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필자는 18년 전에 알게 된 지인을 아주 오랜만에 반갑게 만났다. 그 분은 예전월간지 컴퓨터학습(마이컴) 출신의 기자였는데, 필자가 고등학생 때 컴퓨터학습의 PC CLUB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분이다. 당시 그 분은 20대 중반의 매력적이고 활기찬 여기자였고 필자는 컴퓨터에 미쳐있는 고등학생이었는데,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서로 중년의 모습으로 얘기를 나누게 된 것이다. 그것을 계기로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서 몇 가지 사실을 정리하고, 언제나 필자의 마음에 담겨있는 안타까운 사실 하나를 밝혀보도록 하겠다. 1983년은 국내에서 PC가 처음으로 일반인을 대상으로 만들어지고 팔린 기점이 되는 중요한 해이며, 그 해에 중요한 컴퓨터 잡지들이 창간되었다. 필자 또한 1983년에 수학 선생님의 추천으로 우연히 PC를 접하게 되었고 컴퓨터학습, 마이크로소프트웨어, 그리고 짧은 인생을 살다간 학생과컴퓨터 3가지 월간지를 창간호부터 한 권도 빼놓지 않고 보았었다.FC-100으로 시작한 베이직 프로그래밍필자는 금성의 FC-100으로 베이직 프로그래밍을 시작했는데, 1983년 당시 국내에는 프로그래밍 자료가 전무하였기 때문에 학교를 마친 후 멀리 떨어진 세운상가에 있는 컴퓨터 서점에 가서 PIO와 같은 일본 잡지를 사다 보고는 하였다. 세운상가에서 안 좋은 물건을 팔며 호객행위를 하는 무서운 아저씨들을 피해, 서점으로 막 뛰어들어가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필자의 모습이 떠오른다.그리고 방학 때는 종로에 있었던 컴퓨터 대리점에서 살다시피 하며 또래의 동지들과 정보를 공유하고는 했는데, 그러던 1987년에 민컴이라는 회사에서 발간되던 월간 컴퓨터학습에서 사고(社告)를 통해 전국에서 '컴퓨터 좀 한다' 하는 중·고·대학생, 일반인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회사의 심사를 거쳐 20~30여명의 사람들로 'PC CLUB'이라는 아주 평이한 명칭의 모임이 결성했는데, 아마도 최초의 공식적인 PC 커뮤니티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후 대학생과 일반인의 모임은 곧 흐지부지 되었고 20여명의 중고등학생들은 활발하게 활동을 하였다. PC CLUB은 MSX와 Apple II로 나뉘어져 활동을 하였는데, 필자만 유일하게 양쪽 모두에서 활동을 하였다. 지금도 갖고 있는 기술의 양다리 근성은 타고난 것이 아니었나 싶다.컴퓨터학습 PC CLUB 시절의 기억1983년부터 90년대 초반까지 국내 8비트 PC의 황금기는 MSX, AppleII+, SPC-1000의 트리오가 장악하였다. SPC-1000은 NEC의 PC를 모델로 하기는 했지만 토종 PC라고 할 수 있는데, MSX나 Apple II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사용자가 적은 편이었다. 당시 MSX 기종은 대우 IQ 1000·2000이 유명하였고, 삼보 트라이젬은 Apple II 호환 기종으로 유명하였다. 한때 세상을 풍미했던, 추억의 이름들이다.PC CLUB 모임은 컴퓨터에 미친 20여명의 중고등학생들에게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마포에 있었던 컴퓨터학습 편집실에서 LOGIN, MSX 매가진, BYTE 등의 외국 컴퓨터 잡지를 맘껏 볼 수 있었고,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잡지에 활발한 기고를 하였으며 'MSX I·II 파워업 테크닉', '애플IIe 테크노트'와 같은 서적을 공동 집필하기도 하였다. 다들 BIOS 레벨에서 어셈블리 언어로 PC를 맘껏 다루었으며 저속 모뎀을 통한 PC 통신도 누구보다도 먼저 접했고 정말 모든것에 있어서 얼리어댑터였지만, 그런우리에게는 넘을 수 없는 산이 하나 있었다.그것은 바로 입시였다. 우리는 매일매일 컴퓨터에 미쳐서 살았는데, 정말로 모든 에너지를 프로그래밍에 쏟았고 그것은 바로 물리적으로 학교 공부를 할 시간이 없음을 의미했다. 조숙한 멤버들은 학교 공부의 무의미함에 대해 역설하고는 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조숙함은 어쩌면 낙오자가 되는 징후였다. 1980년대 당시 어린 시절 일찍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발견한다는 것은 불행의 씨앗이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있다. 통조림 같은 인간을 생산하는 학교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이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부모들의 입장에서 그것이 무엇인지 진정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까?컴퓨터 또는 입시 공부? 그리고 깊은 상실감클럽 멤버들은 늦어도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어떤 결단을 내려야 했다. 필자를 포함한 몇몇 멤버들은 대외적인 수상 경력이 있고 잡지 기고 또는 프로그래밍 아르바이트 등으로 돈을 벌기도 하였지만, 지금과 달리 당시는 그것이 어떤 플러스 요인도 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주변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을 받을 뿐이었다. 그래서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컴퓨터를 포기하고 입시에 전념하든가, 또는 대학을 포기하든가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해다. 당시는 학력고사를 보았고 전후기로 나누어 모집하던 시기로서, 전기 경쟁률이 5대 1에 육박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클럽 멤버들은 정말로 두 부류로 나뉘게 되었다. 컴퓨터를 포기하고 입시에 전념한 멤버들은 거의 모두 서울대, 연고대 등의 좋은 대학에 진학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컴퓨터를 단념하고 입시에 몰두한 이들의 기분은 과연 어땠을까? 필자는 그것이 일종의 배신이라고 생각했다. 