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저작권 침해, 누구의 책임일까

일반입력 :2009/01/20 16:49

윤종수

우리가 서로에게 던지는 질문 중에 가장 빈도수가 많은 것은 무엇일까? 1위는 쉽게 짐작이 간다.

"안녕하세요?"

요즘이야 적당하지 않은 인사말이라 해서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하는 대로 "좋은 아침!"을 외치기도 하지만 여전히 누굴 만나면 자연스럽게 던지는 질문이고 사람에 따라서는 하루에도 수백 번씩 묻는 질문이다. 꼭 상대방의 대답을 기대하고 묻는 것은 아니지만 문법상 질문임은 확실하다.

"어디 가세요?", "식사하셨어요?", "어쩐 일이세요?"도 비슷한 순위일거 같다. 이러한 상례적인 인사말 외에 자주 하는 질문은 또 무엇이 있을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는 "어느 편이세요?"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골목에 모여 손바닥을 뒤집어 편을 가르던 어린 시절 기억 때문만은 아닐 것이고 아마도 그 질문이 곤혹스러웠던 적이 많았기 때문일까.

이 질문은 저작권 이야기가 나오면 어김없이 등장한다. 특히 요즘 한창 유망사업(?)으로 떠오른 컨퍼런스나 세미나에서는 이러한 질문이 팀을 구성하기 위한 중요한 기준이 된다. 토론을 요구할 때도 어느 쪽의 입장인지를 먼저 확인하고 싶어 한다.

'권리자 쪽이죠?' '이용자 입장에서 이야기해주시죠' 보통 이런 식이다. 내 경우는 대부분 나를 이용자 쪽으로 분류하고 싶은 눈치이다. 예전에 어느 공공기관에서 주최한 행사에서는 처음부터 아예 이용자팀의 선수로 나를 정하고 발언을 요구한 경우도 있었다(그 행사에는 결국 참석하지 않았다).

기억컨대, 나는 한 번도 이용자라는 한쪽 계층만을 위해서 이야기한 적이 없다(사실 요즘 같은 인터넷 시대에는 권리자로부터 구별되는 이용자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도 쉽지 않다). 내가 계속 이야기 해 온 것은 '비즈니스'와 문화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다.

저작권이 갖는 철학적 의미나 이념적 의미, 또는 궁극적인 목적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저작권법의 핵심적 내용을 언급하라하면 대부분 저작권자의 어떤 권리를 보호하고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에 관한 것으로 답을 한다.

그러나 대륙법계에서 형성되어 온 인격적 이익의 보호를 위한 저작인격권(공표권, 성명표시권, 동일성유지권)을 재껴두고 저작재산권만을 고려하면, 저작권법의 실질적인 의미는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저작권자의 권리보호법이라기보다는 비즈니스모델보호법이라 봄이 타당하다.

인쇄술의 발명으로 서적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짐에 따라 출판업이 새로운 비즈니스로 떠오르면서 이에 대한 독점적 권리가 고안되었다는 저작권의 기원을 고려하거나, 저작권이 저작물에 대하여 저작자에게 부여되는 포괄적 권리가 아니라 개개의 권리들을 모아놓은 패키지의 이름이라는 것, 그리고 저작권이라는 패키지에 포함되어 있는 개개의 권리들은 사본을 여러 개 만들어(복제권), 이를 판매하거나(배포권), 사람들을 모아놓고 들려주거나 보여주는(공연권, 전시권) 또는 방송이나 인터넷을 통해 공중에게 전달하거나(공중전달권), 새로운 저작물의 재료로 삼는(2차적저작물 작성권) 등 권리자가 저작물로부터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사업아이템을 다른 사람이 방해하거나 무임승차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고 그러한 권리들이 기술의 발달에 따라 각각의 수익행위가 가능해질 때 마다 순차로 생겨났다는 점을 생각하면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출발이 되는 창작행위의 과정이나 결과물이 문화와 결부되고 산업적 성격을 띠지 않는 저작물도 다수 존재하기 때문에 애초부터 산업적 수요로 발달해 온 특허권이나 상표권 등에 비해 문화적 권리로 불리기는 하지만 태생적으로는 문화산업의 보호를 전제로 하는 것이며, 이는 콘텐츠 산업 또는 지식 산업이 강조되는 지금의 시기에는 더욱더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저작권법의 존재가치는 이러한 비즈니스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실효성이다. 그래야 저작권자의 권리가 비로소 의미를 갖는 것이고 그 이익도 보호되는 것이며 문화라는 인류의 자산이 역동적으로 생성되고 유지될 수 있는 지속적인 환경이 마련되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간단하다. 저작권법이 그러한 비즈니스를 보호해주고 있는가? 이미 그러한 질문이 나오기 전에 대답은 수도 없이 나왔다.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업계는 자신들의 수익이 급격하게 악화되고 있고 종사자들이 입는 피해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고 호소한다.

