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구코너]
■ 역사를 새로쓴 '단순한 위성'
그것은 농구공보다 약간 큰 지름 58cm, 무게 83.6kg의 지구관측용 위성이었다.
구소련 관영신문 프라우다는 이것을 ‘빛나고 특별히 가공된 표면’을 가진 알루미늄 구체‘ 라고 소개했다. 지구궤도를 돌면서 끊임없이 전파신호를 보내도록 설계된 이 위성에는 2.4~2.9m의 안테나 4개가 달려있었다.
1957년 10월 4일. 모스크바 시간으로 10시28분. 지금은 카자흐스탄으로 독립한 지역인 바이코누르 우주발사기지(코스모드롬)에서 인류최초의 인공위성이 R-7로켓에 실려 화염을 뿜으며 수직으로 발사됐다.
소련 과학자들은 이 위성을 ‘단순한 위성(prostreishy sputnik; simple satellite)’으로 불렀다. 하지만 이 위성은 결코 단순한 위성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스푸트니크는 지구 위 933km 상공을 96분마다 한바퀴씩(28,800km/h) ‘삐삐’신호음을 내면서 돌았다. 그 시각에 라디오와 TV를 청취하던 사람들은 갑자기 들리기 시작한 삐삐 소리에 놀라 방송국으로 전화를 해댔다.
이날은 인간이 창조주나 신처럼 우주에서 위성으로 자신의 별을 내려다 보게 된 첫날이기도 했다.
■ 지구관측 목적에서 시작된 우주경쟁 시대
이야기의 시작은 195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정부기구인 국제과학연합위원회(International Council of Science Union)가 1957년 7월1일부터 1958년 12월말까지를 국제지구물리 관측년(IYG)으로 정한다.
위원회는 지구의 표면을 지도로 그리기 위한 관측위성을 쏘아 올려 지구환경을 보다 정확하게 알아보자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기간 중 각국이 인공위성을 쏘아올려 지구의 환경을 측정할 수 있는 마당이 마련된 것이다.
소련은 철저히 준비했다. 2차대전을 종결지은 원자폭탄 기술개발이 미국의 입지를 얼마나 드높였는지 보았고 이번 기회에 스스로 세계의 지도자로 부상하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
2차대전 후 미국은 전세계에 최고의 기술력을 가진 국가, 가장 강한 나라로 전세계에 각인됐고 미국민 스스로도 자부심과 자신감에 꽉차 있었다. 미국이 수소폭탄을 개발한 이듬 해인 1953년 소련도 결국 개발에 성공했지만 냉전시대의 강자는 여전히 미국이었다.
소련은 미사일로켓 기술개발에 집중했고 그 산물이 최대 5톤의 (핵)탄두를 실을 수 있는 R-7로켓이었다. 이미 대륙간탄도탄(ICBM)의 개발을 선언했지만 서방세계는 소련을 기술력에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소련으로서는 R-7에 고작 사람의 몸무게에 불과한 농구공보다 약간 큰 위성을 실어보내면 되는 것이었다.
■러시아, 우주개발 무대의 첫 주인공으로
소련은 이미 제국 러시아시절인 1903년에 우주과학자 치올코프스키가 ‘반작용기구에 의한 우주탐험’이란 논문을 내놓았을 정도로 우주에 관한 한 선구자요 개척자였다.
치올코프스키는 지구를 벗어나기 위한 힘을 계산했다. 그 속도는 초당 8km였고 스푸트니크의 궤도비행속도도 이 속도와 맞아 떨어졌다. 스푸트니크발사 시점인 1957년은 마침 치올코프스키 탄생100주년이었고 이를 함께 기념하고자 한 소련당국의 의도가 반영됐다.
그의 이론에 기반해 오늘날도 인류는 여전히 액체와 고체로 된 다단계 로켓으로 우주의 꿈을 실현하고 있다.
치올코프스키의 이론을 실현한 걸출한 과학자 코롤로프는 실제로 로켓을 만들어 내 미국의 추격을 따돌렸다. 그는 2개의 소형위성을 준비하는가 하면, 한차례 로켓 폭발을 겪고, 이후 두차례나 태평양에 시험로켓을 발사함으로써 기술을 확실히 검증했다.
스푸트니크1호의 성공이후 소련의 지도자 후루시초프는 혁명기념일인 11월6일을 맞아 또하나의 더욱 근사한 미션을 코롤로프에게 요구한다.
한달 후인 11월3일 발사된 스푸트니크 2호는 최초의 생명체인 암캐 라이카를 실어 우주로 보낸다. 10차례의 스푸트니크 발사에 이어 마침내 소련은 세계최초의 유인우주선 보스토크1호 발사와 함께 1호 우주인 유리 가가린을 배출하기에 이른다.
■스푸트니크 쇼크, 미국을 일깨우다
“소련이 우리보다 먼저 인공위성을 발사했다는 것이 사실일까?” -미국인들에게 ‘단순한 위성’ 스푸트니크는 말그대로 충격이었다.
이 사건은 노르망디의 영웅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미국은 물론 서방세계 전체에 이른바 ‘스푸트니크 쇼크’를 가져왔다.
소련과 냉전 중인 미국민들에게 스푸트니크는 '소련이 핵탄두를 로켓에 실어 미 본토까지 쏘아 보낼 수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확인시켜준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보다 더 큰 공포는 없었다.
1957년 미국은 뱅가드로켓 폭발로 전세계가 보는 앞에서 망신을 당했고 1959년 브라운박사의 익스플로러 1호 성공으로 간신히 체면치레를 했다.
이후 서방세계, 특히 미국은 기초위주의 과학교육 강화, 항공우주국(NASA)설립,고등국방연구원(ARPA) 설립, 외국인 과학기술자 수용 등 국가 전반에 걸친 개혁에 나선다. 이는 인류최초의 달착륙과 인터넷기술 개발로 이어지면서 미국 과학기술의 우위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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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교육과학부는 2017년 1.5톤급 우주발사체(로켓) 자력 개발을 목표로 내년도에만 200억원의 예산을 배정한다고 밝혔다. 중국이 이미 부동의 세계 3대 우주강국이고, 일본은 나로호 실패의 상처가 가시기도 전에 보란 듯이 자체 개발한 로켓발사의 성공을 과시했다.
‘스푸트니크 쇼크’가 없었다면 오늘날 미국의 우주기술은 물론 세계를 선도하는 선진과학기술도 없었다. 이 사건은 우리의 국가지도자들과 과학자들이 나로호발사 실패를 어떻게 발전적으로 승화시켜야 할지를 새삼 일깨워 주는 역사의 교훈이기도 하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