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었던 과거가 생생한 현실로 올 때

윤종수입력 :2006/02/13 20:27    수정: 2011/03/11 11:39

윤종수(서울 고등법원 판사)

지난 번 글에 이어 다시 또 영화 이야기로 시작한다.

혹시 하늘에서 개구리들이 비처럼 떨어지던 장면을 기억하시는지. 영화 매그놀리아(Magnolia)의 한 장면이다. 이 영화는 과거에 타인에게 입힌 상처와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해자와 그 피해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안타까운 이야기가 얽히다가 클라이맥스에서 난데없이 개구리들이 비처럼 떨어진다. 사실은 아직도 “개구리비”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생뚱맞은 개구리비와 함께 고통의 절정이 지나가면서 개구리비는 하늘에서 내린 구원 내지 용서의 손길처럼 느껴졌다. 영화 내내 불편했던 마음이 구원을 받은 듯 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 나온 한 줄의 자막이 비수처럼 꽂혔다.

“당신은 과거를 잊을지 몰라도, 과거는 당신을 잊지 않는다.”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말인가. 하얀 소복입고 TV 밖으로 기어 나오는 것보다 더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전혀 동요할 필요가 없는 훌륭한 분들도 많이 계시겠지만, 솔직히 가슴이 덜컹했다. 그렇게 잊고 싶었고, 또 잊어 버렸던 과거가 영원히 눈을 부릅뜨고 나를 기억하고 있다니. 과거의 상처와 고통에서 안타까워하던 영화 속 인물들이 결국 깨달은 것도 그 말 아니었을까. 외면하고 싶었고, 또 외면하였던 과거가 영원히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절망적이다.

오늘날, 위 한 줄의 경구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곳이 있다. 바로 인터넷이다.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크는 과거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것도 여기저기에서.

그토록 잊어주길 원했던 정치인의 식언도 인터넷은 영원히 기억하고 있다. 이미 신문․방송은 잊은 지 오래고 심지어 자신마저도 거의 잊어버렸지만 어느 한구석에 숨어있던 과거는 한마디 검색어의 입력만으로도 우리 눈앞에 등장한다. 누가 볼까 완벽하게 지워버렸던 자신의 글이 그 누군가에 의해서 복사되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도 바로 인터넷이다. 정말로 절망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를 바꿔 말하면 희미한 기억을 다시 한 번 직접 확인 해 볼 능력을, 이미 잊어버린 기억을 다시 살릴 수 있는 능력을, 우리가 잊어버리기를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을 우리가 갖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더 나아가 알지 못했던 기억마저 찾아내어 지식으로 간직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게 된 것이다. 기록이라는 인간의 행위가 등장한 때부터 얻게 된 능력이지만 지금의 능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막강하다. 자료의 디지털화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물리적으로 쉽게, 경제적으로 저렴하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저장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게다가 손쉽고 빠른 검색이라는 신종무기의 등장은 'if you want, you get now'를 실현 시켰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절망적일 수 있지만 많은 이들에게는 축복인 세상이다.

이런 축복을 깨닫게 된 사람들은 두 가지 작업을 시도한다.

하나는 한 조각의 과거도 놓치기 싫어 모두 붙들어 놓고자 하는 작업이다. 인터넷은 과거의 저장장소로는 너무 변화무쌍하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같은 사이트의 같은 페이지라도 오늘의 것은 어제의 것과 다른 경우가 많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이트가 생기지만 한편 많은 사이트가 사라진다. 정보가 분산된다는 말은 책임지고 관리할 주체가 없다는 말도 된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인터넷의 모든 정보를 모아서 저장하고자 하는 시도가 생겼다. 인터넷 아카이브 프로젝트(www.archive.org)를 비롯한 아카이브 사이트의 등장이다.

또 하나는 인터넷에 있지 않은 나머지 기억들을 인터넷으로 모으는 작업이다.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던 기억은 오프라인에 있다. 수많은 서적, 영화, 음악, 그림, 건축물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인터넷이 가져다 준 능력을 오프라인의 기억들에도 적용하고자 한다. 그래서 오프라인의 기억을 디지털로 바꾸어 인터넷상에 올리고자 하는 시도가 생겼다. Million Book Project(www.library.cmu.edu), Gutenberg Project(www.gutenberg.org) 등과 최근에 지면을 장식하였던 Yahoo, MSN의 Open Content Alliance(www.opencontentalliance.org), Google Book Search Library Project(www.google.com) 등과 같은 사이트의 등장이다. 이와 함께 기존의 도서관들도 소위 전자도서관 내지 디지털도서관으로 변신을 꽤하면서 소장 서적의 디지털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사람들은 위 두 가지 작업을 통해 지구상의 모든 책을 수집하여 보관하려 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꿈을 인터넷에서 실현하고자 한다.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기억을 자유롭게 공유할 수 있는 꿈을 실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곧 커다란 장벽에 부딪히고 마는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세운 프롤레미우스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던 문제이다. 저작권(Copyright)이다.