어떠한 비즈니스가 이러한 상황에 부딪히게 되는 경우 다음 수순으로 선택하게 프로세스는 대게 두 가지이다. 지금의 비즈니스를 지탱해 주고 있는 시스템을 더욱더 강화하거나 아니면 비즈니스 모델을 아예 바꾸는 일이다.

이건 시장에서 좌판을 하는 아주머니나 재벌기업을 운영하는 회장님 모두에 해당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비즈니스만은 외골수적인 한 가지 옵션에 집착한다. 비즈니스 모델의 변경은 거의 고려되지 않고 기존의 시스템만 계속 강화하려 한다. 더욱더 이상한 것은 그들의 고객, 특히 아직 법적으로 행위능력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미성년자를 상대로 살벌한 전쟁을 밀어붙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전쟁이 효과를 얻고 있다면 그 부작용이 심각하더라도 이를 반박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통계나 피부로 실감하는 상황을 봐도 그러한 전쟁이 효과를 얻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그 부작용으로 저작권시스템에 대한 불신, 저작권법에 대한 조롱감만 늘어나고 너무 걱정이 많은 건지는 몰라도 이는 전체 법질서에 대한 무시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왜 기존의 시스템을 아무리 강화해도 원하는 효과를 얻기 힘든가. 이건 단순한 법의식의 부재나 사회적 규범의 결여만이 그 원인이 아니다. 가장 큰 원인은 저작권 비즈니스가 다른 재화의 비즈니스와는 달리 외부효과(external effect)를 내부화하는 수단이라는데 있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외부효과라 함은 어느 경제주체의 활동이 대가 없이 다른 경제주체의 효용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한다. 즉 추가적인 한계비용 없이 효용을 얻는 것이다. 자기 집 담장을 예쁘게 단장하고 꽃밭을 가꿈으로써 결과적으로 동네주민들에게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는 경우처럼 무형적 창작물로서의 저작물 역시 그 본질상 이런 긍정적인 외부효과를 가져온다.

어느 한 사람이 CD를 사서 음악을 틀게 되면 이를 함께 듣는 사람은 아무런 비용을 지급하지 않고 음악을 즐기는 효용을 얻는 것이고 영화 시네마천국의 한 장면처럼 한여름 밤 건물 벽에 투영되는 아름다운 영화는 아무런 보상을 받음이 없이 동네 사람들에게 감동이라는 효용을 준다. 시인의 아름다운 시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며 그들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효용을 준다.

일반적인 외부효과의 경우 본래 얻고자 했던 목적(자신의 예쁜 정원을 조성하는 것)을 달성했으므로 그러한 외부효과를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큰 불만이 없을 수 있지만 저작물의 창작은 창작 자체의 즐거움이나 명성을 높이는데 만족하지 않고 그로써 생계를 이어가거나 수익을 얻고자 하는 경우에는 그러한 외부효과에 대해 적절한 보상을 해주지 않으면 이를 계속 만들어낼 수 있는 동력을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사회 전체적으로는 과소생산의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외부효과에 상응하는 비용을 지불하거나 보상해주는 외부효과의 내부화(internalization)가 필요하고 그 방법으로서 현재의 저작권법은 이례적으로 권리자에게 시장을 통한 개개의 교섭을 통해 외부효과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그에게 배타적 권리를 부여하고 계약체결에 대한 결정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은 이러한 외부효과의 크기나 범위를 계속 극대화하는 쪽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디지털과 인터넷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 세계 어느 누가 만든 창작물로부터도 쉽게 외부효과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외부효과의 천국’이 도래해버렸다.

게다가 그 성질상 외부효과에 대한 보상을 얻어 내는 것은 유형물이나 서비스 등 다른 재화의 획득이나 이용에 대한 대가를 확보하는 경우보다 엄청 어렵다는게 문제였다. 타인이 조성한 정원으로 인한 상쾌함에 대해서 대가를 지급하라고 요구해보라.

사람들은 내가 즐긴다고 당신의 정원이 닳았냐고 항변할 것이고 설령 그의 입장을 이해하여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한 정원을 쳐다보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을 해도 그 약속을 계속 지킬 것을 기대하거나 담보하기는 쉽지 않다.

