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바뀌어 간다

윤종수입력 :2006/08/10 21:45    수정: 2011/03/11 11:41

윤종수(서울 북부지원 판사)

재판을 하다 보면 자기에게 유리한 내용인 담긴 타인과의 대화를 녹음한 후 이를 녹취하여 증거로 제출하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법률가가 아닌 일반인들은 녹취록에 상당한 비중을 두는 경향이 있다. 종종 기존의 사실을 뒤엎을만한 결정적인 증거라며 녹취록을 제출하곤 하는데 실제 녹취록의 증명력은 그다지 높게 평가되지 않는다. 상대방이 자신의 대화가 녹음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대화가 솔직한 이야기일 가능성도 높지만 한편으로는 녹음을 하는 당사자의 의도에 따라 대화가 유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화 전부가 아닌 어느 특정부분에 한정되어 녹취된 경우에는 전후 문맥과 맞지 않는 엉뚱한 해석이 될 위험이 있다.

한편, 녹음된 대화를 음성 그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녹취된 글로 읽게 되는 경우의 가장 큰 문제점은 대화의 정확한 뉘앙스나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녹취록에는 “그래 내가 한 짓이다”라고 명확하게 적혀있다 하더라도 실제의 경우는 ‘그래 너 마음대로 생각해라. 내가 했다. 어쩔래?’라며 이죽거리는 장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무에서는 종종 녹취록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하여 녹음테이프를 검증해서 직접 들어보곤 하는데 그 결과 전혀 다른 의미로 밝혀진 경우가 꽤 된다. 이러한 점 때문에 녹취록은 유력한 증거가 될 수 있는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실제에 있어서는 그 중요성이 떨어진다.

이러한 사정은 녹취록뿐만 아니라 편지, 메모 등 개인 간에 작성된 비공식적인 문서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기재된 내용 그대로 해석할 경우 뜻이 잘 못 전달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증거로 제출된 이런 문서들의 증명력을 따져야 하는 입장에서는 영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이는 문자라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한계이다.

문자가 가지는 한계

인류가 발명한 문자는 가장 단순하고 경제적인 커뮤니케이션 수단(물론 그 사용법을 취득하기 전까지는 결코 단순한 것은 아니지만)이다. 문자는 머릿속에 있는 또는 입에서 튀어 나온 무형의 관념 내지 정보를 허공에 날려 보내지 않고 붙들 수 있게 하였으며,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특별한 장치나 과다한 비용이 소모되는 것도 아니고, 일단 배우기만 하면 어느 누구도 이용이 가능한 보편적인 수단으로서 인류문화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최고의 발명품이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문자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은 그 생래적인 맹점이 있었으니 상대방의 호흡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눌 때 우리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 자체에만 한정해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음성의 고저와 강약, 표정의 변화, 수반되는 몸짓 등 모든 것을 종합해서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 의도, 감정 등을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종합적인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한 문자에 의한 의미전달은 그 정제된 표현의 명확성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의미 전달에 실패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같은 문자를 사용하더라도 사람에 따라서는 더 생생하게 의미를 전달하기도 하나, 이는 축복받은 재능이나 고도의 훈련에 기인한 것으로 모든 이에게 그러한 능력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한 능력이 없는 주제에 이처럼 공개적인 글을 쓰는 나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혹시 오해가 생기지 않을까 그야 말로 항상 불안하기 짝이 없다.

이처럼 생래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문자는 여전히 커뮤니케이션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으니, 인터넷 같은 새로운 플랫폼이 제일 먼저 사용한 커뮤니케이션 수단도 바로 문자이다. 가장 현실적인 시스템이 가장 전통적인 수단을 그 베이스로 삼은 것은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서의 문자의 보편성과 효율성 때문이었는데, 네트워크를 통하여 좀 더 손쉬운 그리고 더욱더 효율적인 전달이 가능해져 문자는 새로운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특히 간단한 방법으로 문자의 즉시 전달이 가능해져 사람들은 서로 다른 장소에서 마치 직접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듯이 자유롭게 라이브 채팅(live chatting)을 하기 시작하였다. 음성에 의한 원격대화마저 문자가 대체하기 시작한 셈이다.

이처럼 새로운 플랫폼에서도 도태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생명력을 발휘하였음에도, 문자가 갖고 있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서의 한계는 극복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문자에 의한 의미전달에 아쉬움을 느꼈고, 특히 전파성과 접근성이 극도로 허용되는 네트워크에서 자신의 의사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거나 엉뚱하게 해석되는 경우 생길 결과에 대해서 더욱더 우려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종래의 문자와는 다른 독특한 방법으로 문자를 보완하는 새로운 수단을 만들어내기 시작하였는데, 이름도 귀여운 이모티콘(Emoticon)이다.

