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자율규제」에 우리는 얼마나 당당할 수 있을까?

윤종수입력 :2007/09/27 03:43    수정: 2011/03/11 11:48

윤종수(서울북부지원 판사)

최근에 한참 인기를 끌었던 할리우드 영화 트랜스포머. 이 영화의 인기요인으로는 대개 감각적인 전개와 뛰어난 컴퓨터그래픽이 거론되지만 빼놓을 수 없는 건 남자들의 로망을 건드렸다는 점이다. 우스갯소리로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함께 영화를 보고 나오면 각자 상념에 빠져 타고 온 차를 쳐다본다는 것인데, 아들은 혹시 로봇이 아닐까라는 기대이고, 아버지는 자신의 운명과도 같은 명차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한다. 아무튼 말 타고 다니던 시절부터 시작된 명마에 대한 남자들의 로망은 말이 자동차로 바뀐 다음에도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탈것에 대한 로망은 이에 그치지 않고 오토바이에도 이어진다. 로망의 정도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오토바이에 대한 로망은 차와 달리 종종 비난을 받곤 한다. 혈기 왕성한 젊은 친구들이 떼 지어 몰려다니며 소란을 피운 덕분이다. 그들에게는 폭주족이라는 달갑지 않은 이름이 붙여졌고, 경찰에 단속되어 형사처벌을 받기도 한다. 필자가 판사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던 약 10년 전에도 심야에 아파트 단지에서 굉음을 내며 오토바이를 타던 친구들이 있었다. 그 소란 때문에 며칠 잠을 설치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들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즉결심판을 준비하다보니 폭주족으로 단속되어 온 피고인이 있었다. 안 그래도 분개하고 있던 차에 사건을 맡게 되었으니 비록 즉결심판이긴 하지만 최대한 엄한 처벌을 하여 경종을 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법정에 들어가 문제의 피고인을 호명하였다. 그런데 웬걸, 터프한 복장과 우락부락한 인상의 소유자로 내심 예상하였던 피고인은 그야말로 가냘픈 몸매에 하얀 얼굴을 가진 앳된 학생이었다. 겁을 먹고 목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는 그 친구를 보고 있자니 그새 마음이 약해져서 엄벌의 결의를 접어버렸던 기억이 있다. 도대체 그런 친구가 어떻게 그 밤중에 굉음을 내며 난폭한 질주를 해대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온라인에서의 행동양상

그런데 이와 유사한 경험을 다른 곳에서도 겪는다. 바로 온라인이다.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의 PC 통신에서도 그랬고 인터넷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게시판에 올라온 글이나 온라인상에서 나눈 대화를 보면 그야 말로 공격적이고, 도저히 대응이 불가능한 경우를 종종 본다. 괜히 뭐라 했다가 본전도 못 건질만한 상황인데, 몇 번 겪다보면 거칠고 공격적인 성격과 외모를 지닌 상대가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된다. 그런데 막상 어찌하다 오프라인에서 만나면 열이면 아홉은 오히려 보통사람보다 더 내성적이고 순하기 짝이 없는 친구들이다. 온라인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장황한 온갖 언사를 쏟아 내면서도 오프라인에서는 그저 조용하게 미소만 띠고 있으니, 과연 이 사람이 그 문제의 네티즌이 맞는지도 의심이 갈 정도이다. 물론 이러한 경험을 함부로 일반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폭주족 사례에서 느꼈던 그런 의아함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도대체 이 경우는 또 무엇 때문일까.

온라인상에서의 행동양상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례와 연구에서 논의된 바 있고 다양한 대책들이 제시 되고 있다, 그중 제일 근본적인 요인으로 자주 거론되는 것이 비대면성을 수반하는 익명성이다. 인터넷에서는 자신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노출의 우려가 없고 직접 얼굴을 맞대지 않고 타인과 교류하게 되므로 의도한 것이든 충동적이든 간에 평소와 달리 사회적, 도덕적 규범을 일탈하여 무책임한 행동에 이르게 될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대부분이 동의하는 인터넷의 본질적 특성에 근거를 두고 있으므로 큰 반론 없이 받아들여져 온 편이다. 그러던 차에 이른바 악플의 피해자가 자살에 이른 극단적인 사례들이 연이어지자 인터넷의 익명성에 대한 시급한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고, 결국 금년 7월 27일부터 일정 범위 내에서 인터넷실명제가 제한적으로 도입되었다.

즉 정보통신망에 관한 기본법이라 할 수 있는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2007. 1. 26.자로 개정되어 7. 27.부터 시행되면서, 제44조의5로 포함된 ‘게시판이용자의 본인확인’ 조항이 적용된 것이다. 위 조항은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로서 제공하는 정보통신서비스의 유형별 일일평균 이용자수 10만 명 이상으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기준에 해당되는 자 등에게 본인 확인에 관계되는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요구하고, 같은 법 시행령에서 일정 기준을 충족하는 포털서비스와 인터넷언론서비스, 전문손수제작물매개서비스(이른바 UCC 사이트가 여기에 해당된다) 등을 대상 정보통신서비스제공자로 포함시키고 있다. 다만 한번 실명을 확인하게 되면 실제 게시물에는 id나 별칭을 써도 되므로 그 부분에서도 제한적인 적용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네이버나 다음과 일부 포탈과 기타 서비스제공자들이 현재 위 제도를 시행중에 있다.

인터넷 실명제 효과?