어느 사람이 효용을 느낀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의 효용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의미의 비경합성이나 그러한 효용으로부터 사람들을 배제하기가 불가능하다는 비배재성 때문에 무임승차의 현상은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밖에 없고 특히나 외부효과의 혜택을 받는 수혜자들의 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외부효과에 대한 보상이 시장을 통해 이루어지기 어려운 시장실패가 발생하게 된다.

외부효과의 문제를 이례적으로 배타적 권리에 근거한 개별적인 시장거래로 해결하려고 했던 시스템은 아날로그 시대에는 그나마 작동을 하였으나 디지털 시대에 들어와 한계에 이르고 만 것이다.

왜 많은 청소년들이 다른 법은 잘 지키면서 유독 저작권법은 준수하지 않는가. 그들의 하소연대로 “그 혜택을 거부하기가 힘든” 외부효과가 그들의 눈앞에 수두룩하게 존재하고 “누구나 다 그렇게 하고 있기”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허락을 받지 않는 한 절대 그 외부효과에 눈도 돌리지 말라고 요구하는 건 어찌 보면 무책임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이건 타인의 재물을 훔치고 신체에 위해를 가하거나 공익에 해악을 가하는 범죄들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지금의 청소년들에게 혐의지어 지는 저작권법 위반은 실질적으로 말하면 저작권자의 권리침해라기보다는 현 비즈니스 모델의 침해이다.

저작권자의 권리는 그러한 비즈니스 모델을 뒷받침 해주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비즈니스 모델이 그 자체로 선험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선택의 문제라면 외부효과의 보상방법, 즉 비즈니스 모델만 잘 해결된다면 이와 같은 행위들은 자연스러운 외부효과의 향유 즉 문화를 즐기는 건전한 행위가 될 뿐이고 범죄로 낙인찍히지 않을 수 있다.

저작자 표시라는 저작인격권과 같은 몇 가지 조건만 지켜주면 창작의 즐거움이나 문화형성에의 기여 또는 명성의 획득이라는 보상만으로 만족을 하겠다는 의사표시인 CCL이나 제3자에 의한 보상으로 외부효과를 해결하려는 광고 베이스의 미디어, 도로나 국방서비스 같은 공공재의 운영과 같이 세금 등의 방법으로 기금을 조성하여 보상을 하려는 ACS(대안적 보상체제) , 이용허락의 확대와 제3자보상의 결합인 ECL(확대된 집중관리제도) 등은 서로 내용은 다르지만 이와 같은 관점에서 현재 시도되고 있거나 연구되고 있는 새로운 모델들이라 할 수 있다.

엊그제 이른바 권리자그룹에 속하는 지인들과 자리를 가지면서 비슷한 이야기를 나눈바 있다. 그 중에는 이미 환경의 변화를 실감하고 현재의 비즈니스 모델의 실효성에 대해서 의심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현 체제하에서 판도 변화를 통해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공통된 의견은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긴 한데 권리자들 내부에서조차 그러한 합의를 끌어내기가 쉽지 않다는데 있었다. 그나마 변화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나 과연 그 변화를 어떻게 끌어낼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물음표이다.

근본적으로는 참여당사자, 특히 혁신과 가장 친할 수밖에 없는 비즈니스 담당자들이 스스로 해결해야 될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으면서 가장 강력한 조정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정부의 역할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경험한 결과는 아쉬운 점이 많다. 권리자들이 현 시스템에 대해서 미련을 갖고 선뜻 새로운 변화로 발을 못 내딛는 것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왜 정부가 앞장서서 잘 돌아가지 않는 비즈니스 모델에만 계속 집착한 채 우리의 아이들을 범죄자로 만들 수 있는 위험의 제거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는지, 왜 창작들에게 실질적인 보상이 돌아갈 효율적인 방법을 진취적으로 고민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왜 아직도 기껏해야 권리자의 권리보호와 이용자의 이익보호의 균형이라는 편 가르기를 전제로 하는 덕목만으로 모든 부작용을 미봉하려고 하는지도 안타까울 뿐이다. 더 이상 편 가르기는 의미가 없으며 나도 누구의 편이냐는 질문은 더 이상 받고 싶지 않다.

개인적으로 아는 대학생이 만든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장면이다. 밤새 불법다운로드를 하고 자막까지 만들어 붙이는 열정을 쏟는 그들에게 인터뷰어가 묻는다. 왜 그 열정을 합법적인 활동에 쏟지 않는가(사실 내가 묻고 싶었던 질문이다). 그들의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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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고 싶은 것마다 다 불법이래요....”

이것이 그들만의 책임일까? 한 가지 확실한건 그에 대한 대답은 어른들의 몫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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