문자의 한계를 보완하는 이모티콘

Wikipedia에서 이모티콘에 관한 내용을 인용해 보면, “이모티콘은 아스키(ASCII) 문자들을 이용하여 만들어낸 감정을 표시하는 기호들을 일컫는다. 이모티콘이란 단어는 영어의 Emotion(감정)과 icon(아이콘)을 합쳐서 만들어진 말이며, 처음 유행한 이모티콘이 웃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스마일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채팅, 전자 우편, 게시판 등 컴퓨터로 글을 쓰는 곳에서 많이 쓰인다. 1982년 9월 19일에 스콧 E 펄만이 처음으로 썼다는 증거가 있다”라고 되어 있다(재밌는 것은 서양의 이모티콘이 :-) :) =) :-( )-: 등 옆으로 누워 있는 형태로 주로 입의 모양을 통해서 표현을 한 반면 동양의 이모티콘은 (^_^) (^-^) (*_*) (T_T) 등 눈의 모양으로 의미를 전달했다는 점이다).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문자의 아쉬운 점을 보완해 준 이모티콘은 소위 네티즌들의 열렬한 호응 속에 진화를 거듭했다. 지금은 단순히 문자를 응용한 방식부터 움직이는 그래픽 형태까지 다양한 이모티콘이 매일매일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이모티콘이 이처럼 번성하게 된 데는 문자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의 한계를 직접 대화 시에 이루어지는 ‘종합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에뮬레이션하는 방법으로 보완하였고 이것이 네티즌들의 새로운 감성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커뮤니케이션 규칙

그런데 새로운 문제가 생겼으니, 이모티콘이 온라인의 세계를 벗어나 오프라인으로 영역을 넓히기 시작하고, 채팅창이나 친구들끼리의 이메일을 넘어 좀 더 공식적인 문서에 까지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취직을 위한 자기소개서에 이모티콘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고 교수님께 보내는 리포트에도 이모티콘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심지어는 판사에게 보내는 탄원서에도 이모티콘이 사용된 것을 간혹 발견할 수 있다. 이모티콘에 친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러한 현상은 정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설사 이모티콘에 익숙한 세대라고 하더라도 낯선 곳에서의 이모티콘은 당황스러운 게 사실이다. 이 경우 이모티콘은 적절한 의미전달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사용자의 무례 내지 개념 없음을 나타내는 표시로 흔히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낯선 곳에서의 이모티콘은 무례와 경솔함의 문제가 아니라 격식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들은 상대방을 존경하지 않기 때문에 또는 아무런 생각이 없기 때문에 이모티콘을 사용한 것이라기보다는 자기들 나름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격식을 차리지 않고 이모티콘을 사용한 것이다. 격식을 차리지 않는 것도 의도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지만 그 어느 것도 무례와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물론 필자의 개인적인 입장에서도 모든 관계가 비공식적(informal)으로 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커뮤니케이션 때문에 격식이 사라지는 현상은 커뮤니케이션의 형태가 변화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지금도 큰 변화가 있지만 미래의 커뮤니케이션은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점점 더 대면(face to face)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은 줄어들 것이고 원격지에서 문자와 전자 신호와 이미지를 통해 상당부분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럴수록 격식은 사라지고 좀 더 정확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방향으로 새로운 규칙이 등장할 것이다.

최근 이모티콘 뿐만 아니라 단어축약이나 새로운 조어가 네티즌 사이에 유행되면서 한글이 파괴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대두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단순한 한글파괴의 문제가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방식의 변화에 따른 격식파괴의 문제이다. 우리말 보존이나 한글교육의 차원으로는 결코 해결되어질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사실 격식의 총화는 법이다. 법전에 적혀있는 문구나 판사가 법정에서 말하는 내용이나 판결문은 그야말로 격식의 집합체이다. 요즘은 판결문도 그렇고 법률도 그렇고 되도록 평이한 표현을 사용해서 일반인들의 이해도를 높이고 있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낯설어 하는 이유도 아직도 수많은 격식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법률가의 입장에서도 되도록 평이한 표현을 하고 싶지만 결코 쉽지만은 아니한 것도 바로 그러한 격식 때문이다. 법률에서의 격식은 결코 단지 폼 때문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형식 요소가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나름대로의 정확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필요 때문에 특유의 격식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법 영역에서도 커뮤니케이션의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딱딱한 일방적인 견해의 전달에서 당사자 간의, 당사자와 재판부 간의 상호 의사소통이 강조되고 있고, 커뮤니케이션 수단도 법정에서의 대면에 의한 진술에 한정되지 않고 문자, 이미지에 의한 견해의 전달로 확대되고 있으며 심지어는 서로 분리된 장소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인 원격재판, 재판의 처음과 끝이 오로지 전자문서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새로운 소송 등 혁신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예외 없이 격식의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어느 정도까지 변화되리라고는 단정할 수는 없지만 만약 판결문에 이모티콘이 등장하게 된다면 아마도 그건 우리 사회의 최후의 격식이 파괴되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그날 신문기사의 헤드라인은 이렇게 올라가지 않을까.

“말세로다. OTL @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