인터넷 실명제의 도입은 처음부터 격렬한 반발에 부딪혔다. 익명성은 인터넷의 성공을 가져온 본질적 특성이며 실명제의 도입은 표현의 자유와 같은 기본적 인권을 제약하는 조치라는 비판이 제일 많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하였던 그러한 폐해에 대한 강력한 대책의 요구가 받아들여져 결국 위와 같은 부분적 실명제로 절충을 본 셈이다. 문제는 이러한 조치가 과연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둘 수 있는가이다. 제한적 실명제가 시행된 이후에도 포털의 악성 댓글은 그다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여론조사에서도 이른바 악플을 달아본 경험이 있는 네티즌의 30%만이 실명제가 악플을 막을 수 있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물론 제한적 도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실제로 이미 확실한 실명제가 이루어졌던 개별 사이트나 폐쇄적 인트라넷에서도 그와 비슷한 사례들이 발생하였던 경험을 떠올려보면 과연 익명성이 결정적 요인인지는 다소 의심스럽다.

도로에서의 폭주족과 인터넷에서의 악플러는 공격적 성향을 띤다는 데서 공통점을 갖는다. 물론 두 사례를 같은 맥락으로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굳이 폭주족과 악플러의 공격성을 초래한 공통적인 요소를 찾아본다면, 폭주족의 오토바이와 악플러의 인터넷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다. 오토바이를 처음 타 본 순간의 흥분은 타본 사람만이 안다. 특히 자신만의 탈것을 처음으로 경험한 젊은 친구라면 그 흥분은 상상이상이다. 자신의 의지에 의하여 조작되는 파워풀한 머신이 가져다주는 활동공간의 확대와 기동성은 좀 과장하면 마치 슈퍼맨이 된 것과 같은 쾌감을 갖게 한다. 그런데 인터넷을 처음 경험하였을 때의 흥분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 책상 앞에 앉아 자신의 목소리를 세상에 직접 전달할 수 있고 타인의 반응이 즉각적으로 전해오는 놀라운 경험은 잠을 못 이루게 할 정도이다. 예전에는 상상이나 할 수 있었던가. 그 무한한 가능성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으로 이어진다. 오토바이와 인터넷이 주는 자신의 존재감에 대한 새로운 경험은 가슴 뛰고 흥분 되는 경험이자, 실제 바람직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원동력이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데, 바로 권력의 문제이다. 오토바이와 인터넷에서 경험하는 새로운 파워에 대한 흥분이 엉뚱하게도 새로운 권력에 대한 도취감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오토바이와 인터넷이라는 강력한 파워에 대한 경험은, 마치 신비로운 힘을 가진 마스크를 얻은 평범한 은행원이나, 어느 날 우연히 권총을 손에 쥐게 된 소심한 직장인의 경험과 유사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강력한 파워를 지닌 신비한 무기는 강력한 권력으로 다가오고 그에 대한 도취는 마음속에 숨어있던 공격성의 발현으로 이어진다는 영화의 스토리에 비유하는 것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권력에의 도취와 공격성의 발현은 이미 인터넷 곳곳에서 발견된다. 우르르 몰려다니며 안티의 언어를 마음껏 쏟아내고는 어쩔 줄 모르는 상대방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는 듯한 일부 네티즌들이나, 자신의 글에 대한 비판을 절대 용납하지 않고 블로그의 신성함을 절대시하는 일부 블로거, 객관적인 근거도 없이 도발적인 용어로 상대방에 대한 공격과 비난을 서슴치 않는 일부 무책임한 논객 등, 인터넷에서의 권력은 넘쳐나고 있다.

인터넷 자율규제에 바라는 것

인터넷과 관련된 오래된 이슈 중 하나는 자율규제이다.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스스로의 자율조직에 의한 것이든 인터넷 고유의 자율규제의 가능성과 당위성을 이야기하면서 여기에 오프라인의 권력이 개입하는 것을 경계한다. 필자도 아직 그러한 가능성에 미련을 갖고 있는 사람들 중 하나다.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이상향적인 커뮤니케이션 공간에 대한 미련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사실 자율규제라는 용어를 제일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법률가이다. 법률의 탄생이 바로 그러한 문제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니 만큼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법률가들은 생래적으로 자율규제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불안해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율규제에 대한 미련을 갖는 것은 법률가이기 전에 네트워크에서 새로운 존재감을 자각하며 흥분을 느꼈던 그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집단 지성도 가능한데 집단 이성이나 집단 자정이 불가능할 이유가 있을까.

그러나 인터넷에서 넘쳐나는 어설픈 권력의 향연을 보고 있자면 그러한 이상향에 대한 희망은 점점 민망해질 뿐이다. 익명성은 차라리 단순한 문제이다. 익명성은 문제되지 않을 것을 기대하고 과감해지지만 사실 스스로는 부끄러워한다. 그러나 이 어설픈 권력의 설침은 부끄러워 하기는 커녕 그러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만큼 스스로 자제하기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미련을 두었던 많은 사람들이 차라리 그 경계하던 오프라인 권력이 이 어설픈 권력의 설침을 눌러주기를 바라게 되는 것, 그것이 지금의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한 단상이다.

이럴 거면 ‘신비의 마스크’를 그냥 땅에 파묻어 버리는 게 나을까. 그러기에는 마스크를 쓰고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노란색의 괴팍한 초인은 나중에는 철이 들던데, 우리 모두는 언제 쯤 세련되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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