필자는 컴퓨터를 영혼을 가진 생명체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과거에 소유했던 MSX II, Apple IIe, SPC-1000A 컴퓨터들이 수호천사가 되어 지금까지 필자를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필자는 순진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PC에 대한 배신을 선뜻 선택할 수 없었다.어쨌든 컴퓨터 대신 입시 공부를 선택한 멤버들과 컴퓨터와의 관계는 소원해졌고, 웬일인지 그것은 회복되지 않았다. 어쩌면 배신당한 컴퓨터가 다시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한 대학 신입생이라는 것이 꽤나 방탕한 시기이고, 그리고 절묘하게도 1990년 전후의 시기는 8비트 PC와 16비트 PC의 세대 교체가 이루어지는 시기였다. 그러한 여러 가지 요인들에 의해 8비트 PC 시절의 영재들은 대학으로 사라졌고, 이후에는 컴퓨터에 대한 열정을 회복하지 못하고 대부분 평범한 사용자로 남게 되었다.낙오자가 된 영재들그렇다면 사랑하는 컴퓨터를 한시도 포기할 수 없어, 차라리 대학을 포기한 멤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한 멤버들은 대부분 나름대로의 철학을 갖고 있었다. 또래의 누구보다도 일찍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발견했다는 자부심, 학교 공부는 자아실현에 의미가 없으며, 대학에서도 배울 것이 없다는 확신 등이 어우러져, 남들이 볼 때는 어떻든 그저 세운상가에서 PC를 조립하며 프로그래밍 아르바이트를 할지언정 무의미한 대학에는 진학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또는 진학하고자 해도 이미 학교 공부를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성적이 부실한 멤버들도 많았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모든 것을 올인 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대학을 포기한 멤버들의 인생은 그다지 잘 풀리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사업을 한 후배도 있고, 탁월한 프로그래밍 실력을 인정받아 회사에 취업한 친구도 있고, 세운상가에서 매장을 운영한 이도 있지만 그들의 치기 어린 자신감은 이 사회에서는 애초부터 인정받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다는 기분만으로 살아가기에, 이 사회는 너무나 많은 전제 조건을 요구하는데 그것에는 학력 및 경륜이 포함된다. 지금은 그래도 좀 나아졌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더욱 심했다.당시 필자 또한 대학에 진학하지 않기로 결심을 하고 고등학교 3학년 1학기 때까지 프로그래밍에 미쳐 살면서 많은 대외 활동을 하였다. 고3때 밤을 새며 ISAM 기반의 데이터베이스 처리 프로그램을 작성할 정도였다. 하지만 고3 1학기 때 갑자기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사회의 냉혹함을 적나라하게 느끼게 되었고, 그로 인해 뒤늦게 대학을 가기로 결정을 하게 된다. 그 후 고학을 하며 힘겨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데, 이후에도 수많은 사연들이 있지만 여기에서 자세하게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필자의 컴퓨터에 대한 열망은 집안 사정으로 인해 오히려 필자를 꾸준히 한 길로 가게 만들어 주었다.20여 년간의 PC 역사를 생각해 보면, 국내 8비트 PC 시절의 영재들이 몹시 아쉽다. 미국이나 일본을 보면, 8비트 PC 시절의 영재들이 현재 유명 IT 회사의 CTO나 수석 개발자로 일하면서 또한 활발히 대외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우리는 어떠한가? 물론 그런 케이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필자가 아는 수많은 8비트 PC 시절의 영재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필자보다 훨씬 뛰어났던 한 후배는 8비트 PC의 황금기에는 훌륭한 어셈블리 프로그래머였지만, 컴퓨터를 단념하고 서울대에진학하였고 이후 리포트를 쓰기 위해 16비트 PC의 사용자가 되었고 지금은 그저 평범한 회사원일 뿐이다. 그것을 개인의 선택이라고 치부하는 사람들도 있고 실제로 그런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닐 테지만, 입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컴퓨터를 포기하고 평범한 사용자로 전락한 영재들, 컴퓨터를 일순간도 포기할 수 없어 대학을 포기했지만 학력 및 나이 차별로 인해 낙오자가 되어 지금은 잠수해버린 영재들이 상당수 존재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나라 IT 산업의 위상 중 유독 소프트웨어 산업이 저급한 수준에 머무르는 이유에는 분명히 이러한 과거의 요인이 감추어져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꿈 꿀 수 있는 사람을 위한 사회는 언제쯤?20여 년에 걸친 긴 얘기를 짧게 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이것이 제한적인 경험을 가진 한 개인의 사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지인과 얘기를 하며 공유했던, 필자가 갖고 있는이러한 안타까운 기억을 한번쯤은 공개적으로 실토해보고 싶었다. 그로부터 사회가 많이 변했고 지금은 대학 진학에 특기자 전형 등의 혜택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하지만 단지 대학 진학 또는 취업 여부를 떠나, 자신의 적성을 일찍 발견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학생들을 지원하는 사회적 시스템은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진정한 적성을 찾아서 발견해내고, 그 목표를 위해 한 단계씩 정진해나가는 젊은이로서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사회는 언제쯤 올 것인가? 지금과 같은 사회적 풍토에서는 여전히 그것이 요원할 뿐이다. @PS: 지금은 연락이 두절된 당시 PC CLUB 멤버들의 근황이 많이 궁금하다. 혹시 이 글을 본다면 필자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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