가 고압적인 태도와 욕심을 버려야 한다' '스타크래프트는 공공재다' 'NDA계약서는 없으니 협상 내용 공개는 문제없다' '제운호 전 협회 이사가 NDA계약서에 사인했다면 월권'이라는 등의 논리로 감정싸움으로 확대하는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

아직 국내 e스포츠 시장이 어떤 방향으로 재편될지는 불분명하다. 업계관계자 대부분은 협회와 블리자드가 충분한 대화를 통해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고 의견을 모으고 있는 가운데 팬들은 관계사 간에 감정싸움을 벌이지 말고 성숙된 모습으로 국내 e스포츠 시장을 한층 발전시키기를 바라고 있다.

또한 블리자드도 협상테이블에 다시 앉아 협회의 뜻을 충분히 수렴하는 대인배의 자세도 필요하다는 게 업계전문가의 충고다. 협회가 기자간담회를 통해 한편의 재미없는 코미디를 선사했지만 국내 e스포츠 시장 발전에 일부 영향을 미친 만큼 마지막 한 번의 기회는 제공해야 한다는 게 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