저작권은 컬렉션(Collection) 단계에서부터 등장한다. 오프라인에서의 컬렉션은 저작권과는 상관없는 부분이다. 남의 책을 함부로 가져오는 것은 절도죄가 될 수 있을 지언정 저작권과는 관계가 없다. 그러나 디지털을 통한 컬렉션은 항상 복제라는 과정을 거치게 되므로 처음부터 저작권과 관계된다. 구글이 Book Search Library Project를 추진하면서 장벽에 부딪힌 것도 검색 서비스를 위한 서적의 스캔 과정에서조차 저작권침해가 문제되었기 때문이다.

컬렉션은 어찌어찌 해서 해결했다고 치자. 검색까지도 가능해서 자신이 찾고자 하는 정보가 있는 곳까지 알아내었다. 그러나 접근(Access)에서 다시 제동이 걸린다. 인터넷에서의 정보에 대한 접근은 전송권 또는 복제권이라는 저작권의 권리와 또다시 관계된다. 인터넷의 핵심은 네트워크이다. 아무리 자료가 디지털화 되어 있고 검색으로 자신이 찾고자 하는 자료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더라도 이를 네트워크를 통해 접근할 수 없다면 그야말로 도로묵이다. 다시 오프라인의 길을 걸어가 힘들게 찾아오는 전통적인 작업을 해야 한다.

저작권법은 제28조에서 도서관에 있어서 도서 등의 자체보존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의 디지털 복제 외에 인터넷도 아닌 도서관에서의 열람을 위한 디지털 형태의 복제 및 도서관간의 전송에 관하여 규정하면서 그 이용자수 및 대상을 제한하고 있다. 원래 2000. 1. 12. 개정법에서는 도서관에서의 열람을 위한 디지털 형태의 복제와 도서관간의 전송은 무제한 허용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저작권침해의 우려가 제기되고 온라인디지털콘텐츠산업발전법이 제정, 시행됨에 따라 이에 대한 보호가 요구되면서 2003. 5. 27. 개정시 위와 같이 범위가 축소된 것이다. 공공성을 인정받는 도서관도 이 정도이니 개인이나 단체가 디지털 정보의 컬렉션과 접근을 제공하면서 저작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공정이용을 주장하기도 쉽지 않다.

그렇다고 인터넷이 가져다 준 이 축복을 그대로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위 작업들이 저작권법의 규제를 받을 수밖에 없다면 방법은 저작권법에 의한 규제를 받지 않는 자료를 확보하는 것이다.

제일 먼저 대상이 되는 것은 이미 저작권이 소멸된 것들이다. 저작권보호기간이 만료 되었거나 저작권이 포기된 것들이다. 앞서 본 많은 사이트들이 이 부분에 집중하여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그 범위에 있어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최근의 정보에 대한 욕구를 해결해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 다음 시도할 것은 저작권자들로부터 허락을 받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 방법도 비용적인 측면에서나 효율적인 측면에서 어려움이 많다. 저작권자와의 접촉에 많은 인력과 비용이 소요될 것이며 가사 그러한 수고가 자원봉사자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쉽지가 않다.

좀더 효율적이고 손쉬운 방법은 저작자가 정보의 생성단계에서나 그 후에 위와 같은 작업을 염두에 두고 의사를 밝혀주는 방법이다. 즉 자신의 저작물에 대한 컬렉션과 접근이 가능할 수 있도록 저작물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축소시켜주는 것이다. 이는 자원봉사와 비슷한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자신의 원하는 바를 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도 있다. 과거의 정보는 앞에서와 같은 방법으로 해결하더라도 현재 생성되는 정보들은 이러한 의사확인절차를 마련해준다면 좀 더 손쉽게 해결된다. 이 글 맨 아래에 붙어 있는 Creative Commons License(www.creativecommons.or.kr)나 정보공유라이센스(www.freeuse.or.kr), wikipedia에서 적용하고 있는 GNU FDL(http://korea.gnu.org/people/chsong/copyleft/fdl-1.2.ko.html) 등이 그러한 시도이다. 결국 모든 해결의 실마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있다.

얼마 전 인터넷판 국역(國譯) 조선왕조실록(e-실록)이 공개되었다.

보도가 나간 후 하루에 5만4000여 명이 e-실록을 열람했다고 한다. 이만열 국사편찬위원장은 이렇게 말하였다. “역사와 인터넷이 이렇게 행복하게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실록은 높은 담에 가려져 있어 일반국민들은 접근이 쉽지 않았지요. 그러나 이제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도 누구나 실록을 볼 수 있는 시대예요. 모두가 볼 수 있다는 것은 그동안 학자들끼리도 폐쇄적으로 이뤄져 왔던 학계의 연구풍토에도 큰 자극을 주게 될 겁니다. 한마디로 더는 거짓말을 못하게 된 것이지요.”

일부에게는 절망일지 몰라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축복인 인터넷의 능력. 세상은 이렇게 바뀌고 있다. 마치 개구리비가 쏟아지는 것처럼. @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